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45년만의 심한 강추위였다. 영국의 각 지방에서는 폭설로 고립되는 촌락이 생겨나고 템즈 강도 얼어붙었다.
1월에는 글래스고 발 런던 행 열차가 꼬박 24시간 연착돼서 유스톤 역에 들어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양상은 일변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창공에는 방공기구가 유유히 떠 있고, 런던 거리에는 휴가를 보내는 군인들이 소매없는 드레스를 입은 젊은 아가씨들과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쟁중인 수도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전쟁의 그림자는 깔려 있었다.
헨리 페이퍼는 자전거를 타고 워털루 역에서 하이게이트로 가면서 거리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중요한 공공건물의 주위에 쌓인 흙주머니,변두리 유원지에 만들어 놓은 대피소,공습시 대피요령을 알리는 포스터등.
다른 철도 사무원들과는 달리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주의의 전경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많은 아이들이 공원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전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인구 정책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솔린은 배급제가 되었는데도 거리에 달리는 차량은 그다지 줄지 않았고,자동차 제조업자들의 신형차 출고를 알리는 광고도 본 적이 있었다.
불과 2,3개월 전에는 주간 근무의 일자리도 얻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는데,이제 주야의 교대 시에 공장 문이 출퇴근자로 붐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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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는 이와같은 일들을 주시해서 지켜보았다. 무엇보다 그가 신중하게 살핀 것은 영국의 철도를 이용하는 병력이동 상황이었다.
이에 관한 서류는 모두 그의 직장을 거쳐가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어떤 서류 뭉치에 도장을 찍었는데,그 내용으로 보아 병력 10만에 이르는 원정부대가 새로 편성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은 핀란드로 향하는 군단일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아이러니한 면이 있었다.
라디오의 쇼프로는 전시특례법을 풍자하는 것이 많았고,방공호 속에 대피한 사람들은 합창을 즐기는가 하면 여성들은 멋있게 만든 가방 속에 방독 마스크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 옛날의 보어 전쟁과 비교하여 빈정대기도 했다. 공습경보는 하나같이 헛다리를 짚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페이퍼는 그들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으나 어차피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자전거가 아치웨이로 들어가자 그는 허리를 앞으로 굽혀 언덕길을 올라갔다. 긴 다리가 증기기관차의 피스톤처럼 힘차게 오르내렸다.
그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실제 나이는 39세지만,그는 이것도 그에 관한 다른 모든 점과 마찬가지로 속이고 있었다.
하이게이트의 언덕을 올라가면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하숙집은 런던의 고지대에 있었는데,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그가 이곳에 하숙을 정한 이유였다. 건물은 빅토리아조 풍의 벽돌집이었다. 모든 집들은 높고 좁다랗고 어둑어둑해 마치 입주자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 3층으로 되어있고 어느 집이나 지하실이 있어 사용인 전용의 출입구가 있었다. 사용인도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중류 계급의 영국인들은 이것을 만들고 싶어한다. 페이퍼는 영국인의 이런 점들을 냉소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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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6호 주택은 예전에는 가든 홍차, 커피 상점의 주인이었던 헤롤드 가든 씨의 것이었지만 그는 대공황때 도산하고 말았다.
가든 씨는 채무 불이행으로 도산 후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가 살던 집외에는 미망인 가든 부인에게 남겨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그녀는 하숙인을 두어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하숙집 여주인이 된 것을 창피해 했지만 사실은 이런 생활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페이퍼는 이 집의 제일 위층,창이 달린 방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곳에서 살고,주말은 에리스에 있는 어머니 집에서 보낸다고 가든 부인에게 말해 두었다. 그러나 사실은 블랙하이스에도 그의 하숙집이 있어서 그 집 여주인은 그를 베이커라고 불렀는데,그가 세일즈맨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업상 돌아다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페이퍼는 집에 돌아와 홀의 모자 걸이에 모자를 걸고,손을 씻은 다음 식당으로 들어갔다.
같이 세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요크셔 출신이며 군인 지망생인 여드름 투성이의 소년과,숱이 적은 갈색 머리의 과자가게 점원,그리고 페이퍼가 변태성욕자임에 틀림없다고 보고 있는 퇴역한 해군장교,이렇게 세 사람이다. 페이퍼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가벼운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과자가게 점원이 무슨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대장이 '자네 꽤 빠른데!'하니까 조종사는 돌아서면서 이렇게 말했대요.'네,저는 그 선전 삐라를 풀지 않고 다발째 떨어뜨렸으니까괜찮지요?' 깜짝 놀란 중대장은 '저런!지상에 다친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는데...'"
퇴역한 해군 장교는 크게 웃어대고 페이퍼도 히죽 웃었다. 그때 가든 부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돌아오셨군요,페이퍼씨. 우리 먼저 시작했어요. 괜찮지요?"
