▲하계수련생 현장 뿌리교육(栢江 위성록)
--2019년 제24차 하계수련회--
「병계(屛溪) 윤봉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다.」
문헌공 병계(屛溪) 윤봉구(1683~1767) 선생과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 간의 사제(師弟)의 연(緣)은 간암처사 위세옥(魏世鈺 1689~1766) 선생의 주
선으로 1751년 병계 선생 69세, 존재 선생 25세 때 맺어졌다. 처사 선생은 상원군수공 위동전(魏東峑 1649~1713)과 숙부인 금성羅氏의 자로 아버지께서 보공장군 행용양위우부장(保功將軍行龍驤衛右部將),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등 관직에 몸담고 있어 한양 남산 아래 주자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관대작의 자제들과 벗이 되어 함께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들 중에는 훗날 공조판서 문정공(文正公) 이 재(李 縡 1680~1746), 공조판서 문헌공(文獻公) 윤봉구(尹鳳九), 우의정 문헌공(文憲公) 민응수(閔應洙 1684~1750), 좌참찬 문간공(文簡公) 민우수(閔遇洙 1694~1756), 호조참의 직암(直菴) 신 경(申 暻 1696~?) 등은 고위 관직에 오른 대표적 인물이다. 간암처사 선생은 부친이 타계한 후 1721년 33세 때 한양생활을 청산하고 선친의 고향이자 두 형님이 살고 있는 관산읍 방촌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한양과 방촌을 오가면서 관직에 몸담고 있는 지기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처사 선생과 존재 선생은 10촌 종손(從孫)간으로 처사 선생은 6세 때 집안 내 총명하고 영특한 존재 선생을 예산 덕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기 병계 선생에게 보내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케 주선하였다. 훗날 병계선생은 존재선생의 실학적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선생은 위문 선조이신 청계(聽溪) 위덕의(1540~1612) 선생, 호조판서공 위덕화(1551~1598),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 병조참판공 위정철(1583~1657) 등 4분의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였다. 직암(直菴) 신 경(申 暻) 선생과는 매제(妹弟)간이며, 직암은 1759년 장흥위씨 기묘초보의 서문(序文)을 썼다. 병계 선생의 학문은 존재 선생과 장흥위문에 큰 영향을 끼쳐 현세까지 전해지고 있어 선생에 대한 고찰(考察)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문헌공 병계(屛溪) 윤봉구(26세 1683~1767)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구암(久菴),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父는 사재감 첨정 윤명운(尹明運), 모는 완산이씨 이다. 祖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윤비경(尹飛卿)이며, 曾祖는 진사 윤유건(尹惟健), 高祖는 금성군수 윤홍립(尹弘立)이다.
우참찬 윤봉오(尹鳳五)의 형이며, 좌의정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4년(숙종40) 진사시에 입격하여 학문이 뛰어나 천거되었다. 1718년 직산현감, 1721년 문화현령, 1725년 청도군수, 1733년 사헌부지평(持平)·사과(司果) 1734년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5년 부사과(副司果), 1738년 김제군수에 이르렀다. 1740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군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어 1742년 사헌부 집의(執義), 군자감정(軍資監正), 1744년 진선(進善), 1754년 서연관(書筵官)을 거쳐, 1756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계, 1759년 찬선(贊善), 1762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 및 대사헌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766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었다. 한원진(韓元震), 이 간(李 柬), 현상벽(玄尙璧), 채지홍(蔡之洪), 이이근(李頤根), 최징후(崔徵厚), 성만징(成晚徵)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 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 간의 학설은 뒤에 이 재(李 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 선생과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선생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봉구 선생의 생애는 사회적, 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고령군 노강서원, 제천시 황강연당, 합천군 옥계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병계집(屛溪集)>과 <화양존주록(華陽尊周錄)>이 있다.
