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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전기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봄이었다.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며, 중앙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언론계 선배 정연복 씨의 여러 차례에 걸친 간곡한 당부를 외면할 수 없어서 집필을 시작했다. 정연복 씨와 신문사에 다닐 때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대한언론인회 모임을 통해 자주 만났던 것이다. 또 변변치 못한 글재주이긴 하나 정씨가 내 글의 애독자이기도 했다.
사실 정몽주 선생은 내가 이순신(李舜臣) 장군, 원효대사(元曉大師)와 더불어 존경하여 마지않는 선현이므로 언젠가는 한 번 전기소설을 써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기소설 <불패-이순신의 전쟁>은 2012년에 바움출판사에서 펴낸 바 있다.
정몽주 전기소설은 1년간의 자료 수집과 공부 끝에 집필을 시작하여 지난 해 초에 마침내 초고가 완성됐다. 그러고도 또 한 해가 넘도록 출판을 미루고 계속 수정 가필을 했다.
정몽주 선생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 말기에 태어나 오로지 충 ․ 효 ․ 인 ․ 의로 일관된 일생을 보낸 우리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과거에 세 차례나 장원급제한 천재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정치가였으며,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국익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리학에 통달해 당시 학계의 큰 별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으로부터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출중한 유학자였다. 또 정몽주 선생은 웬만한 일에는 좀처럼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를 관조할 줄 알았던 풍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영원한 겨레의 스승으로 우러러보는 점은 무엇보다도 불충과 불의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한 번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킨 충효사상의 사표(師表)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비겁한 사람은 여러 번 죽지만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깨우쳐주었다.
개성 선죽교 위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56세로 일생을 마친 만고충신 정몽주 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모현(慕賢)이나 능원(陵院)은 정몽주 선생의 절의를 추모하는 한편, 그의 묘소가 있음으로써 생긴 지명이다.
분당신도시에서 389번 지방도로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으면 용인시 모현면 오포농협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광주 ․ 용인 쪽에서 수원으로 가는 43번 국도를 800미터쯤 내려가면 오른쪽에 정한영효자비각이 서 있고, 왼쪽으로 정몽주선생묘소로 올라가는 영모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 포장길을 500미터쯤 올라가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은 정몽주선생신도비를 모신 비각이 나오고, 다시 100미터를 더 올라가면 영모재에 이른다. 정몽주 선생 묘는 이 영모재 뒤편 문수산 기슭에 있다.
안내문에는, ‘전설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하신 뒤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 중 면례 행렬이 용인시 수지읍 경계에 이르자 명정이 바람에 날려 이곳 묘소 자리에 떨어져 안장했다.’고 쓰여 있다.
정몽주 선생과 부인 경주 이씨를 합장한 묘소 앞의 비석에는, ‘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몽주 선생을 죽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왕위에 오른 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선생에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 벼슬을 추증했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충신의 후손과 후학들은 이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년) 12월에 경상도 영일현, 오늘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동에서 이름 없는 선비 영일 정씨(迎日鄭氏) 운관(云瓘)과 영천 이씨(永川李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이씨 부인이 임신 중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떨어뜨린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여 처음 이름은 몽란(夢蘭)이라고 했다. 그 뒤 몽란이 9세 때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용이 마당의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어나 보니 몽란이 그 배나무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바꾸었다. 몽주라는 이름은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지은 이름이며, 자는 달가(達可), 아호가 포은이다.
정몽주 선생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총명이 뛰어난 데다가 힘써 공부하니 곧 주위에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세 때에는 부친상을 당하자 불교가 흥하던 고려시대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유교의 법식대로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도 알려져 임금이 효자비를 내렸다.
선생은 삼년상을 마친 공민왕 6년(1357년) 21세 때 처음으로 국자감에서 치른 과거인 동당감시(東堂監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 국자감이 바로 뒷날 성균관의 전신이다. 이어서 24세 때인 공민왕 9년(1360년)에는 문과 초 ․ 중 ․ 종 3장을 모두 장원급제하여 온 나라에 천재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렇게 문신으로 벼슬길에 오른 정몽주 산생이었지만 무신으로서도 공로를 세웠다. 공민왕 12년(1363년)에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여진족을 물리쳤는데, 그때 같이 싸운 병마사가 바로 뒷날의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였다.
정몽주보다 두 살 위인 이성계는 이때부터 정몽주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평가했고, 정몽주도 이성계의 탁월한 용병술에 감탄하여 이후 두 차례나 더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외적을 물리쳤다.
정몽주 선생은 비교적 벼슬길이 순탄하여 공민왕 22년(1373년)에는 성균관 대사성, 요즘으로 치면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유학을 깊이 연구하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이를 기준으로 정치 ․ 사회적 병폐를 일소하고 제도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선생은 고려 초부터 누적되어 온 불교의 폐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유학(儒學)의 보급에 힘썼으며, 이를 위해 개경에는 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을 통한 윤리의 학립과 도덕성 회복을 도모하였다. 또한 관리들의 부패와 무능을 막고 고통 받는 백성을 구호하기 위해서도 여러 모로 노력했다.