3
페이퍼는 검은 빵에 마가린을 얇게 바르면서 가든 부인을 바라보았다.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한 굵은 소시지가 갑자기 생각났다.
페이퍼는 서들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챔벌린 수상을 몰아내고 대신 처칠을 뽑을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가든 부인도 줄곧 자기의 의견을 말하며 페이퍼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얼굴의, 살이 무척 찐 여자였다. 나이는 페이퍼와 비슷한 것 같지만 어딘가 음탕해 보였고 언제나 30세 전후의 여자들 복장을 하고 있었다. 페이퍼는 그녀가 재혼 상대를 찾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는 토론에는 끼지 않았다. 그녀는 라디오를 켰다.
".....BBC의 국내방송 < 또 그 사나이! >를 보내드립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페이퍼도 들은 적이 있는 프로로 독일 스파이 활동을 드라마한 연속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다.
< 또 그 사나이! >가 끝나자 가든 부인은 그 자리에 혼자 남게 되었다.퇴역한 해군장교와 과자가게 점원은 술집에 한 잔 마시러 간다고 나갔으며 신앙심이 깊은 요크셔 태생의 소년은 개신교 기도회에 갔다. 가든 부인은 진을 따른 작은 잔을 옆에 놓고 등화관제용 검은 커튼을 바라보면서페이퍼 생각을 했다. 그이가 저렇게 방에만 박혀 있지만 않으면 좋을텐데... 나도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고,페이퍼 씨라면 꼭 맞는 상대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이런 공상은 죄의식을 느끼게 했다. 그 죄의식을 달래기 위해서 그녀는 죽은 남편 가든 씨를 머리에 떠올렸다.
가든 씨는 몸집이 작고 튼튼한 사람으로 사업에서는 운,불운에 좌우되기 쉬운 타입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말수가 적었지만 침대에서만은 탐욕스럽게 아내를 사랑하는 정열가였다.
부인은 그를 무척 사랑했다. 이렇게 전쟁이 계속된다면 그녀와 같은 미망인이 많이 늘게 될 것이다. 다시 그녀는 잔에 진을 채웠다.
페이퍼 씨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 가까이 하기가 힘들다.
4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 냄새를 입에서 풍기는 일도 없다. 밤마다 자기 방에서 라디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신문을 읽고 장시간 산책을 한다. 직업은 대단치 않지만 매우 영리한 사람인 것 같다. 좀 적극적으로 알아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직업을 가질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런 야심도 있는 것 같지 않다.
생김새도 균형이 잡혔고 좋은 체격을 갖고 있다. 키가 크고 어깨와 목이 묵직한 인상을 주지만, 군살을 조금도 없고 다리는 길다. 다부진 인상을 주는 얼굴,이마는 시원스레 넓고, 턱은 길고 눈은 푸른 빛이고,영화배우 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좋아할 용모다. 그러나 작은 입과 얄팍한 입술이 잔인스럽게 보여 부인은 이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페이퍼는 여자들이 처음 보았을 때 다시 돌아보게 되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낡고 닳아빠진 바지는 한 번도 다림질을 한 적이 없다.해달라면야 기꺼이 다려 주었겠지만 그는 그런 부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또 언제나 초라한 레인 코트를 입고 부두 노동자들이 쓰는 챙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지 않고 머리는 2주일에 한 번씩 짧게 깎는다. 그는 일부러 자신을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탐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호모일까.... 가든 부인의 머리에 얼핏 그런 의문이 스쳤지만 곧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에게는 옷차림에 신경을 써주고, 야심을 갖게 해 줄 부인도 필요하다. 한편 나에게는 항상 곁에 있어주고.... 그래, 애정을 쏟아 줄 남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페이퍼 씨는 전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그녀는 욕구불만 때문에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자로서의 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잔에 진을 따르면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도 제법 예쁘고 곱슬곱슬한 금발머리도 괜찮다.그리고 육체도 풍만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킬킬거리며 웃었다.좀 취해 오는 모양이다.
5
데이비드는 가운을 입었다.
"신경이 쓰여서 안되겠어."
"5분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잖아요."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자 여기 와서 누워요. 당신의 몸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녀의 지나친 솔직성에 그는 난처한 듯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가슴을 드러내면서 침대에서 뛰어나왔다.
"당신은 나를 싸구려 여자처럼 느끼게 했어요."
그녀는 침대의 한쪽 끝에 앉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데이비드는 두 팔로 그녀를 껴안고 말했다.
"미안해. 나도 당신이 처음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라.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잖아?"
루시는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이처럼 풀이 죽어 있는 까닭은 그가 앞으로 8일 후에는 나뭇잎 같은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데이비드는 아주 다정했다.
준비는 거의 끝났다. 그녀는 자기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그녀의 옷은 어깨가 벌어지고 에폴레트가 붙어 있어서 마치 군복같이 보인다.
