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하기만 하던 여름이 지나가고 막 새학기가 시작된 몇 해 전 9월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늦잠을 잔 탓에 부시시한 얼굴로 강의실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일찍 도착한 강의실에는 나보다도 더 부시시한 얼굴에 남루한 행색의 한 남자가 강단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막 뽑아낸 자판기 커피향을 음미하면서 두꺼운 서류 뭉치 같은 것을 연신 뒤적이고 있다.
'교수인가, 한 예술할 것 같은 표정이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남자를 다시 유심히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위 예술하는 사람의 자태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검은 뿔테안경의 한 쪽 렌즈는 선명하게 금이 가 있었고, 날씨에 어울리지도 않는 트렌치 코트는 그 뒷부분이 족히 한 뼘 정도는 찢어져 있었고, 가만히 보니 여기저기 뚜렷하게 핏자국같은 것이 흩뜨려져 있었다.
자신만의 미학 내지 취향이 독특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전날 밤 어디에선가 술김에 한 바탕 질펀하게 싸움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퍼뜩 판단이 서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예술인의 체취, 예술인의 혼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 체취에 흠뻑 빠져들어 있을 무렵 주위엔 어느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약간은 어눌한 듯한 말투에 과장된 제스츄어, 그리고 2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던 입심.이상이 내가 본 '대중예술의 이해'의 강사 박성봉의 첫인상이다. 그가 요즘 TV와 라디오를 종횡무진하며 대중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예술'의 이름으로.
1979년 한국 외국어 대학교 스웨덴어과를 졸업한 뒤 대중예술의 미학을 연구하기 위해 1983년 스웨덴으로 유학하여 웁살라대학 미학과에서 10여년간 대중예술의 미학을 전공했다. 1994년 귀국해서는 <대중예술의 이론들>(동연, 1994)과 <대중예술의 미학>(동연, 1995) 의 저서를 통해 대중예술에 대해 체계적인 미학적 접근을 시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와 한국외대, 성균관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대중예술의 이해 지평을 넓히기 위한 강의를 진행 중이다. 특히 그의 강의는 독특하고 다양한 체험들의 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예술을 그만의 언어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술은 만남, 존재감, 북극성,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미학의 역사는 예술을 한정시켜 온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확대시키는 역사이기도 하듯이 그는 예술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작업에 한창이다.
일상에서의 다른 존재들과의 가슴 벅찬 만남에서부터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까지도 예술이라 할 것이다. 어머니께서 꿇여주시는 김치찌게 맛이 예술이고, 그 맛을 다른 식구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예술이다. 다시말해 정통 미학이라는 범주 내에서 미적 개념을 확장시키기 위해 통속미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른바 '뽕의 미'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뽕의 미에 대해서 그의 설명을 빌자면 그것은 우리가 보통 저속하다고 부르는 것들, 가령 옥주현이나 설운도, 송대관하면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서 고상함이 결여되어 저속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있는데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저속하다고 표현할 뿐이라는것이다.
문화라는 것을 고상하고 저속한 것으로 이분하여 고상함만을 구하고 저속함은 피하려 해도 사실은 흔히들 저속하다고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몸소 체험할 기회가 더 많고 관심이 가기 마련이지만, 클래식이나 삐아졸라의 음악은 고급문화이고 림프비즈킷이나 린킨파크 같은 하드코어는 싸구려 문화이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예술이고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그냥 킬링 타임용이고, 모든 만화는 모조리 쓰레기이고 그나마 상뻬의 삽화 정도가 봐줄만하고, 통속소설은 활자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박성봉 교수가 수업시간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문화의 이중성에 대한 틀을 깨뜨리자는 것.
그의 강의 시간은 항상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못 한 슬라이드 사진 한 장, 영화 한 편 등 당시 생활에 찌들어 살아가던 나에겐 휴식시간만 같던 시간이었다. 그 휴식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말이다. 요즘은 라디오에서 TV에서 다시 그때의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 본다. 입가에는미소를 한아름 머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