3. 예산군 봉산면 궁평리 방문
필자는 최근 병계 선생의 흔적을 찾고자 예산군 내 여러 곳을 수소문 끝에 봉산면 궁평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8대손 윤시현(82세)丈과 연락되어 찾아가 상면(相面)하였다. 병계 윤봉구 선생과 존재 위백규 선생 사제(師弟) 간 깊은 연(緣)과 두 분의 훌륭한 학문, 율곡 이이 선생 등 6位가 배향된 경남 합천군에 위치한 옥계서원(玉溪書院) 등에 대해 대화하면서 252년 묶은 세월의 시간을 헐고 후손간의 情을 나누었다.
원래 선생의 묘소 등 흔적이 있던 곳은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일원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당 풍수설을 믿고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무덤을 많은 정성과 노력 끝에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내 가야사를 철거하고 가야사지 터로 이장(移葬)하였다. 이로 인해 가야산 자락에 위치했던 선생의 묘소는 현손 헌일 때 지금의 궁평리로 아우 윤봉오 선생의 묘소는 공주시 유구면으로 강제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5. 맺음말
필자는 최근 병계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예산군 추사고택 관계자, 예산문화원, 예산향토사학자 강희진씨, 덕산면사무소, 옥계리와 상가리 이장님, 봉산면사무소, 궁평리 이장님 등 예산군 지역 내 여러 사람을 통해서 선생의 직계 후손의 거소와 연락처를 알 수 있었다. 이러함은 선생의 직계 후손이 번손 되지 않아 지역에서희귀하기 때문이었다.
봉산면 궁평리에서 거주하는 선생의 직계 8대손 윤시현(1938년생)丈에게 연락하고 찾아가 후손 간의 연정(緣情)을 나누었다. 윤시현 후손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 후 귀촌하여 시골 생활이 낯설고 병계 선생과 파평윤씨 선대에 대해 정통하지 않았다. 필자는 안내를 받아 집 주변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납골당 답사와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교지 47매, 사본 병계집을 확인하였다. 선생의 유품을 충남대학교, 예산문화원 등 협조를 통해 박물관 등에 기탁하여 선생의 유품을 관리하는 것이 선생을 알리면서 오래토록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강력히 권유하였다. 현재 봉산면 궁평리, 덕산면 옥계리·상가리를 포함한 예산군 내에는 선생의 후손은 윤시현丈 외거주자가 없다.
이밖에 가장 가까운 5대조 경조, 경유 계열의 후손 5가구가 당진시에 거주하고 있다.병계 선생과 존재 선생의 큰 차이점은 후손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병계 선생은 당대 학문이 뛰어나면서 강직하여 세자를 교육하는 진선, 찬선과 대사헌, 공조판서 등 벼슬을 두루 지내 전국 여러 가문의 특출한 인재들이 찾아와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 이후 직계 후손들의 관직 출사가 없고 번손 되지 않아 사우 건립, 유고문집 국역 등 체계적인 후손 역할이 없었다. 근래 선생에 대한 학계의 학문연구 내용은 금번에 확인하지 않아 기술을 생략한다.
이에 비교하면 존재 선생의 성관(姓貫)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벽촌 장흥으로 당대 가문에서는 조정(朝政)에 출사한 관료가 미미하였다. 선생은 1765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당대 폐단으로 포기하고 향촌에서 강학하면서 실학저서 정현신보(政弦新報) 등 100여권을 저술하였다. 1796년 선생의 학문이 호남위유사 서영보(1759~1816)를 통해 정조대왕에게 알려져 거듭된 命에 의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제117대 옥과현감에 제수되어 1년 4개월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경기전령(慶基殿令)에 임명되었으나 노환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대외적으로 오계(梧溪) 하성도(1736~ ?), 가걸재(可傑齋) 김규행(1770~?), 매산(梅山) 홍직필(1776~1852), 둔재(遯齋) 김광길(1789~1851) 등과 위문 내에서는 아우 성균생원 서계(書溪) 위백순(1737~1815), 족제 팔취당(八取堂) 위백훈(1738~1815), 족질 묵와(默窩) 위수택(1739~1796), 원취당(願醉堂) 위도순(1748~ 1816), 죽오(竹塢) 위도한(1763~1830), 삼회당(三悔堂) 위도임(1765~1838), 손 위영의(1788~1841) 등을 거쳐 계승 발전되었다.