그러나 블라우스는 아주 여성적인 것만 골라 균형을 마추었다. 테가 없는 모자 밑에는 웨이브 있는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있다. 시국이 이러니까 화려한 드레스는 적당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이 실용적이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유행의 효과를 살리고 있다고 느꼈다. 데이비드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자 키스를 하며 말했다.
"멋있는데요. 미세스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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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다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피로연 식장으로 들어갔다.
피로연이 끝나면 데이비드가 운전하는 차로 런던에 가서 하룻밤 허니문을 지내고 데이비드는 비긴 힐의 부대로, 루시는 다시 양친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앞으로 부모와 함께 살다가 데이비드가 휴가로 돌아올 때에는 별장을 쓰기로 되어 있었다.
다시 악수와 키스 공세가 30분이나 계속된 다음 둘은 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나갔다. 데이비드 사촌 몇 사람이 이미 차를 신랑 신부의 차처럼 장식해 놓았다. 차 앞뒤에는 빈 깡통과 낡은 구두가 매달려 있었고 문의 발판에는 색종이 조각이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차체에는 여기저기 빨간 루즈로 '방금 결혼 했음.' 이라고 씌여 있었다.
신혼부부는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거리를 메운 사람들을 뒤로 하고 떠났다. 약 1마일쯤 가서 차를 세우고 차체를 깨끗이 닦았다. 다시 떠날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차의 헤드라이트에는 등화관제 때문에 기리개가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속력을 내어 차를 몰고 갔다. 루시는 아주 행복한 기분이 었다.
"계기판이 붙은 도구함 속에 샴페인이 있어."
루시가 그 도구함을 열어 보니 샴페인과 화장지에 정성스럽게 싽 잔이
두 개 나왔다. 샴페인 병은 아주 찼다. 병마개가 펑 하고 터지면서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루시는 거품이 이는 샴페인을 잔에 따르고 데이비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녁식사 시간에 대지 못할 것 같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루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데이비드에게 잔을 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지쳐 있어서 마실 수가 없었다. 졸음이 왔다. 차는 너무도 빨리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샴페인은 데이비드가 거의 다 마셨다. 그는 '세인트 루이스 블루스'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했다. 등화관제 하의 거리를 달리는 것은 그다지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깜박깜박 비치는 농가의 불빛이나 가로등이 전혀 없으니 적적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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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이정표도 보이질 않았다.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독일의 낙하산 부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런던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긴 언덕길로 들어섰다. 작은 차는 끄덕도 않고 달려 올라갔다. 루시는 졸음이 오는 눈을 뜨고 전방의 어둠 속을 바라 보았다. 고개를 넘어서 내리막 길이 되자 경사는 급하고 커브도 많아졌다. 루시는 앞에서 올라오는 트럭 같은 소리를 들었다. 커브를 돌 때 타이어에서는 끼익 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빨리 달리는 것 같아요."
왼쪽으로 도는 커브에서 차의 뒤쪽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데이비드는 기어를 저속으로 바꾸었다. 다시 미끄러질 때에는 급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다. 가리개를 덮은 헤드라이트의 빛이 도로 양쪽에 있는 나무들을 희미하게 비췄다. 또 커브길에서 바퀴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후 커브가 있다라 계속되고 차는 1백 80도로 회전해서 후진할 정도로 심하게 미끄러지는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루시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데이비드!"
그때 구름 사이로 내민 달빛이 주위를 비췄다. 그 순간 그들은 눈 앞에 다가온 대형트럭을 보았다. 그 차는 숨을 헐떡이면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 왔기 때문에 달빛을 받은 순간, 운전수의 얼굴과 그가 쓴 모자와 그의 콧수염까지 볼 수가 있었다. 당황하면서도 브레이크를 밟는 그가,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이 루시의 망막에 새겨졌다.
데이비드가 침착하게 차를 몰 수만 있었다면 트럭 곁으로 빠져나갈 여유는 있었다. 그는 핸들을 휙 돌리고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차는 트럭과 정면 충돌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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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모든 나라는 스파이를 갖고 있다.
예외없이 영국도 육군정보부라는 것을 갖고 있다. 이 명칭이 너무나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던지 이것을 MI라고 약칭했다. 1940년 MI는 육군성에 소속되었는데 그 기구는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나가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각 부분은 번호로 호칭되고 있었다. 가령 MI 9는 포로수용소로부터 유럽의 독일군 점령기구를 통해서 중립국으로 오는 탈출로를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MI 8은 적의 무선통신을 청취해서 6개 연대와 맞먹는 힘을 발휘하며, MI 6은 프랑스에 공작원을 잡입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1940년 가을, 퍼시빌 고들리만 교수는 MI 5에 들어갔다. 9월의 어느 쌀쌀한 아침, 그는 화이트 홀에 있는 육군성에 나타났다. 간밤엔 이스트 앤드가 공습을 받아 불길에 휩쌓이는 바람에 보조 소방대원인 그는 거의 밤을 새우며 소방작업을 해야만 했다.
