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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게 살아가는 길
시편 101:1~8
지난 시간 생각한 시편 100편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찬양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시편 100편을 노래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이제 오늘 본문은 시편 100편 바로 뒤에 있는 말씀으로, 사람이 그의 집안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며, 그의 눈앞에서 죄를 어떻게 벗어버리며 악한 세상과 짝하지 않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최상의 찬양은 우리가 순수해야 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은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송하고자 할 때 최상의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뜻을 분별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눈물로 소리 높여 울부짖는 기도도, 아름다운 피아노나 오르간의 소리도 그리스도의 모범 된 생활에 조화되지 않는 한,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려면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충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편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가의 좌우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고테 공작은 자기의 영내에 있는 모든 관리들에게 이 시편을 써 주어서 자기의 유시를 삼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순조 왕 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쓴 ‘목민심서(牧民心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도 조선 말엽의 부패한 관리의 바른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도 정치가로서의 도리를 기록하여 자기 자신의 거울을 삼고, 또 같은 정치가들에게도 거울이 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가 새 공화국을 수립하고 선진대열에 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때, 이 시편이 가진 의미가 중대하다고 믿어집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의로운 위정자를 모시는 일이요, 다음으로는 민도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도의 향상이 있기 전에 포악하고 부패한 관리를 가지면 그 민중은 끝내 억압을 당하지만, 만일 억압 중에서라도 민도가 향상되면, 결국 무서운 유혈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정치가나 청렴하고 애국적인 공무원을 못 가지면 그 나라는 기를 펴보지 못하고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왕으로서의 합법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그의 손에 권력이 쥐어졌을 때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다윗은 세 차례에 걸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맨 처음에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그의 아버지 이새의 집 베들레헴에서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사무엘하 2장 4절에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7년 반 후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왕에게 나올 때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고 사무엘하 5장 3절에 말씀했습니다.
정부의 엄숙한 책임을 마음에 두면서 다윗은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숙고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본문 말씀과 같이 행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즐거운 가운데 노래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말했습니다.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이상적인 위정자의 모습은 인자와 공의입니다. 인자와 공의가 밑바탕이 되고, 그 위에서 정치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법만 가지고 목석처럼 굳은 자도 그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으며, 물과 같이 인자한 마음만 가지고도 그 백성의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만 있으면 버릇이 없어지고 혼란을 이루게 될 것이고, 공의만 행하면 무서워서 못 견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이와 같은 양면이 있습니다. 가정도 보십시오. 부모님을 볼 때 어머니는 사랑으로 부드럽게 대해 주십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공의로 엄하게 대해 주어 이상적인 가정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자한 위정자는 국민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알고 가슴아파하며, 공의로운 위정자는 자기의 오른팔이 법을 범했어도 사정없이 찍어버릴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이상적인 통치의 원리는 언제나 인자와 공의의 겸전을 요하고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인자는 나약에 흐르고, 인자가 없는 공의는 횡포로 전략해 버리고 맙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겸한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인자와 공의, 두 가지가 다 임하게 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래, 한편으로는 많은 책망과 곤고를 당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에게 행하신 놀라운 구원과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섭리로 우리 인간들에게 인자와 공의를 합하여 역사할 때, 그에게 이 두 가지로 인하여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갈대아 번역판에는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당신께서 나에게 어떠한 심판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찬송을 부르겠나이다.”
우리의 외적인 조건이 기쁘거나 슬프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좋은 일을 당하면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한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라는 말씀을 썼습니다.
주 안에서만 항상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지, 주 밖에서는 기뻐하거나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순조로운 조건에서 기뻐하며 웃는 것이나, 괴로운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노래를 위한 곡조로부터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다윗 자신의 인자와 공의에 관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 자신이 자비롭고 공평하고 현명하게 되기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 2절을 보십시다.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결심을 봅니다.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화를 받은 다윗은 그의 뒤를 이은 솔로몬과 같이 지혜로움을 원리로 삼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장 안전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만일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나는 장엄하게 행하겠노라.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왕다운 위풍이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나의 태도가 얼마나 당당한지를 보여 주고, 나의 말이 얼마나 권위가 있으며, 내가 얼마나 고상하게 나의 일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며, 또한 왕관이 얼마나 나에게 잘 어울리며 나보다 고상한 왕이 일찍이 없었던 것을 보여 주겠노라.”고 말할 것입니다.
