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와 청주가 모두 손아귀에 들어오고 천자까지 한팔에 두르게 된 조조는 눈길을 서주로 돌렸다.
“서주의 유비한테 여포가 의탁하고 있다. 둘을 묶어두면 장차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누가 좋은 계책을 세워보도록 하시오.”
허저가 말했다.
“여포를 겁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제게 정병 5만을 내려주시면 유비를 죽이고 여포의 목을 받쳐들고 돌아오겠습니다.”
순욱이 허저의 말을 받았다.
“허 장군이 용맹을 앞세워서 말했지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허창에 새로 도읍을 정한 마당인데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제게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가 있으니 이를 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두마리의 호랑이가 싸워 잡아먹는 계략이라니, 그것이 대체 뭐요?”
“유비는 도겸의 유언에 따라 서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천자의 칙명을 받들어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공께서 폐하께 주청을 하여 정식으로 서주목에 임명토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길에 따로 밀서를 내려 여포를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비가 여포를 죽이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앉아서 유비의 한팔을 떼는데 성공하는 것이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만일 유비가 여포를 죽이지 못한다면 여포는 유비를 살려두겠습니까? 이번에는 여포가 유비를 죽여버릴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두마리의 호랑이가 싸운 뒤 서로 잡아먹는 계략, 즉 이호경식지계라 합니다.”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따랐다. 이 덕분에 현덕에게는 정동장군 의성정후(宜城亭候) 서주목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조조가 보낸 사신은 현덕을 따로 만나 말했다.
“이번에 공이 조정의 은혜를 입은 것은 조 장군이 황제 폐하께 공을 적극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조 장군의 큰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현덕이 사신에게 치하의 말을 전했다.
“이것은 조 장군이 공에게 따로 전하는 기밀 문서입니다. 혼자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사신이 관사로 돌아간 뒤에 밀서를 열어본 현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현덕은 관우와 장비를 불러 편지를 읽히고 의견을 나누었다. 장비가 말했다.
“잘 되었소. 여포는 본래 의리라는 게 없는 놈이니 이 기회에 죽여버립시다.”
현덕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다. 궁지에 몰려 우리에게 온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의리에 합당하겠느냐?”
“큰 형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요.”
장비가 투덜댔지만 현덕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날 현덕이 서주목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러 여포가 들렀다. 여포가 축하의 인사를 전하는데 장비가 칼을 빼들고 여포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다.
“네 이놈! 무슨 짓이냐!”
현덕이 여포 앞을 가로막고 호통을 쳤다. 여포도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에게 소리쳤다.
“익덕,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냐?”
“조조가 널 죽이라고 했다! 너 같은 의리를 모르는 놈은 죽어도 싸다!”
장비는 조조가 보낸 밀서를 들먹였다. 현덕이 크게 놀라 좌우를 물리친 뒤 여포를 후당으로 데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여포는 현덕이 의리를 지켜준 것에 깊은 감사를 올렸다.
“조조는 유 공과 이 몸이 힘을 합하는 것을 꺼리고 있소. 우리가 서로 맞서기를 바라서 이런 계략을 꾸민 것이 틀림없소.”
“장군께서는 마음 쓸 것이 없습니다. 이 유비, 결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포는 현덕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여포가 돌아간 뒤에야 관우가 장비를 데리고 다시 현덕을 찾아왔다. 관우가 물었다.
“오늘 여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형님은 왜 여포를 놓아주셨습니까?”
“첫째는 어제 말한 바와 같다. 궁지에 몰려 내게 의탁한 사람을 오히려 잡아죽이는 불의한 일을 할 수는 없다. 두번째는 이것이 조조의 계략이기 때문이다. 여포와 내가 반목한다면 그 이득은 조조에게만 생긴다. 여포는 소패를 맡아 서주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린 법이거늘 뭣 때문에 조조의 장단에 내가 춤을 추겠느냐?”