평화시에 하는 첩보활동은 하나마나한 것이라고 고들리만은 생각하고 있었다. 평화시에 육군정보부를 쥐고 흔드는 것은 군인들이다.
그러나 전쟁중인 지금은 아마추어 집단이 되어 버려, MI 5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반수는 그가 아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고들리만에개는 반가운 일이었다. 첫날만 해도 그와 동일한 클럽의 회원인 변호사, 대학동창인 미술학교수, 그의 대학 고서보관 담당자,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추리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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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들리만은 10시에 테리 대령의 방에 안내되었다. 대령은 새벽부터 나와 있었던 모양으로, 쓰레기 통에는 벌써 빈 담뱃갑이 두 개나 버려져 있었다.
"여기서는 경칭을 붙여서 부르지 않으면 안되나요?"
고들리만이 우선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이곳엔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없어. 앤드루 삼촌으로 좋아. 앉게 퍼시."
그러니 지금 테리의 태도에는 3개월 전 사보이 호텔에서 식사를 함께 할 때와는 딴판으로 시원시원한 점이 느껴졌다. 테리는 굳은 얼굴로 시선은 줄곧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흘낏 보고 나서 말을 꺼냈다.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지. 지난 번 사보이에서 한 이야기의 계속이야."
"이번에는 도중에서 일어나지 않고 주의깊게 듣겠어요."
테리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예전에 영국에 있던 독일 스파이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들 뿐이었어. 도로시 글라디가 그 대표적인 예야. 그녀는 와이트 섬에서 군의 전화선을 절단하다가 잡혔지. 그녀는 통신문을 써서 포르투칼에 보냈는데 어이없게도 장난감 상점에서 팔고 있는 매직 잉크로 쓰고 있었어. 그런데 이번 9월에 새로운 스파이 공세가 시작되었어.
스파이들의 임무는 영국 침공작전중 상륙에 적당한 지점의 지도작성, 병력수송을 위한 글라이더의 착륙의 가능한 지점과 도로를 조사하는 것, 대전차 방해물이나 가시 철망의 유물를 조사하는 것, 대체로 이런 것들이야. 그러나 이 스파이들은 독일의 단시일에 불러 모은 것들인지라 질도 좋지 않고, 훈련도 불충분하고, 장비도 미약해 이달 2일과 3일 밤에 잡힌 4명, 마이어,키붐,폰스,발드벨크는 그 전형적인 타입이지.
키붐과 폰스는 새벽에 하이드 근처에 상륙했는데 해안가에서 잡입 근무하던 서머셋 보병부대의 톨러데이 병사가 잡았어. 발드벨크는 겨우 함부르크로 보내는 보고를 송신하는데 성공했지. 통신문은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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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 도착. 서류 파기 했음. 해안선에서 2백 미터에 영국군 순찰대가 있음. 물가에 50m 간격으로 방어망과 철도 침목 부설. 지뢰 없음. 수비병력 소수. 요새 미완성. 신설 도로 있음. 발드 벨크.>
"아마 틀림없이 그는 그곳이 어딘지도 몰랐던 모양이야. 자기 본명으로 발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암호명도 없는 것 같네. 독일 스파이 교육은 형편없이 엉성해서 그는 영국의 음식점 관계 법규도 배우지 못한 모양이야.
아침 9시에 술집에 들어가서 사과주를 달라고 했으니까 말이지."
고들리만은 웃음을 터뜨렸다.
"좀 더 들어봐. 더 우스운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곳 술집 영감이 그에게
10시에 다시 와 주세요. 그 동안 마을 교회라도 구경하시구요. 이렇게 말했지. 그러나 이건 참 어이가 없는 이야기지만 그는 꼭 10시에 또 나타났어. 그래서 마을 경관 두 사람에게 잡혔어. 마이어스란 녀석도 두 세
시간 후에 체포되고 그밖에 이 2,3주 동안에 11명이 잡혔지만 대부분이 영국 영토에 상륙한 후, 몇 시간 이내에 잡혔어.
이녀석들은 거의 모두가 교수형을 받게 될 테지."
"거의 모두라니요? 전부 교수형에 처하는 게 아닌가요?"
고들리만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자, 테리가 설명했다.
"그래, 두 놈만 B 1에 인도 되었어. 이 사항은 나중에 말하고 본론에 들어 가겠네."
테리는 계속 설명을 이었다.
