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며 (松山,김 태 환)
이곳이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눈을 뜨니
막내 딸이 출근하고 없다.
나는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막내 딸이 담배냄새를 싫어해서 나는 될수있으면
딸이 집에 있을때는 담배 피우는것을 자재 해야 한다.
막내는 회사에 출근하기전에 내밥상을 차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소주도 한병 밥상에 올려놓고 나가는것을 잊지 않는다.
오늘은 담배도 한갑 같이 있는것을 보니 담배도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막내 딸과 나는
얼마전 운암동 에서 살다가 이곳 신가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로는 답답하기가 짝이 없다.
운암동 살적에도 물론 아는 사람 이라곤 한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려면 어느곳 어느쪽에서 타야하는지 그 정도는 알았는데...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를오고 난 후 부터는 갈곳이 없는 것이다.
운암동 에서는 가끔씩 버스타고 화순도가고 밤에 택시타고 고향에도 갔었다.
또 어느때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럴때마다 막내 딸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고
딸은 힘든 나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내나이 82살
나 는 가끔씩 정신을 놓는다.
사람들이 나 를 두고 치매가 왔다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오늘은 밥먹고 집 근처에서 바람이라도 쐬야지..
집을 나서니 상쾌하고 시원하긴 하지만 아침이라 약간은 쌀쌀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주위가 너무나 시끄럽다.
여기는 개발지역 이라서 날만새면 각종 기계들의 소음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한적한 인도를 따라서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어서 넘어질 염려는 없다고 생각하며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뒤를 돌아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순간 고향 사람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 오르고 있었다.보고싶다.나의 고향아,내 친구들아,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들딸도 보고싶고,봉덕산 아래 우리집은 그대로 있는지, 울 마누라는 잘 있는지...
아,보고싶다. 그래 고향으로 가자. 그러나 그순간 앞에 보이는것은 깜깜한 어둠 뿐이었다.
나는 어디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알수가 없다.
분명 딸내 집에서는 아침에 나왔는데 지금은 칠흙같은 어둠 뿐 이니 답답하다.
그때 내 눈에 띈 건너편의 불빛, 아, 찾았다. 저기까지만 가면된다. 얼른가자.
나는 그 불빛을 쫒아서 다시또 한참을 걸었다.
긴 언덕길을 걸어 가니 고랑이 나왔다. 이 몸으로 그 깊은 고랑을 어떻게 건넜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약간 경사진 언덕에 올라섰을때 멀리서 기차가 오고있었다. 그렇다 그곳은 기차가 다니는 철로였다.
보이는 불빛은 저기 있어서 철로를 건너가야 그곳까지 갈수가 있는데 기차는 가까이서 오고있었다.
에이,이까짓거 금방 건너면 되지, 생각하고 한발을 내디디려는 그 순간 기차가 내 몸을 스치고 갔다.
나는 공중에 붕 떠서 건너편 언덕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죽었다.
내 얼굴은 턱밑이 부서졌고 내 팔은 반쯤 떨어지고 내 다리는 찢겨지고 말았다.그렇지만 아프지 않다.
나는 그렇게 죽은것이다. 얼마후 경찰관들이 와서 나를싣고 병원으로 가더니 나를 냉동실에 넣고 말았다.
다시또 긴 어둠이 오고있었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도 나를 찾아주는 이 가 없다.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할수가 없다.
그러고 있는데 얼마후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아버지 라는 것을 확인한 아들은 나를 만지며 오열하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그래도 아들이 나를 찾아줬으니...
조금 후에는 딸들과 사위들까지 전부 들어와서 울고 나갔다.
그렇게 나의 장례식은 시작되었다.사람들은 죽으면 대부분 3일장 을 치르고 말지만
나는 5일장을 치러야 했다. 내가 죽은지 하루가 지나서야 자식들이 나를 찾았고 또 기차 사고여서
큰 아들과 막내 딸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느라고 하루가 갔으니 꼬박 이틀동안 나는 깜깜한 냉동실에 있었다.
자식 들 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데...살아서도 자식들한테 잘 한것은 없지만 이미 죽은 늙은애비로 인해서
자식 들이 피해를 보면은 안되는데...
평소에 이 애비가 말 했던것처럼 주저없이 나를 화장해다오.
그렇게 해서 산 이나 강 물에 나를 뿌려다오.
이것이 내가 너희 들 에게 바라는 이승에서 마지막 소원이다.
그 후 병원을 나서던 그날 나는 곧장 광주 영락공원 화장터로 갔다.
자식 들 이 고향에서 10년전에 죽은 마누라도 데리고 왔다. 내가 마누라랑 같이 화장시켜 달라고 했다.
이제 나는 죽었지만 그래도 육신은 남아있다.하지만 육신의 이별도 문제없이 잘 될것이다.
자식들과 이별을 해야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 와 마누라 가 불속으로 들어가려하니 자식들은 눈물 바다였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얼마후 한줌의 재가 되어서 나온 나를 아들이 않고 있었다.
가늘게 흐느끼는 아들의 가슴에서 나도 울었다.
나는 경치좋고 물맑은 대나무의 고장 전남 담양에서 지내고 있다.
처음 내가 올때는 몇 없더니 이제는 친구도 생기고 자식들도 생겼다.
그렇지만 많이 안왔으면 좋겠다.
얼마전 아들이 다녀가면서 소주한잔 따라주고 갔다.멀리 여행중 이라고 했는데 "짜식이 겨우 일년에 한번밖에 안올거면서 겨우 소주한잔만 주고가냐!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막내딸이 다녀가면서 언젠가 마누라하고 제주도 여행가서 말타고 놀던 사진을 들고와서
이뿌게 꽃단장을 해놓고 갔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다오...
이 글은 내가 생전에 썼던 글이다. 지금은 내 고향 마을앞에 세워져 있다.
이 글은 월간 [신문예] 지 2009년 7.8월호 "오늘의 수필가들 란에 실린 글로서 전국서점 "교보문고,영풍문고,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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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슨 말씀인지...? 아침부터 눈물 짜게 하시는 분은?...네봉마을 가보고싶네요~~편안하시길...
이 글은 작년에 돌아가신 제 아버지의 이야기 입니다. 아버지는 실제로 이렇게 돌아가셨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