관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장비는 여전히 툴툴거렸다.
“하지만 여포를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거요. 내 기회가 되는대로 꼭 죽여버리겠소.”
“대장부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법이야.”
현덕은 장비를 나무랬다.
조조의 사자는 장비의 소동이 있은 다음날 돌아갔다. 사자가 돌아가 현덕이 여포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대로 고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 다시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호경식지계는 실패했소. 이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염려마십시오. 이번에는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를 써보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호랑이를 몰아 이리를 삼키게 한다니, 그것은 또 어떤 계책이오?”
“유비가 원술을 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는 거짓 정보를 원술에게 흘리는 것입니다. 원술의 성질로 볼 때 절대 가만있지 못할 것입니다.”
“유비가 쉽게 계략에 걸리겠소?”
“유비에게는 천자의 명을 내려보내면 됩니다. 원술을 치라고 황명이 내려가면 유비는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비와 원술이 싸우게 되면 서주가 비어있게 됩니다. 여포는 절대로 그런 호기를 놓칠 위인이 아닙니다.”
순욱의 입가에 웃음이 살짝 떠올랐다. 조조도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연주가 비었을 때 여포는 가만 있지 못했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구려.”
조조는 즉시 순욱의 구호탄랑지계를 실행에 옮겼다. 현덕은 천자의 사신을 맞기 위해 성 밖에까지 마중을 나갔다. 내려온 명을 받아보니 원술을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현덕은 명을 받들겠다고 사신에게 고했다.
“이것도 전과 마찬가지로 조조의 계략입니다.”
미축이 놀라 현덕을 만류하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폐하의 명을 어길 수는 없소.”
현덕은 서주를 다스린 이래 미축을 크게 존중하고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 미축이 반대를 함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하겠다고 말하자 주위가 모두 놀랐다.
“그러시다면 저도 함께 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은 온화하고 돈후한 사람이지만 군을 통솔하는 데는 뛰어나지 못하오. 이번에는 성에 남아 승전보를 기다려 주시오.”
손건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성을 지킬 사람을 따로 명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장, 익덕 누가 성에 남겠느냐?”
관우가 말했다.
“제가 남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남으면 성이 안전하게 지켜지긴 하겠다만, 내가 군정을 논의할 상대가 없을 것이고...”
“그럼 제가 남지요.”
장비가 약간은 불만스런 어조로 말했다. 한동안 전쟁에 나가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했던 탓이다.
“네가 지킨다면 안심할 수가 없어. 넌 술을 너무 좋아하고, 술을 마신 뒤엔 걸핏하면 부하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느냐? 게다가 넌 주위에서 간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아서 경솔하게 일처리를 할 때가 많아. 너한테 어떻게 성을 맡기겠느냐?”
장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우는 오늘부터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군사들을 때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해주는 말에 성심껏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간옹이 옆에 있다가 장비를 놀렸다.
“목이 컬컬하면 한잔 생각이 간절해질 껄?”
“내 비록 술을 즐기기는 하나 신의를 잃은 적이 없는데 헌화(憲和=간옹의 자) 공은 어째서 나를 경솔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요?”
“네 결심이 그렇다면 좋다. 진원룡(=진등)도 남겨둘테니 그의 말을 잘 듣도록 해야 한다.”
현덕은 진등에게 장비를 잘 보좌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술이 있는 수춘을 향해 떠났다. 수춘은 하비의 남쪽에 있다.
원술도 현덕의 공격을 알고 있었다. 이미 조조가 보낸 밀사가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돗자리짜고 짚신 팔던 놈이 서주를 차지하고 제후의 반열에 오르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그렇잖아도 한번 손을 봐 줄 참이었는데, 제 발로 온다 이거지!”
그는 상장(上將) 기령(紀靈)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서주를 치게 했다. 현덕보다 원술이 먼저 군을 보냈기 때문에 양 군은 서주 우이현에서 마주 쳤다. 현덕의 군사가 적은 탓에 산을 등지고 계곡에 진을 쳤다.