"그밖에 에이레에 상륙한 패들이 있어. 유명한 곡예사인 에르테스트 베바
드롤도 그중의 하나야. 그는 전에 '세계 최강의 사나이' 라는 이름으로
아일랜드 순회공연을 했고, 그 고장 여자에게 아이 둘을 낳게 했지만 체
포되어서 3파운드의 벌금을 문 다음 B 1에 넘겨졌어. 그밖에 헤르만 게츠라는 놈이 있는데, 이놈은 에이레인줄 알고 스터에 낙하산으로 내렸다가 IRA( 아이랜드의 반영 지하조직) 를 만나서 약탈을 당하고, 내의만 입은 채 보인 강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독약을 먹고 자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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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알프레드 죠지 오웬스라는 영국인 전기공이 1930년대에 몇 차례 독일을 갔었는데 귀국한 후 그곳에서 알아낸 기술상의 정보를 해군본부에 자진해서 제공했지. 그후 이 사나이는 해군정보부에서 MI 6으로 인계되어 그곳에서 공작원이 되는 훈련을 받았어. 그런데 그때 거의 동시에 독일 첩보부도 이사나이를 포섭했다는 사실을 MI 5에서 알아냈어. 그건 그가 독일의 비밀 연락소에 보낸 편지를 이쪽에서 가로챘기 때문이야.
확실히 그는 충성심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친구로, 그저 스파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 이쪽에서는 그에게 스노우라는 이름을 붙였고 독일 측에서는 죠니라는 이름을 붙였지.
1939년 1월 스노우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어. 그곳에는 무선 송신기의 사용 설명서와 빅토리아 역의 화물 보관소 임시 보관증이 들어 있었지.
그가 그 보관증을 가지고 가서 찾은 것은 슈트케이스에든 무선 송신기였어. 그는 다음 날 체포되어, 송신기와 함께 원즈워드 형무소에 수감되었어. 그리고 그후도 함부르크에 송신을 계속하고 있지. 그러나 통신문의 내용은 전부 MI 5의 B 1에서 만든 것이야.
독일 첩보부는 그후 그에게 영국 내에 있는 두 명의 스파이와 접선하도록 지시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곧 그 두 명을 체포했어. 그밖에 함부르크는 스노우에게 암호와 무선송신 방법을 지시해 왔는데 이것도 물론 우리에게는 귀중한 정보가 되었어. 스노우 같은 친구들이 그 후에도 생겼는데, 찰리 레인보, 서머, 비스켓, 등이 모두 이런 패들이지. 그들은 현재 함부르크의 신임을 받고 있고 영국정보부의 통제하에 카나리스 제독과 정기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어.
일이 이쯤 되었으니 MI 5는 영국 내의 독일 스파이망을 마음대로 조종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주 매력적인 희망을 갖게 되었지.
적의 스파이를 처형하지 않고 이중 스파이로 만든다는 것, 여기에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점이 있어. 첫째로 적이 자기들의 스파이가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스파이들을 더 보내지 않아. 보내온다면 이쪽에서도 잡을 수 있는 스파이들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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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중 스파이에게 송신하게 하는 내용은 이쪽에서 결정하니까 가짜 정보를 보내서 적의 전략을 혼란시킬 수가 있다는 거야."
테리의 설명이 끝나자 고들리만이 말했다.
"그렇게 쉽게는 안될텐데요."
"물론이지."
테리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자욱한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말했다.
"제대로 되려면 스파이 조직의 전체를 손아귀에 넣어야 해. 만약 진짜 스파이가 상당수 남아 있으면 그들이 보내는 정보와 이중 스파이가 보내는 정보가 어긋나게 되니까 함부르크에서 냄새를 맡을 염려가 있어."
"참 재미있는대요."
고들리만의 파이프는 불이 꺼져 있었다. 테리는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였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할 테지만 일이 꽤 힘들지. 일하는 시간은 길고 긴장과 욕구불만의 연속이지. 그러나 물론 이것은 재미있는 일이야."
그는 시계를 힐끗 보고 일어났다.
"그러면 우수한 젊은 부하를 소개하지. 같이 가세."
두 사람은 함께 복도로 나갔다.
"프레드릭 블로그스라고 하는데."
테리는 걸어가면서 고들리만에게 말했다.
"스코틀렌드 야드(런던 경시청) 의 특수임무반에 있었던 경감이야. 힘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그에게 맡기게. 자네는 그의 상사가 되지만 여기서는 계급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하긴 이런 것을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두 사람은 텅 빈 조그만 방에 들어갔다. 바닥에는 카펫도 깔려 있지 않았다. 창은 있지만 창으로 보이는 것은 맞은 편 건물의 벽뿐이었다. 모자 걸이에는 수갑이 하나 걸려 있고 옆의 벽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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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블로그스, 이쪽은 퍼시빌 고들리만 씨. 난 나갈 테니까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테리는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블로그스는 금발머리를 하고 다부진 인상을 주는 단신의 사나이였다. 그 신장이면 겨우 경찰에 들어 왔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고들리만은 생각했다. 요란스러운 빛깔의 넥타이가 좀 눈에 거슬렸지만, 솔직해 보이는 얼굴과 웃을 때의 표정이 매력적이었다. 그의 악수에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고들리만 씨, 저는 지금 집에 점심 먹으러 가려던 참인데요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집사람은 맛있는 소시지 요리와 포테이토칩을 제법 만드니까요."