정몽주 선생은 학자요,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중원을 장악하고 쇠퇴해가는 원나라를 몽골 초원으로 몰아내고 있었지만, 고려는 아직도 원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해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조정도 친원파와 친명파로 갈려 있었다. 친원파는 최영(崔瑩)과 이인임(李仁任) 등 원로 보수파가, 친명파는 이성계와 정몽주 같은 신진 개혁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 선생이 친명노선을 취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안정과 왕실의 중흥을 위한 방편으로서 보다 안전한 외교정책을 택하려는 것이지 당파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몽주 선생은 공민왕 21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고, 우왕 3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왜구들의 노략질을 금하도록 타이르는 한편 납치된 우리 백성 수백 명을 석방시켜 데려오는 탁월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우왕 10년(1384년) 조정은 주원장의 생일 축하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모두가 겁을 먹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에도 선생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환대를 받고 얽혀 있던 양국 관계를 좋게 풀었으며, 2년 뒤에도 명나라에 가서 5년간 밀린 세공(歲貢)을 면제받는 등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사건이 벌어졌다. 이성계는 여세를 몰아 최영을 죽이고 우왕도 쫓아내버리고 창왕을 내세웠다. 정몽주 선생도 처음에는 이성계의 개혁 명분에 공감하여 정국 수습에 협력했다. 스스로 수상인 문하시중이 된 이성계 밑에서 부수상인 수문하시중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일당이 우왕에 이어 창왕도 몰아내 죽인 뒤 공양왕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내세우고 국정을 전횡하자 그들과 담을 쌓기 시작했다. 그 뒤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 날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평소에 숙부처럼 모시던 정몽주 선생을 초대했다. 그리고 ‘하여가(何如歌)’로 알려진 이런 시조로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그러자 정몽주 선생은 그보다 더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를 불러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했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다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도저히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할 결심을 굳혔다. 공양왕 4년(1392년) 4월 4일. 일세의 충신 정몽주 선생은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선죽교(善竹橋) 위에서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최영에 이어 정몽주마저 쓰러지자 마지막 두 기둥을 잃은 고려조는 기울어가던 집이 무너지듯 마침내 나라가 망해버렸다. 이성계 일파는 그 뒤 남은 고려의 충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그해 7월에 고려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개국했다.
정몽주 선생은 탁월한 정치가요 외교가요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출중한 문장가요 시인이기도 했다. 선생은 파란중첩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굳은 절개를 지키면서도 수시로 떠오르는 시상에 붓을 들었다. 다음은 그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읊은 시이다.
- 한평생을 남북으로 떠도니
이 심사가 더욱 고달프구나.
고국은 저 바다 서쪽 가인데
외로운 배는 하늘 저 끝에 있네.
창밖의 매화는 봄빛이 아직 이르고
판잣집에는 빗소리만 요란하구나.
나 홀로 앉아 종일토록 보내노니
집 생각만 더욱 사무치누나. -
지난해에 KBS 1TV의 주말 사극 <정도전(鄭道傳)>이 방영되었다. 주요 배역을 중량감 있는 탤런트들이 맡아서 열연했고, 제작비도 많이 투입된 듯했다. 중요한 전개 내용은 <고려사>나 <태조실록> 등 사서의 기록과 큰 차이가 없고, 드라마틱한 세부 사항만 달랐다. 그런데 이 사극을 보다가 한 가지 상식에 어긋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몽주에게 정도전이 반말을 한다는 점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설정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또 과거도 2년 앞서 급제하여 벼슬길에도 먼저 나아갔다. 출신성분도 두 사람은 다르다. 정몽주가 명문가에서 태어난 반면 정도전은 어머니가 당시에는 천민인 서녀였다. 그 자신도 서녀에게 장가들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리 서얼(庶孼)의 과거 응시를 막는 법은 없었으나 그래도 출세에는 지장이 있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뒷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거취를 두고 조정에서 크게 다투고 결별할 때까지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 정치적 입장도 같았다. 개국 초부터 쌓여온 불교의 폐습을 신학문인 유교를 통해 개선하려는 것도 그렇고, 망해가는 원나라를 멀리하고 새로 일어선 명나라와 관계개선을 도모하려는 것도 두 사람은 성향이 같았다.
그래서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귀양도 같이 갔었고, 정몽주는 정도전을 위해 <맹자(孟子)>를 읽어보라고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절친한 사이라고 해서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반말을 했다고 그리는 것은 상식적이지 못하다. 비록 정도전이 이 사극의 주인공이라서 그를 띄우려고 그렇게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인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묘사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사람이 한두 살 차이도 아니고 무려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났다. 이를테면 정몽주가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정도전은 중학교 1학년, 정몽주가 대학교 3학년이라면 정도전은 고등학교 1학년인 셈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동년배처럼 터놓고 지냈다고?
게다가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2년 앞서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아무리 정치적 견해가 같다고 하고, 시문(詩文)으로 깊은 속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반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건 아니다. 더군다나 정몽주와 정도전 모두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다섯 살이나 연상이며 대선배인 정몽주에게 정도전이 반말을 하고, 심지어는 하수처럼 함부로 대한 것으로 그렸으니 이런 망발이 있는가. 이것이 지엽적인 문제로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관계, 정몽주의 비중을 볼 때 그렇게 적당히 그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비록 공부가 부족하고 재주는 미천하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정몽주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소설로 엮어보았다. 또 20대부터 80대까지 누구나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쓰노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평가는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우리 역사를 빛낸 명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장엄했던 일생이 이러 했구나 하고 독자들이 다소나마 배우며 느끼는 점이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전기소설을 집필하는데 도움을 주신 정몽주 선생 후손 모임인 포은종약원(圃隱宗約院)의 여러분과, 어려운 여건에도 출판을 맡아준 바움출판사 이성훈 사장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5년 8월
平海居士 黃 源 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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