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900년 전 금관가야는 철 기술의 발달로 천민들 입에서 매일 고급 술 냄새가 날 정도로 잘 살았다.
이웃나라 백성들이 앞 다투어 금관가야로 귀화하거나 밀입국을 시도했다.
신라 백성이 가장 많았다.
신라 왕은 노심초사했고 신하들에게 대책을 지시했다.
신하인 '원진'이 가야로 떠나게 됐다.
원진의 부인은 가야로 떠나는 남편에게
'가야는 철광석을 캐기 위해 밀입국하는 백성을 용인하는 만큼 이를 합법화하는 것이 계책'이라고 일러줬다. 원진은 가야의 수로왕을 만나 '신라와 가야 백성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지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신라인 일자리 찾아 밀입국
금관가야 세금 부과 합법화
신도시 들어서 '옛날' 재현
주변 보세창고 수출 큰 역할
이같은 제안이 손해라고 생각이 든 수로왕은 원진을 참하라고 명했다.
이를 본 수로왕의 딸인 묘견공주는
'가야에 철을 만드는 숯 생산량이 줄어 숯을 수입해야 하는데 신라는 많은 고급숯을 생산을 하고 있다.
사방의 적이 호시탐탐 가야를 노리고 있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신라뿐이다.
가야의 미래를 위해 양국 백성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지역이 필요하고 세금을 징수하면 손해도 없어
원진의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원진은 '물품 거래를 금하지 말자'는 뜻으로 '물금(勿禁)'이라는 지역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수로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 양산고을 옛이야기
경남 양산에는 낙동강과 양산천 사이에 '물금(읍)'이라는 마을이 있다.
가락국 역사서인 '개황력'에 따르면 개황 77년(118년)에 물금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때
물금은 역사는 1천9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금에는 가야시대에 개발된 철광산도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철은 품질이 뛰어나지 않아 이를 제련하기 위해
많은 양의 고급 숯이 필요했던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묘견공주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광산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80년대까지 운영됐다.
현재의 물금에는 4개 마을, 물금과 증산, 가촌, 범어리가 있다.
가야시대 때는 가촌·범어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강이었다.
이 지역은 양산신도시가 조성되기 전까지 낙동강이 범람하면 일시적으로 물을 저장하는
유수지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1천900년 전 물금에서 있었던 일들이 하나 둘 재현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물금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지대였다.
당시 인근 일본과 중국은 물론 인도 등지에서 철과 각종 비단을 구입하기 위해 찾았다면
오늘날은 각종 공산품이나 의료관광을 위해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양산신도시에는 양산부산대병원을 비롯해 어린이 전문병원, 한방병원, 치과병원이 건립돼 운영되고 있다.
이들 병원에는 일본과 중국은 물론 러시아, 중동에서 치료 등을 위해 찾고 있다.
상반기 동안 2천100여 명의 외국인이 방문했고 연말까지 5천 명을 넘어서는 등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또한 물금 인근지역인 유산동과 상북면 일대에는 [70여 개의 보세창고]가 운영 중이다.
보세창고는 1980년대 부산에서 양산으로 옮겨왔다.
보세창고는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을 일시적으로 보관했다가 시세에 따라 국내에 팔거나 아니면
다시 수출하기 위해 보관하는 곳이다.
2천여 개의 기업체가 가동 중인데 대부분 수출업체다.
양산의 보세창고에서 1천900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지대인 물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양산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가야시대 때와 현재의 물금은 지형만 약간 차이가 날 뿐 그 역할은 같다고 볼 수 있다"며
"지역 지명을 분석해 보면 과거는 물론 현재,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권 기자 ktg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