그의 말씨에는 강한 런던 사투리가 있었다.
고들리만은 소시지와 포테이토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트라팔카 광장까지 걸어가서 폭스턴 행 버스를 탔다.
"저는 좋은 여자와 결혼했어요. 그런데 요리 솜씨는 형편없지요. 요즘은 매일 포테이토칩과 소시지만 먹고 살지요."
런던 동부는 지난 밤 폭격으로 아직 연기가 나고 있었다. 소방대원과 자원해서 나온 시민들이 무너져 쌓인 돌더미를 파헤치기도 하고 꺼져 가는 불에 호수로 물을 뿌리기도 하며 거리를 치우고 있었다.
그들은 한 노인이 반쯤 무너진 집에서 소중스럽게 라디오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고들리만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는 함께 스파이 사냥을 하게 될 모양이지요?"
"잘해 봅시다."
블로그스의 집은 두 채를 이은 연립주택으로 그 거리에는 같은 모양의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현관 곁의 작은 정원에는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블로그스의 아내는 그가 사무실 벽에 걸어 놓은 사진 속의 여성이었다. 얼굴에는 피로의 빛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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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은 공습이 있는 동안 구급차를 운전하지요."
블로그스는 아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틴이라 했다.
"매일 아침, 우리 집이 아직 남아 있을지 하는 걱정을 하며 돌아온답니다. "
그녀가 고들리만에게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이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이 집이지요."
블로그스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고드리만은 벽난로 위에 놓여 있는 메달을 집어들면서 물었다.
"이건 뭐예요?"
"프레드는."
크리스틴이 대신 대답했다.
"우체국에 강도가 들었을 때 그들의 산탄총을 빼았었지요."
"대단한 부부로군요."
"선생님은 결혼하셨나요?"
블로그스가 고들리만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홀아비요."
"안됐군요....."
"집사람은 1930년에 결핵으로 죽었소. 아이는 없었지요."
"우리도 당분간 낳지 않겠어요. 세상이 이 모양이니 아이를 갖는다는 것도...."
"프레드, 그런 이야기는 고들리만 씨에게는 흥미가 없어요."
크리스틴이 남편에게 말했다. 식사가 준비되자 세 사람은 네모진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정적인 분위기가 불현듯 고들리만에게 죽은 아내 엘레나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이런 일은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몇 해 동안 가정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온 그에게는 말이다. 인간적인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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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것은 기묘한 작용을 하는군. 크리스틴의 요리 솜씨는 말이 아니었다. 우선 소시지는 심하게 타 있었고 토테이토칩도 눅눅했다.
블로그스는 그것에 잔뜩 케쳡을 쳐서 꿀꺽 삼켰다. 고들리만도 즐거운
기분으로 그것을 흉내냈다.
화이트 홀의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블로그스는 지금도 영국 중에서 활동중이라고 생각되는 독일 스파이들의 자료들을 고들리만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스파이에 대해서 정보를 얻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내무성의 입국자 명단이다. 여권 관리는 옛날부터 육군정보부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었다.
영국에 입국하였지만 출국, 사망,귀화의 사실이 없는 외국인들의 명단(이것은 제1차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개전과 동시에 모두 분류되어 A,B,C 의 3등급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A급에 속한 자들만 수용소에 갖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저널리즘에서 보도를 한 일도 있고 해서 B급과 C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1940년 7월에는 거주지의 이동을 금지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재를 알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들 중 일부가 스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자료가 블로그스의 서류철에 들어있다. 정보원의 둘째는 전파통신이다. MI 8의 C반에서는 밤마다 전파를 엿듣고 이쪽에서 발신한 것이 아닌 전파는 모두 기록해서 정부의 암호 통신학교에 회부한다. 버클리 가(街)에서 블레칠리 공원의 민가에 옮겨가 있는 이 기관은 학교 같은 것이 아니고 사실을 체스이 명인이나 음악가, 수학자 그리고 크로스워즈 퍼즐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어떠한 암호나 수수께끼도 인간이 생각해 낸 것이라면 반드시 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영국에서 발산되는 전파는 군이나 정부기관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한 스파이의 비밀 통신으로 간주된다. 해독된 통신문들은 블로그스의 서류철 속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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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정보원은 이중 스파이다. 그러나 그들의 유효성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 독일의 첩보부에서 그들에게 보낸 통신에 의하면 여러 명의 스파이가 머지않아 영국에 도착한다는 사실과 마틸다 크래프트 부인( 전에 스노우에게 우편함으로 송금을 하다가 체포되어 홀로웨이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는 여성) 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중 스파이도 그 소재나 신원을 알 수 없는 극히 유능한 스파이가 영국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령 독일에서 스노우에게 줄 송신기를 운반하여 빅토리아 역의 임시 화물보관소에 맡긴 인물이 있을테지만 그에 대해서는 어떤 단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와 같이 만만치 않은 스파이가 있다는 증거만은 블로그스의 서류철 속에 들어 있다.