기령은 무게가 오십근이나 나가는 삼첨도(三尖刀)를 무기로 썼다. 기령은 삼첨도를 높이 쳐들고 말했다.
“이놈 유비! 무엇때문에 감히 우리 경계를 침범하려 드는 거냐!”
현덕도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려는 것이다. 나와 맞서는 것은 조정에 대항하는 것이다. 죽고 싶으면 덤벼라!”
기령이 현덕의 말에 노해서 말을 달려 나왔다. 현덕 측에서는 관우가 청룡언월도로 기령을 상대했다. 기령은 삼십 합 이상을 잘 싸웠으나 점차 힘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이놈! 잠시 목을 축이고 계속 싸우자!”
기령의 말에 관우도 말을 돌렸다. 그러나 목을 축이러 간 기령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기령은 자신의 부장 순정(荀正)을 보내 관우를 상대하게 했다. 관우는 우뚝 서서 순정에게 말했다.
“너는 내 상대가 못 된다. 약속대로 기령보고 나오라고 전해라!”
“기 장군이 너따위 무명소졸을 상대할 줄 알았느냐?”
순정의 말에 관우의 노기가 치솟아올랐다. 관우가 말을 달려가자 순정은 제 딴에는 맞상대를 하겠다고 창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창의 중둥이를 부숴버리고 그대로 순정의 목도 날려버렸다. 현덕이 때를 맞춰 군사를 진격시키니 기령은 크게 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기령은 회음강 입구로 물러나 목책을 세우고 움직이지 않았다. 양 군의 대치는 장기전으로 접어들어 언제 끝날지 모를 형편이 되고 말았다.
서주를 지키던 장비는 이제나 저제나 승전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비는 성의 행정 업무는 모두 진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군중(軍中)의 업무만 맡아서 했다. 며칠간 일이 잘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장비가 연회를 열었다.
“큰 형님이 출정하시면서 내가 술을 많이 마신다고 걱정을 했으나 그것은 내가 술을 마시는 것보다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오. 오늘은 내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니 한번 마음껏 취해 봅시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또 성을 잘 지키도록 합시다.”
장비는 술을 마시고나서 관원들에게 한 명씩 술을 권했다. 어느덧 부장 조표 순서가 되었다. 조표는 도겸 때부터 서주에 있던 구장(舊將)이었다.
“조 부장도 어서 한 잔 드시오.”
“죄송합니다. 저는 천성이 술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표가 술 마시기를 거절했다. 장비의 고리 눈이 샐쭉해졌다.
“뭐야! 사나이가 되어가지고 술을 못한다고? 어서 받아!”
장비의 서슬에 눌려 조표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받아 마셨다. 장비는 모든 관원에게 술을 먹인 다음 자신도 큰 대접으로 열 잔을 마셨다. 장비는 취기가 거하게 오르자 다시 한번 관원들에게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조표는 머뭇거리며 거절을 했다.
“도저히 더는 못 마십니다.”
“이것 봐라! 아까는 잘도 받아먹더니 지금은 왜 못 먹어!”
그러나 조표는 끝내 술을 받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술을 못한다고는 해도 억지로 마실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조표 입장에서 장비가 대체 곱게 보이지를 않았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상관으로 앉아, 서주의 토박이들을 지휘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장비는 현덕이 걱정한 것처럼 상관으로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조표도 자기 나름대로는 한다하는 무장이었다. 장비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장비는 그런 조표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저 자식을 끌어내려! 곤장 백 대다!”
진등이 보다 못해 장비의 소매를 붙잡고 그를 말렸다.
“주공이 출정하기 전에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행정 일에 간섭하지 않는데, 너는 왜 군정에 끼어드는 거냐! 조용히 해라!”
진등의 말도 통하지 않자 조표도 걱정이 되어 용서를 빌었다.