이후에는 연암거사(蓮庵居士) 위 영 경 ( 1 7 9 7 ~ 1 8 7 1 ) · 운 곡 ( 雲谷) 위영서
(1799~1868)~증손 위경곤(1812~1864)~지족헌(知足軒) 위상기(1822~1899)~다암(茶嵓) 위영복(1832~1884)~소석(小石) 김노현(1845~1915)~계사(桂史) 위택기
(1858~1940)~홍의재(弘毅齋) 위 봉(1863~?)~오헌(梧軒) 위계룡(1870~ 1948)~산음(山陰) 위근(1883~1971) ~상은(觴隱) 위숙량(1887~1953)~원행(元行) 위효량(1897~1964)~다초(茶樵) 위복량(1897~1979) 등을 통해 장천재(長川齋)와 다산재(茶山齋)에서 신학문이 확산된 1975년까지 후손들에게 강학하여 학문과 사상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손들은 1398년 창건한 장흥향교에 앞장서 참여해오면서 1764년 이후부터 현재 간 교임록에 의하면 수장(首長)인 전교(典校)를 48명 배출하여 유도진흥에 기여해왔다.
근래에는 이해준 목포대 교수, 김석회 인하대 교수, 하성래 안양대 교수, 이종출 중앙대 교수, 오항녕 전주대 교수, 위홍환 중등학교장,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 김희태 문화재 전문위원 등 다수의 학자들이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장흥위문 문중 후손들은 1806년 죽천사(竹川祠), 1929년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 1965년 곡성군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선생을 배향하고 1984년 선생의 사우 다산사(茶山祠)를 창건하였다.
1984년 방촌리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 존재고택 (存齋古宅)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1985년 장흥군 내에 선생의 입상 동상과 2018년 좌상 동상을 세웠다. 1767년(丁亥) 선생이 창건한 묘각 다산재를 2003년 4차 중건(重建)하였다. 2013년 정부의 문화사업 추진 일환에서 예산 지원으로 전주대학교 고전학 연구소(변주승 교수)에서 주관하여 존재집을 국역(國譯)화 하였다. 2015년 한·중·일 실학학회에서 함께 선정한 동아시아 실학 사상가 99인에 포함되어 학문이 재조명받고 있다.
2016년 존재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선생이 탄생한 5월 15일을 "존재의날"로 지정하여 장흥군의 성원(聲援)과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정기총회 및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여 선생의 실학적 학문과 사상을 기리고 있다. 2018년 존재고택에서 소장해온 유품 1,000여점을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하여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이 말씀한 삼벽(三僻)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후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사료된다.
경남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370번지에 옥계서원이 위치한다. 이곳에는 율곡(栗
谷)이이(李珥 1536~1584),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 모려(茅廬) 최남두(崔南斗 1720~1777),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입암(立菴) 박준흠(朴俊欽 1719~ 1796), 몽관(夢關) 최유윤(崔惟允 1809~1877)선생 등의 도덕과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소원사(遡源祠)에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월 中丁일 향사하였다.
본 향사에 장흥위문 안항공파 웅천종중에서는 매년 3~4명의 후손이 참여해왔으나,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로 경주최씨 광과정파 주부공종중(대표 최영업)에서는 2018년부터 향사를 봉행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금번 병계 선생의 행적을 찾으면서 파평윤씨 선대, 선생의 교지를 통한 관직, 후손, 가야산 일원 옥계리와 상가리 흔적 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서남해안벽촌에 머물고 있던 장흥위문을 위한 간암처사 위세옥 선생의 통한(痛恨)과 존재 선생의 삼벽(三僻)의 말씀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금번 병계 선생의 흔적을 찾는 예산군 방문 등 과정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은 예산향토사학자 강희진님,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문순수 차장님, 옥계리 강태흥 이장님, 직계 후손 윤시현님, 파평윤씨 소정공파 사무국장 윤여신님, 파주시 거주8대 방손 윤방현님 등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栢江 씨족문화연구위원의 탐구정신과 열정은 남다릅니다. 요즘 위문과 더불어 타 씨족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은 넓어지고 있습니다. 장흥신문에 게재되는 고정칼럼란을 통해 名文이 두루 알려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