다윗도 이와 같은 자만한 마음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나은 길을 택하였습니다. 다윗은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라고 했습니다. 혹시 다윗과 같은 기회를 얻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를 즐기겠노라. 이스라엘의 보좌에 일단 오르게만 된다면 내 마음대로 한번 해 보겠다.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무엇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행하겠노라. 나는 수많은 말과 꽃수레를 그리고 노래부르는 남녀를 둘 것이며, 내가 구상하는 모든 육신적인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하겠노라. 내가 일단 권좌에 오르게만 된다면 나 자신을 즐겁게 하리라.”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은 장엄한 것도 아니었고 쾌락도 아니었으며 지혜로운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주의하오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출발하는데 여러분이 가정을 이루기 전에 인생의 바른 처신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성패가 바른 마음가짐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참되고 훌륭한 지식을 얻고 하나님의 계명을 이해하며 그의 율법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이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완전한 길은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의미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그의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완전한 길에 주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다윗이 이 길을 택했습니까? 그것은 왕이 마땅히 택해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지혜 있는 길을 택하지 아니하면 국민에게 불행이 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민족이 르호보암과 그 밖의 어리석은 왕들 때문에 민족적으로 당한 환난이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나라나 민족 뿐 만이 아닙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행로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완전한 길은 지혜로운 길이요, 지혜로운 길은 완전한 길입니다. 다윗은 “내가 하오리니(I will)”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충분한 결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대목을 보십시오.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다윗은 자기의 부족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합니다. “나는 연약하고 아무 것도 나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 많으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언제 내게 임하시겠습니까?” 하는 간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얼른 들으면 교만하다고 할 정도로 담대한 고백이지만, 사실 이 고백처럼 겸손한 말씀은 없습니다. 주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한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면 주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만족하게 살 수 있고, 기도 없이도 일을 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고도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다. 우리가 피곤한 몸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전에 모인 것은 세상 적인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라야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이 임할 때 완전한 길에 주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이 말씀은 거룩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주여 내가 바르게 처신할 필요가 있사오니 주께서 내게 오셔야겠습니다. 나는 청지기요,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내게 오셔서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나의 주인께서 나를 아십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던 일을 셈하라 하시면 답변하실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다윗은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매우 현명한 말입니다.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모든 것이 바르게 됩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솔직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가정은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가정에서까지 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볼 때의 사람과 가정 안에서의 사람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밖에서는 체면이 있고 사회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기 때문에 대개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르게 행하려고 하면 그 마음이 가정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먼저 바르고, 그 다음에 우리의 마음을 행동으로 가정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신성한 가정에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참한 사람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마음이 바르고, 그 바른 마음이 그대로 행위로 나타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그리스도인은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생활을 넘겨다보며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구나 가정생활에 대하여 간섭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밖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성도인 것처럼 살지만, 가정에 돌아와서는 악마처럼 처신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을 바로 알려면 가정에서의 그의 모습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간단하면서도 엄격한 테스트입니다.
여기,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그의 생활이 가정에서 거룩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는 그가 좋아하는 대로 경건한 척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가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는 천박하고 무가치하며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어린이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것이 좋은 본이 되든, 나쁜 본이 되든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살고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참된 전도는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행해야 합니다.
다윗은 본문 3절에 자신이 악을 행하지 않기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서약을 합니다.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그는 그의 신하를 곤궁하게 함으로 그 자신을 부요하게 하거나, 저들의 권리를 탈취함으로써 그 자신의 특권을 확대하는 일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일에도 바르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죄악된 일을 피할 뿐 아니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손에 부정의 오점이 묻는다면 그것을 씻어 버려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4절에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비루하여 아첨하는 자나 배신자는 백해무익합니다. 여기 ‘사특한 마음’은 간사한 마음을 가리키는데, 서양 속담에 “Honesty is the best policy(정직이 최상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사한 것은 사람을 못살게 만듭니다. ‘삼국지(三國志)’에서 보면 ‘조조(曺操)’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가리켜 ‘난세지간웅(亂世之奸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힌 간사한 영웅’이란 말입니다.
