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19세 진현은 당동에 입향해 정착한다. 어산(語山) 또는 봉황동에 살던 진수(晉秀)의 둘째 아들 곤(鯤)이 입양한 후 아버지는 수각(水閣)을 지어 공부하게 한다. 그가 7세 무렵인 1521년(辛巳)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장흥으로 귀양을 온다. 영천자는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으로 1519년(중종 8)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던 해에 진사에 장원과 현량과에 급제하고, 2년 후인 안처겸(安處謙)사건에 연루된 혐의이다.
영천자는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과 사제 간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장흥에 적거하면서 기봉을 가르쳤다. 기봉집(岐峯集)에「甲辰四月奉送靈川」(申潛字元亮, 時先生詩山守, 過冠山舊居) 즉 '갑진년 4월 신잠선생을 삼가 전송하며(신잠은 자가 원량이다. 이때 선생은 시산(泰仁)태수가 되어 관산의 옛 사시던 집에 들른 길이었다)' 등 시산잡영편(詩山雜詠篇)에 스승을 위해 쓴 30여수의 시에서 확인되고 있다(기봉집 189쪽).
시를 근거로 몇 가지 사실을 추적해 보자. 영천자는 1521년에 귀양와서 17년 간 지내다 1538년 해배됐다. 해배되면서 전북 시산(태인)군수에 제수됐다. 기봉은 영천자가 시산군수로 있다가 1544년(甲辰) 해남을 거쳐 관산의 예전 살던 집인 죽원(竹院)과 매창(梅牕)에 들른 후 전송한 시다. 기봉이 영천자에게 수학한 시기는 16세까지이다. 그러므로 7세 연상인 당곡공(堂谷公)과 동문수학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장소는 당동의 수각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있다. 이종출(李鍾出) 교수는「조선후기 향촌문화사와 존재 위백규」심포지움「존재 위백규의 가통과 향촌활동」이란 논문에서 위정훈(魏廷勳․1578~1652)이' 장흥에 유배 온적이 있는 신잠(申潛)을 배향하는 사우를 건립하는 일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이 또한 선대에서의 인연을 되새김으로서 위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 않았겠지만 명분을 세우고자 하는 중요한 향촌활동의 일환이었다' 고 했다.
영천자의 교학(敎學)은 관산의 위씨에게는 교훈으로 작용했다. 청계공(聽溪公)은 1573년 중사마시(中司馬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양춘재(陽春齋)에서 후학을 지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금(聽禽), 웅천(熊川), 만회재(晩悔齋), 반계(磻溪) 등 조카들이 그들이다. 이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중부(仲父)에게 경학을 읽히기는 하였지만 거의 자득오해(自得悟解)하는 독학이었다.' 고 했으나 청계공의 학문적 수준을 과소평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마시에 합격한 수준이면 결코 만만찮은 실력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주의 행재소로 왕을 찾아 알현하고 운향관을 제수받고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鐘) 등과 수창(酬唱)한 사실에서도 그의 지식을 가름할 수 있다. 더구나 여응종은 청계공의 인물됨을 아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선생의 수준이 낮아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이해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가당찮은 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오덕의 스승은 알 수 없다. 5형제의 글이 진사와 무과에 급제할 정도였다면 상당한 수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둘째, 청계공(聽溪公)은 임진왜란 때 의주 행재소와 운향관으로 소임을 마치고 구향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에게 배운 제자에는 자신의 아들을 비롯해 모든 조카들이다. 이교수는 반계공(磻溪公)이 그에게 배웠지만 스스로 깨우친 부분이 많다고 풀이하나 옳지 않다. 적어도 진사시에 합격한 실력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
막내인 안항공(顔巷公)도 방촌으로 분가해서 후학을 지도했다. 22세들 사촌형제들은 청계공과 안항공에게서 배우고 그들은 다시 23세로 대를 이어 가르쳤다. 그리고 24세 수우옹(守愚翁) 형제는 장흥에 유배 온 노봉(老峯)에게 배웠다. 詩․書․畵 3절이란 삼족당(三足堂)과 아들 영이재(詠而齋)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른다. 간암공(艮庵公)은 서울에서 학문을 익히고 하향했다. 25세 잉여옹(剩餘翁)은 외가에서 배워 고흥에서 훈장을 했다.
존재공의 스승은 어릴 대는 종조부인 춘담공(春潭公)이다. 병계 선생 문하로 들기 전에는 주로 간암과 잉여옹에게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문중의 학풍은 계속 이어져 한말에는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기정진(奇正鎭)․정의림(鄭義林)․기우만(奇宇萬) 등에게 배운다. 춘헌(春軒)․죽암(竹庵)․오헌(梧軒) 등의 학덕은 일제도 함부로 하시하지 못할 정도로 문중의 힘으로 작용했다. 관산 위씨의 힘은 역시 글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급제하고, 정명(廷鳴․1589~1640)은 향시에 13번, 1611년 진사에 합격했다.
참봉공의 손자와 증손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칭을 없애고 서궁에 유폐한 사건이 발생했다. 종형제들은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보고 왕(광해군)마저 인륜도덕을 무시한 행위를 목격하고는 과거보기를 단념했다. 저마다 충분한 학문적 자질을 갖추었으나 왕의 패륜에 출사포기로 저항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판사공으로 인해 출사를 포기한데 이어 두 번째 출사포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 1624년 갑자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연거푸 일어났다. 5덕의 자손들 가운데 정열과 정철은 무관으로 출사했고, 임천에 있던 종형제들도 국가를 위해 앉아있지 않았다. 정묘호란에는 정망(덕홍)․정헌(덕의)․정훈․정명(덕후) 등 4명이 소모사(召募生)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격문에 따라 부진했다. 병자호란 때 정훈은 안방준의 창의에 참여하고 동생 정명은 옥과현감 이흥발에게 가담했다.
임진(壬辰)․병자(丙子) 양란에 5덕과 그 자손들의 활약은 곧 위씨를 관산의 사족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고려 때 임씨들이 황후와 시중을 배출했지만 이미 800년 저쪽의 일이다. 문과 등제자는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무과출신 현감이나 군수를 5명이나 배출된 것은 벽촌인 관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넷째 덕화의 집안은 3대가 현감과 군수를 했고, 다섯째 집안도 2명 역임했으니 그 권위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방촌은 유명세가 있는 동네이다. 우선 고려 때 현(縣)의 치소라는 점이 적지 않은 유명세를 지니고 있다. 거기다 넷째의 집은 바로 치소자리이자 현감과 군수가 3대에 걸쳐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안항공의 후손 가운데 둘째 아들 집안도 현조인 정열과 현손인 존재(存齋)가 현감을 지냈다. 한 동네에서 벼슬아치가 이 정도 나왔으면 관존민비(官尊民卑)에 젖어 있는 우리의 정서로 봐서 결코 흔치 않은 사례임이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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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7) 위정훈의 청금유고 및 제15회 향토문화연구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문을 숭상한 문중이 바로 우리 문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