“익덕 공, 부디 제 사위의 체면을 봐서 용서해주기 바라오.”
“뭐야? 네 놈 사위가 누군데?”
“여포입니다.”
여포는 본처 엄씨가 있었고, 첩으로는 초선이 있었다. 서주에 와서 조표의 딸을 후처로 또 맞이했던 것이다. 조표는 대단한 사위를 둔 덕을 여러 군데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여포의 이름을 대면 적당히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비한테는 여포가 철천지원수였다. 장비가 더 화가 나 버렸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냥 으름장이었다. 하지만 감히 여포의 위세를 믿고 네 놈이 이렇게 나온 것이었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 놈을 형틀에 당장 묶어라!”
장비는 조표를 직접 때렸다. 조표는 곤장을 오십 여대나 맞고서야 주위 관원들이 힘써 말려서 풀려날 수 있었다.
분노가 매보다 더 아팠다. 조표는 여포에게 서찰을 보냈다. 현덕이 성을 비웠고, 장비는 술에 취해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리고 서주를 공격한다면 성문을 열어 내응하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했다. 여포는 진궁을 깨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상의했다.
“기회입니다. 소패는 오래 주둔할 땅이 못 됩니다. 이번 기회에 서주를 차지합시다.”
여포는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갑주를 갖추고 말에 오르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여포 자신은 정예 500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고 진궁은 중군에서 대군을 인솔하게 했다. 후군은 고순이 맡았다.
4경 무렵에 이미 여포는 서주 성 아래에 도달해 있었다. 조표는 즉시 성문을 열고 여포 군을 성내로 끌어들였다. 장비의 부하들이 화급히 장비를 깨웠다. 아직 술이 깨지 않아 멍하니 앉아있는 장비에게 두 번, 세 번 여포가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렸다. 장비는 그때서야 갑주를 챙기고 장팔사모를 손에 들었다. 여포를 죽이겠다고 노성을 터뜨리는 것을 부하들이 간신히 말려 성문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쪽에 여포가 서성이고 있었다.
“이노옴! 여포!”
장비는 한순간에 술기운이 날아가버렸다. 장팔사모를 사방으로 돌리며 여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여포가 가볍게 방천화극을 들어 장팔사모를 쳐내자 장비도 지금은 여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장비의 부하 십여 명이 여포에게 달려들지 않았다면 이날 장비는 여포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장비는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여포도 적극적으로 장비를 쫓지 않았다. 여포로서는 아무래도 호인인 현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현덕의 동생인 장비를 모질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서주성이 손 안에 들어왔으니 굳이 야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정을 베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바로 난데없이 장비에게 두들겨 맞았던 조표였다. 조표는 장비가 불과 십여 기의 부하들만 데리고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100여 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비를 쫓아갔다.
장비는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은 현덕이 걱정한대로 술이 취한 탓에 사고를 치고 말았으니 어떻게 현덕의 얼굴을 마주할 것인지 엄두가 서지 않았다. 또한 자신에 대한 울분이 치솟아 심정이 착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 중에 문득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데 돌아보니 조표가 창을 휘두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 순간 여포가 어떻게 하필 오늘 쳐들어왔는지, 어떻게 성을 이리도 쉽게 함락시킨 것인지가 모두 이해됐다.
“조표! 네 놈이 저승길을 알아서 찾아왔구나!”
장비가 수염을 빳빳이 세우고 호랑이같은 포효를 터뜨렸다. 조표가 순간적으로 움찔해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장비가 폭풍처럼 달려들었다. 조표는 죽을 힘을 다해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술취한 녀석 하나를 못 당하랴는 생각이었다. 장비의 장팔사모가 조표의 창을 휘감아들어왔다. 장팔사모가 원을 그리며 조표의 창을 감아돌리자 조표는 창을 더 손에 쥐고 있지 못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찢어지며 창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조표는 기겁을 하고 말머리를 돌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너무 놀라 성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한 채 강변을 따라 달려나갔다. 장비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조표의 창을 왼손으로 받아채고는 조표를 쫓아가며 외쳤다.