선한 정치인은 이렇게 인자와 공의를 겸전하며, 비루한 사람과 배신하는 사람을 그 앞에 두지 아니할 뿐 아니라 간사한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우리 본문에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스펄전은 악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잘못 등용해서 쓰다가 망하고 만 사실이 너무 많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치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어진 집권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이웃을 허는 자, 남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고 자기를 내세우려는 사람은 아주 멀리할 뿐 아니라 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웃을 허는 자는 용서 없이 전멸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추호의 동정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면서도, 자기와 같은 동료를 헐고 다니는 자는 아주 멸해 버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명예 훼손하기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오늘이나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7절은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주 강력하게 말하기를 이상적인 통치자는 자기의 호신책이나 구하고 무사안일 위주로 나가는 지도가 아니라, 날마다 악과 불법과 불의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투쟁을 게을리하지 않는 강력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그가 책임 맡은 곳에 불의가 있고 불법한 자들이 날뛰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무책임한 자일 수는 없습니다.
어진 지도자는, 자기가 맡은 곳에서 악을 도모하고 질서를 어지럽혀 포악을 행하는 자를 처치해야 합니다.
스펄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사자들 가운데서 사는 것이 낫다.” 거짓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마귀는 거짓말로 인간의 조상을 범죄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마음 속의 죄부터 끊어 버려 바로 서고,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죄를 몰아내서 세상에 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인자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고, 눈앞에 비루한 자를 두지 않고 배도자를 미워하며, 간사한 마음을 없이 하고 충성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웃을 허는 자나 눈이 높이 교만한 사람을 몰아내 주시고, 거짓 행하는 자나 거짓말하는 자를 우리 눈앞에 서지 못하게 하시고, 죄악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끊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입에서 찬양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완전한 길에 주의하며 완전한 마음으로 우리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난 중에 소망을
시편 102:1~1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대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오늘 저녁 읽은 시편은 다윗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 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그 밖의 선지자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되었을 때에 쓴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제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편의 저자를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표제에 기록된 대로 ‘어느 곤고한 자의 기록’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인은 무거운 영혼의 고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읽을 때 곤고한 사람이 자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따라서 위로가 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기도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도 기도하게 우리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십니다.
지금 이 시편 기자는 말할 수 없는 근심과 걱정 가운데서 그의 심신이 아울러 곤고한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주 절망하지 아니하고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겪습니다. 그래서 지쳐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자빠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보면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이 세상에서는 마귀가 공중의 세력을 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선한 사람들까지도 고뇌하게 되며 곤고로 인해서 나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처지가 곤고하며 우리의 영혼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때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한 어린 아이가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은 아이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어려우면 우리 입에서 자연히 “하나님”, “주님” 하고 찾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을 당해도 찾을 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곤고한 날에 찾을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황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고, 결국 낙심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공부 못한 사람도 아니고, 돈 없는 사람도, 권세 없는 사람도 아닌, 영혼의 아버지가 없는 영적 고아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부르짖습니까?
본문 2절을 보세요.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곤고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은혜롭게 들으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기도로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해야 하고 그의 귀에 들려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 우리가 기도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를 찾으라고 명령하셨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쓸데없이, 의미 없이 찾는 공염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도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하면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나타나시며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께서 나를 빨리 자유하게 하지 않더라도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나를 향한 주의 손길의 역사를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를 향한 주님의 얼굴의 미소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근심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번영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시편 30편 7절에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계십니까?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께 아뢸 때 주님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계신 것을 의식하십니까? 그러면 아무 염려할 것 없습니다.