이밖에 새로운 정보원이나 기술의 개발도 시도되고 있었다. MI 6는 히틀러의 군대에 유린되어 지리멸렬한 유럽의 스파이 망 재건에 노력하고 있었고, 전파 발신지를 더욱 능률적으로 탐지하는 기술도 개발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블로그스의 서류철에는 많지는 않아도 있어야 할 자료가 무두 갖추어져 있었다.
"화가 나서 못견딜 때가 가끔 있어요."
블로그스는 서류철에서 무엇인가 끄집어 내면서 고들리만에게 말했다.
"이것 좀 봐 주세요."
그것은 장문이 무전 보고를 가로챈 것으로 영국 군의 핀란드 원정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금년 초에 입수된 것이지만 정보로는 완벽해요. 발신지를 탐지해 내려고 하고 있을 때 웬일인지 송신이 중단되었어요. 아마 무슨 지장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곧 송신을 재개했지만 우리가 발신 지점을 알아내기 전에 끝나버렸지요."
"이건 뭐요. '월리에게 안부를' 하는 것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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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주 중요한 점이지요."
블로그스의 어조는 열기를 띠어 갔다.
"이것 보세요. 이건 최근의 것입니다. 역시 마지막은 '윌리에게 안부를'이에요. 그리고 여기에는 회답이 있어서 수신자가 '디 나델' 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니들(바늘)이라는 독일어구만."
"이 녀석은 프로예요. 이 통신문 좀 보세요. 간결하고 군소리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서 상세하고 아주 명확해요."
"이쪽은."
고들리만은 두 번째 것을 읽으면서 말했다.
"폭력의 효과를 알리고 있는 것 같구만."
"그래요, 이스트앤드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에요. 프로지요. 이 놈은 대단한 프로예요."
"이 '디 나델' 에 관하여 이밖에 알고 있는 있는 것은 없어요?"
그러자 블로그스는 맥이 빠진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것 뿐이에요. 유감이지만."
"암호명이 '디 나델', 송신문은 '윌리에게 안부를'로 맺는다. 그리고 확실한 정보를 캐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란 말이군요?"
"유감이지만 그래요."
고들리만은 책상 끝에 걸터 앉아서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저쪽 건물의 벽에 제비 둥우리가 보였다.
"이 정도의 정보로 디 나델을 잡을 가능성은?"
블로그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말했다.
"전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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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런 섬을 표현하기 위하여 생긴 단어 같았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음산한 북해에 모로 웅크리고 누운 J자형의 바위산으로 지도에서는 부러진 지팡이의 상반부가 적도와 평행으로 놓여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위치는 북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지팡이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휘어진 쪽은 애버딘 쪽을 향하고, 부러져서 들쑥날쑥한 반대쪽은 위협이라도 하듯이 멀리 떨어진 덴마크를 가리키고 있었다. 섬의 길이는 10마일이다.
섬 둘레에는 모래밭이 없고 차디찬 해변으로부터 절벽이 솟아 있다.
그 절벽의 무례함에 성을 낸 파도는 만년의 분노를 쉴새없이 절벽에 퍼붓고 있다.
지팡이 손잡이의 안쪽은 파도가 조금 잠잠하다. 그곳에는 조류에 밀려 온 조개껍질, 작은 돌맹이, 많은 해초류 등이 쌓여 절벽 밑에 초생달 모양의 유사 해변이 생겼다.
여름이 되면 절벽 위에서 자라는 식물이, 부자가 거지에게 푼돈을 던져주는 것처럼 한 줌의 씨를 그 유사 해변에 떨어뜨린다.
그 해 겨울의 추위가 모질지 않고 봄이 일찍 온다면 이 씨는 약한 뿌리를 내리지만 결코 꽃을 피우거나 씨를 퍼뜨릴만큼 강하게 자라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 해변의 식물들은 해마다 동냥을 받은 것으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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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몰려오는 파도가 넘어오지 못하는 절벽 위의 이 땅에는 초목이 아름답게 번식한다. 초목이라 해도 주로 잡초라서 간신히 야윈 양들의 먹이가 될 만한 것이지만, 그래도 섬의 표토(表土)가 기암(基岩)에서 흘러 내리지 않게 할 만큼은 억세다.
이밖에 가시가 난 관목의 숲이 산재해서 들토끼가 살 집을 마련해 주고,
동쪽 끝에 있는 언덕의 완만한 비탈에는 침엽수들이 의연한 자세로 서서 엄혹한 자연과 대치하고 있다.