“이놈! 네 무기를 받아가랏!”
이 말과 함께 조표의 창을 힘껏 내던지자 창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조표의 등에 꽂혀버렸다. 창은 그대로 심장을 꿰뚫고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조표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강물 속으로 떨어져버렸다.
장비는 부하들과 함께 현덕이 있는 우이로 갔다. 현덕은 장비의 보고를 받고 한탄했다.
“갑자기 네가 와서 혹시라도 기쁜 소식이 있는가 했더니 슬픈 소식이었구나.”
관우가 물었다.
“형님의 가족들은 무사하시냐?”
현덕은 아직 미혼이었다. 하지만 고향의 친척들을 모시고 있었다.
“성 안에 모두 남아계십니다.”
장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너한테 술을 삼가라고 한 형님의 주의를 대체 어떻게 들은 거냐! 성도 빼앗기고 형님의 가족들도 모두 잡혔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장비의 검은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장비는 돌연 한 순간에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어 목을 그으려 들었다. 죽음으로 속죄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현덕이 급히 손을 들어 장비의 손을 잡았다. 손목을 비틀어 칼을 빼앗더니 땅바닥에 세게 던져버렸다.
“형제는 손발과 같으며,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했다. 의복은 낡으면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손발은 끊어지면 다시는 붙일 수 없다. 도원에서 우리가 결의할 때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한날 한시에 죽자고 했다. 성을 잃었다고 형제의 의를 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서주성이 본래 우리 것도 아니었잖은가? 비록 내 가솔들이 여포의 손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내가 여포에게 박하게 대한 적이 없으니 해를 입을 리는 없다. 방도를 찾아 돌려받으면 그만이야. 익덕, 네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죽을 것 까지는 없다.”
현덕의 말에 장비는 통곡을 했다. 지켜보던 현덕과 관우도 눈물을 흘렸다.
원술은 서주를 여포가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포에게 사신을 보냈다. 현덕의 배후를 공격한다면 양곡 5만 석, 말 오백 필, 금은 1만냥, 비단 천 필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여포는 즉시 고순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현덕을 공격하게 했다. 현덕은 앞뒤로 군사를 맞아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광릉(廣陵)으로 피해갔다. 광릉에서도 원술의 공격을 받아 제일 구석진 곳에 있는 해서(海西)까지 도망을 쳤다. 앞날이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서주에 남아있던 미축이 서주성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미축은 가산을 털어 2천 명의 장정과 금은 보화를 모두 현덕에게 바쳐 군자금에 보태도록 했다. 더구나 이때 미축은 영군태수로 발령을 받았고, 미축의 동생 미방(糜芳)은 팽성의 상(相)으로 발령인 났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버리고 현덕을 찾아온 것이었다.
“공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현덕이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미축이 현덕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사실 주공에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소.”
“이 몸에게는 과년한 여동생이 있습니다. 평소 주공을 사모하고 있었으나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미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덕이 얼굴을 붉혔다.
“지금 내 처지로 보아 혼사를 논할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고 보오.”
관우와 장비가 옆에 있다가 말했다.
“형님의 나이도 벌써 서른 여섯입니다. 이미 혼사가 많이 늦었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사양하십니까?”
두 아우도 적극적으로 권하는 바람에 현덕은 미축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혼례를 올린 날 큰 연회가 벌어졌다.
“자중 공(미축), 공이 천신을 만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한번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소?”
미축이 웃으며 말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저는 본래 부자집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 것이 없이 지냈습니다. 자연 사람이 오만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지요. 저는 당시에 낙양을 오가며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길에서 귀부인을 만났습니다. 한눈에도 기품이 남다른데다가 그 얼굴이 세상사람같지 않게 어여쁜 분이었지요.”