평안한 가운데 사시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나를 향하신 것을 의식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무리 번영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돌이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나를 위해 주께서 나타나소서. 내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응답도 하소서. 내가 부족하여 찾아 헤맬 때 구원을 허락하소서. 내가 부르짖는 날에 내게 응답하소서.” 근심이 우리를 혹독하게 억누를 때 이와 같이 겸손과 인내로 기도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사실 우리 사람은 다 연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어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지금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본문 3절에서부터 11절까지에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형편을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그의 몸은 야위고 쇠약해졌습니다. 너무 말라서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번영과 기쁨은 뼈가 강건하게 되고 “뼈가 풀같이 번창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에서 냉과리는 화로를 말하는데, 화로에서 타는 것같이 뼈가 녹고 타버렸다고 하는 뜻입니다.
구약 욥기 30장 30절에 보면, 욥이 세상에서 얻었던 10남매의 훌륭한 자녀와 부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그 몸에 창질까지 나서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말하기를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하여 탔구나” 했습니다. 이 시인은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의 생명은 연기같이 소멸되며, 그 몸을 유지하고 있는 뼈도 타버린다고 말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4절에 보니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정말 괴로우면 음식 먹는 것도 잊고 사실 생리적으로도 먹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기쁘고 평안할 때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타액과 위액의 분비가 왕성해서 음식을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몸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괴로우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장 7절에 보면, 한나가 자식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너무 마음에 고통이 심해서 음식 먹기를 폐하고 울었습니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는 음식 먹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무엘하 12장 7절에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마음 속에 죄가 걸려서 원통히 회개하며 자복하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 먹는 것까지도 잊었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나이다” 이것은 주요기관에도 영향을 끼치며, 몸의 기관이 다 연약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은 먹어야 되는데 먹지 못하니, 모든 기관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11절에도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풀과 같이 약하고 시든다는 것이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병 때문에 그렇게도 되지만 마음이 괴로워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는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릴 때는 정신의 기쁨이 시듭니다. 그는 지나치게 압박을 당한 자와 같이 항상 탄식하고 신음해서 그 기력이 소모되고 지쳐버렸습니다. 그는 서글픈 사람처럼 고독에 휩싸였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그를 조롱합니다. 말하자면 친구들에게서도 소외당하였습니다.
“나는 슬픈 소리를 지르는 광야의 당아새 같으며 황폐한 건물에 기거하기를 좋아하는 부엉이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광야의 당아새나 부엉이는 외로운 짐승입니다. “내가 밤을 지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혼자만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는 별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가령 요사이 어떤 분이 사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실패를 해서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업자금이 없어지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시설도 다 없어졌고, 심지어는 살고 있던 집마저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값이 나가는 가구까지도 다 가져갔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6.25전쟁 때는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빼앗기고 불타 버리고, 손에 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피난길에 올랐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그런 고생은 처음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모든 재산이 다 없어졌다고 낙심하고 절망해서 자살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남이 같이 고생하면 그 고생이 덜합니다. 다른 사람이 같이 어려움을 당하면 상당히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이 나만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될 때 고통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8절 이하에 보십시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이 시인은 그의 적에게서 악평을 들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서 떠났을 때 그의 적들이 그를 에워쌌습니다.
“나의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나이다”
사람이 자기를 훼방하는 말을 들을 때 마음에 고민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줍니다. 원수들은 이렇게 화살 같은 혹독한 말을 그에게 씁니다. 한 번이 아니라 ‘종일’ 한다는 것은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그의 원수들은 매우 난폭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라고 했습니다. 너무 완강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 저희는 바울을 죽이려고 맹세한 유대인들처럼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저를 죽이기 전에는 물러서지도,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악착스러운 마음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합니다.
왜 이렇게 원수들이 끈질기게 덤빕니까?
