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아트 스피치」: 청중에게서 배우는 스피커_에피소드로 풀어보기
신대원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과목 중에 하나는 설교학이었다. 많은 분들이 설교를 가장 못하는 분은 설교학 교수라고 했는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4학기 동안 5과목을 들었으니 남들이 보면 설교학을 전공하려는가 싶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어떤 원우는 ‘Th.m을 안가나요?’라고 묻기도 했었다. 처음보는 원우들이 말 할 정도면 열심히 하기도 했어나 보다.
청중을 알아야 한다.
김미경원장은 스피치에서 가장 중효한 것은 ‘청중’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성공하는 스피치는 청중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에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아닌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설교학 교수님은 ‘청중분석’이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 중에 차별화된 콘텐츠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유아부를 대상으로 한다면 이들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설교를 실습하면 남자와 여자 상관없이 모두가 ‘혀짧은 소리’를 낼 뿐 청중분석이 무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여자는 태생적으로 이득이 있어 보였다. 자매가 줄 수 있는 감성은 아이들과 라포가 쉽게 형성되는 듯 했다.
선교사역을 하면서 소중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직장이 캠퍼스이다보니 상황이 어려우면 어이들을 들쳐업고 캠퍼스로 출근을 했다. 캠퍼스는 의외로 안전한 곳이다. 지나가던 대학생들은 모두가 아이들을 보며 보육교사가 되어준다. 그사이에 전도도 하고 양육도 한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 이런 경험들이 그래도 육아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게 했다.
조정래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쉽게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평소의 언어대로 가르치면 오히려 폴발적인 어휘를 가질 것이라고 했다. 내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특별히 연령층이 바뀐다고 해서 내 목소리가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 연령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대화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런 면에서 청중분석은 외적요소 보다는 내적요소가 중요하다. 이를 이문규 교수는 ‘감성 코드를 맞추는 것’이라고 했고, 김미경은 청중의 내적인 소프트웨어를 파악하라고 했다.
청중은 보수적이다. 그래서?
스피치는 스피커, 콘텐츠, 청중으로 이뤼진다. 어느 기업의 광고 문구가 ‘고객이 OK 할 때까지 SK’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청중이 차지하는 비율은 단순히 3대 요소 중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청중은 크게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다. 방어적이고, 보수적이며, 쉽게 집단화되는 속성이다.
이 특징은 연령대를 초월한다. 김미경의 ‘아트 스피치’는 저자가 꾸준히 주장하는 것처럼 대단히 에피소드적이며 스토리텔링이 가득하다. 과연 이런 노력이 저자를 지금까지도 최고의 자리에서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이겠구나 하는 감탄을 연발하게 한다. 그러나 어떤 에피소드는 그렇게 재밌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의 이런 태도가 벌써 콘텐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보수화가 아니겠는가.
나의 아내는 보육교사이다. 보육교사라는 직업은 그 위대함에 비해서 사회적 보상이 적은 곳 중의 하나이다. 사실 연예인들이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보육은 너무나 이상적인 환경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다수의 부모들은 맏벌이에 지친 일상이 다반사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젊은 부부들은 교육에는 관심이 많지만 육아에는 힘쓰기를 귀찮아 하는 게 현실이다. 언젠가 한번 어린이집에서 운영되는 위원회 활동을 2년 이상하면서 부모들이 어린이집에 요구하는 이상으로 육아를 끈질기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을 하원시켜야 하는 시간에 어린이집 근천의 카페에서 부부들이 자기들만의 시간을 즐기다 늦는 장면은 육아의 피로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일 년의 특정시기마다 어린이집은 보육인 대회를 한다. 그때마다 하루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린 선생님들은 박수부대가 되어 대회장에 자리를 채우고 앉게 된다. 여러인사들이 얼굴을 내비치고 이런 저런 말을 한다. 세상에 어떤 천사가 방어적이고 보수적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그런 곳에는 청중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어떤 소통강사가 와도 자기 콘텐츠만 연설하다가 ‘여기가 충청도군요’라며 하루 일당만 챙기고 퇴근할 뿐이다.
“청중에게 줄 가장 좋은 힌트는 바로 청중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어리석은 스피커가 되지 않으려면 청중을 이해하고 청중으로부터 항상 배우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이 겸손함은 스피커거 청중이 되어 다른 스피커의 말에 호응하는 태도에서 길러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싱어게인 30호 가수의 아버지로 더욱 화제성을 낳고 있는 이재철목사님이 15년 전에 설교컨퍼런스에서 말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설교자는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해야 한다.”
그날 이후 나는 설교노트를 두고 예배를 드린 적이 없다. 심지어 나의 후배들이 설교할 때도 적을 말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이는 바로 나의 메시지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이다. 스피커는 배우는 사람이다. 이런 노력이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청중에게 공감능력을 얻게 할 것이다.
청중은 한 명의 인격체이다.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예전 같으면 청소년 캠프가 오늘부터 시작되어야겠으나 코로나가 또 하나의 일상을 막아섰다. 적게는 200여명, 많으면 400여명의 청소년들을 통솔하는 일은 온 몸의 진액을 쏟는 일이다. 그럼에도 캠프가 끝나고 피드백을 받을 때 모든 피로는 풀린다.
기도회 중에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한다. 그 아이들의 아픔을 어떻게 다 공감할 수 있을까. 보편적인 스토리로 한 인격을 치유한다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그때는 손을 잡아 줄 뿐이다. 그리고 가슴으로 안아주는 게 나의 한계다. 불이 꺼지면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다. 그리고 마음의 얘기들을 ‘그’ 청소년을 행해 말한다. 그 결과는 쪽지로 돌아온다. “선교사님, 오늘 제게 힘을 주어서 감사해요.”
김미경의 「아트 스피치」는 청중분석의 훌륭한 교과서이다. 저자는 분명 이런 콘텐츠를 이론적인 연구를 거듭했을 것임에도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청중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라는 말에서 그의 겸손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나 역시 무대는 다르지만 스피치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저자와 비교해서 얼마나 나의 청중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있는지 생각해 본다. 청중분석은 책에서만 끝나거나 기술로는 부족하다. 삶 속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