“미중 공이 총각 시절이었겠지요?”
간옹이 한마디 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렇지요. 그 귀부인이 수레를 태워달라고 해서 저는 그 부인을 태워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예의를 잃을 수 없어서 귀부인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지요. 그 귀부인은 한참을 가다가 돌연히 한 곳에서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남방의 화덕성군(火德星君)으로 오늘 그대의 집을 불태우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이처럼 예의바른 인물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대에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니 집에 도착하면 재물을 빨리 끌어내도록 하라. 나는 오늘 밤에 그대의 집을 방문하겠노라’라고 말이죠. 저는 집에 도착해서 재물들을 빨리 끌어냈지요. 한밤중이 되자 부엌에서 별안간에 불이 치솟아 오르더니 온 집을 다 태워버렸답니다. 그후 저는 사람이 좀 겸손해졌지요.”
사람들이 미축의 마지막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미축이 본래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거지를 잃고 변방으로 내몰린 상황이었지만 현덕은 좌절하지도 낙심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다. 순욱의 무서운 계략은 성공했으나 현덕이라는 교룡을 쓰러뜨리진 못했다.
현덕이 광릉으로 피하자 여포는 원술에게 약속한 댓가를 지불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술은 뜻밖의 말을 했다. 고순이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 싸움도 없었고, 현덕도 아직 무사하니 물자를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원술은 현덕을 잡아오면 약속한 물자를 주겠다고 했다. 여포는 크게 성을 냈다.
“원술, 이 자식은 전에도 나를 무시하더니 끝까지 이런 식이군. 내가 이 놈부터 잡아죽여야 겠다!”
진궁이 곁에 있다가 여포를 만류했다.
“원술은 남양에서 수춘까지 장악하고 있어서 세력이 대단합니다. 군사도 많고 군량도 풍부하니 쉽게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는 이제 막 서주를 장악한 상태입니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을 움츠리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소?”
“먼저 유비를 청하십시오.”
“뭐요?”
“유비를 청해서 소패에 주둔하게 하여 화해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유비를 선봉으로 삼아 원술을 치게 합니다. 원술을 치고 난 뒤라면 천하를 노려볼 수 있습니다.”
진궁의 말에 여포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여포는 즉시 해서에 있는 현덕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실 이것은 진궁이 서주로 왔을 때부터 노리고 있던 속셈이었다. 진궁이 보기에는 현덕이라는 사람은 결단력이 부족하고 인의를 내세움이 심해 난세를 극복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강한 힘으로 천하를 억누를 수 있되, 조조처럼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아닌 영웅이 필요했다. 여포라면 그가 이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주를 바탕으로 유비와 같은 덕이 있는 사람을 포용하고 남방의 풍부한 물산을 장악해낸다면 여포의 무력을 바탕으로 북방의 조조, 원소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덕은 여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관우와 장비는 반대를 했으나 현덕은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
“걱정할 것 없다.”
과연 현덕의 말처럼 현덕 군이 서주에 다가가자 여포는 먼저 현덕의 가솔들을 풀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여포가 잘 보호해주어서 아무 걱정없이 지냈다는 말을 했다. 현덕은 관우와 장비가 여포를 만나면 충돌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을 먼저 소패로 보내고 자신만 여포를 만났다.
“내가 서주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오. 익덕이 술주정이 심해 사람들을 해칠까 두려워 그랬던 것이오. 다시 공이 서주를 맡아 다스리시오.”
“비는 이미 서주를 장군께 양보하고자 했었습니다.”
현덕의 말에 여포는 크게 기뻐했다. 여포는 건성으로 다시 서주를 양보하는 척 했으나 현덕은 다시 사양하고 소패로 돌아갔다. 여포가 소패로 양곡과 비단을 보내주어 두 진영의 불화는 그렇게 가라앉고 말았다.
첫댓글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