본문 9-11절에 있습니다. 시인은 이 모든 곤고와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9-11절)
이 시인은 밥을 먹는 대신에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먼지와 재 가운데 누워서 음료에 눈물을 섞었다고 합니다. 슬픔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고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뜻합니다. 내가 마심으로 원기를 회복하려 할 때 오히려 눈물을 마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시인은 이것이 주의 분과 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곤고 자체나 그 원수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로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쫓기어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조롱을 하고 횡포를 부립니다. “오, 피흘린 자여, 도망가는구나.” 그때 다윗이 당한 치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같이 따라가던 부하가 분이 나서 다윗왕에게 “대왕이시여, 저놈들을 그냥 둘 수 있습니까? 그저 한칼에 없애버립시다. 어떻게 대왕에게 저렇게까지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그냥 두게. 내 아들이 지금 반역해서 도망치는 신세인데 저 사람이 그러는 거야 너무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조금도 마음 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내버려 두게. 하나님이 다 시키신 거야.”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야보고서 5장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든지 고통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형통할 때보다 고통을 통해서 위대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애가서 3장 27절-29절에 “사람이 젊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에 처한 성도의 자세라고 봅니다.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나를 드시는 것도 주께서 하십니다. 번영과 형통, 영광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조각 내려고 땅에 던지는 것과도 같이, 우리를 높이 드셨다가 던지실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예 없는 사람에겐 없어질 것도 없으니까 문제될 것이 없어지게 되고, 존귀와 영광을 누리던 사람이 땅에 떨어지게 될 때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영광과 기쁨과 비범한 번영 중에 나를 먼저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추억은 비애를 더하게 하며 나를 더욱 애처롭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드셨다가 그 분에게 던짐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올리고 내리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시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하나님에게 그 이름이 복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실 때는 기뻐하며 감사하기 쉬우나, 빼앗을 때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신앙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더 큰 유익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을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정말 천만 뜻밖에 귀한 자녀들과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난 후에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했습니다.
“욥이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나 하는 것을 알아보려면 주어서는 잘 모르고, 빼앗아 보아야 압니다. 높이 들어서는 잘 모르고, 땅에 던져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 형통할 때는 잘 모르고, 어려움을 겪어 보아야 압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몸과 같이, 오히려 죽고 말라버린 뼈와 같이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교회가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광야로 이끌려 나가고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이 되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들어가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새로워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이하의 말씀은 성도의 신념을 말씀했습니다.
이 시인이 이처럼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또 외로운 처지에서, 그리고 쓰라린 고통 속에서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멸시와 학대 속에서 낙심하고 절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까?
1. 영원히 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풀과 같고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12절에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기념 명칭’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지만, 주는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친구들은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우리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재 가운데 쓰여지고 세상에서 잊혀질 것이지만,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를 것입니다. 세상이 다 변하고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주의 말씀만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간의 끝까지, 아니 영원까지 주님은 알려질 것이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슬픔과 죽음까지도 영원한 마음의 불변하는 축복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받아들입니다.
13절에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했습니다.
2. 가난한 시온이 지금 곤고한 가운데 있지만 구원과 소생을 위한 때가 올 것입니다.
구원의 희망은 하나님의 선하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주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시온은 하나님의 동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때가 있으십니다. 언제까지 어려움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있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말로 다할 수 없이 고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저희의 우고를 아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저희를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찰 때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70년이 끝난 후 바벨론에서 구원됨으로 말미암아 시온이 기뻐할 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16절에 말씀한 대로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의미한 말씀입니다. 시온의 건설은 저들이 갈망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나 큰 기쁨이 됩니다. 황폐된 상태에서 교회의 특권과 축복은 회복과 재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도 원수들에 의해서 짓밟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신실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가지게 된 셋째 이유입니다.
여기 빈궁한 자라는 말은 고난 당한 성도, 혹은 억울함을 당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을 꼭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때는 기도하기 좋은 기회가 됩니다.
이사야 선지도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했는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사실 사람은 다 부족하기 때문에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전에 베네트 감독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는 아침에 일찍이 누구를 찾아가면 그 집에서 대답하기를 ‘주인이 지금 기도 중이십니다.’ 했는데, 요사이는 아침 일찍 누구를 찾아가면 그 집에서 말하기를 ‘주인이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의 성도들이 어려운 시대에는 많이 기도했지만, 모든 것이 편리하고 자유스러워지니까 모든 이가 다 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려운 형편에 놓인 분이 계십니까?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합시다. 이 시대는 한 마디로 바쁜 시대입니다.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모든 게 바빠집니다. (The danger of this age is hurrying.)”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일이 많을수록 기도의 힘으로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기도보다 앞선 일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빈궁한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소망을 가집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때나 건져 주실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빈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