높은 언덕은 관목인 하이스에 덮여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나이 - 그가 유일한 이 섬의 사나이다. - 가 몇 년에 한 번씩 그 하이스에 불을 질러 태워버린다. 그러면 그 자리에 풀이 나고 양들은 그것을 먹는다.
그러나 2년이 지나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이스가 다시 번식해 양떼를 몰아낸다. 그러면 사나이는 다시 하이스에 불을 놓는다.
토끼들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에서 살고, 양들은 이곳에 끌려왔기 때문에 이곳에 산다. 그리고 사나이는 그 양들을 돌보기 위해 이곳에 산다.
그리고 새들은 이 섬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이 섬에 산다.
이 섬에는 수만 마리의 새들이 있다. 다리가 긴 바위종아리의 무리는 하늘에 솟을 때 삐이 삐이 하는 장음의 울음소리를 내고, 스피드파이어(영국 전투기) 가 메사슈미트(독일 전투기)에 달려들 때처럼 급강하를 할 때에는 삐삐삐 하는 단음의 울음소리를 낸다.
뜸부기는 좀처럼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새지만 그 짖어대는 듯한 울음소리에 섬에 사는 사나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그리고 이밖에도 갈가마귀 키티웨이스, 그리고 수많은 갈매기들이 있고,또 한 쌍의 금독수리가 있는데 이 놈들이 눈에 띄면 사나이는 총을 들고 나와서 그것을 쏜다.
자연과학자나 에딘버러의 조류전문가들이 뭐라고 잘난 체를 하든,이 놈들이 동물의 시체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새끼 양도 먹는 것을 사나이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섬을 계속 찾아오는 손님은 바람이다. 그것은 대게 동북 쪽에서 빙하와 빙산이 모여 있는 추운 고장에서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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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눈과 폭우 그리고 차디찬 안개를 선물로 가져 오지만 때로는 빈 손으로 찾아오는 일도 있다. 그런 때에는 울부짖으며 악을 쓰고, 미쳐 날뛰어 덤불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나무들을 휘게 한다.
또 험상궂은 바다에 매를 가해 분노의 흰 거품을 뿜게 하는 발작을 일으킨다. 바람은 지칠 줄 모른다. 기습해서 큰 손해를 입힐 것이다.
그러나 그 손님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섬은 그 사나운 손님의 성미를 참고 견디며 함께 살 줄 안다.
초목은 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들토끼들은 덤불 속에 깊이 몸을 숨긴다. 사나이의 집은 바람을 잘 아는 사람의 솜씨로 만들어진 낮고 튼튼한 집이었다.
이 집은 바다의 빛깔과 같은 큰 회색의 돌과 회색의 슬레이트로 만들어졌다. 창은 모두 작고 문은 빈틈없이 꼭 맞게 붙어 있고, 난로의 파이프 끝에는 굴뚝이 목을 내밀고 있다.
집은 섬 동쪽 끝의 언덕 꼭대기에 서서 비바람과 도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허세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양떼를 지키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것과 비슷한 집이 여기서 10마일 떨어진 섬의 서쪽 끝, 유사 해변의 절벽 위에 서 있다. 현재 이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전에 이 집에 한 사나이가 살았는데 그는 이 섬에서 귀리와 감자를 재배하고 소도 몇 마리 사육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3년 동안 바람과 추위와 흙과 싸웠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이 집에 살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참으로 거친 곳이다. 여기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암초,잡초,억센 양, 사나운 야생조, 튼튼한 집 그리고 강한 사나이, 이런 것들 뿐이다.
황량이라는 단어는 이런 곳을 형용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 섬은 스톰 아일랜드(폭풍의 섬)라고 하지."
데이비드 아버지 알프레드 로즈가 설명했다.
"너희들 마음에 들거야."
젊은 로즈 부부, 데이비드와 루시 로즈는 어선의 뒷부분에 앉아서 파도가 이는 바다 저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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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맑은 날, 바람은 찼지만 공기는 맑고 건조했다.
"저 섬을 산 것은 1926년이지."
알프레드 로즈는 말을 계속했다.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피신할 장소가 필요할 것 같아서 저 섬을 샀어. 어쨌던 몸의 회복을 위해서는 제일 적당한 곳이야."
루시는 시아버지가 두 사람의 기분을 북돋아 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모든 것이 신선하고, 자연 그대로의 섬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해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이상 양친의 집에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둘 다 아직 건강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도시로 이주해서 폭격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갓 결혼한 이들에게는 결혼이 너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데이비드 아버지는 자기가 스코틀랜드 바다에 작은 섬을 가지고 있고 그곳에 살 집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너무나 좋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양도 우리 것이야. 양털을 깎는 사람들이 해마다 봄이면 본토에서 찾아와요. 양털 수입으로 톰 마카베티 노인의 급료는 줄 수 있어. 톰은 양치기이지."
"그이는 나이가 얼마나 되죠?"
"글쎄, 이제 한 칠십쯤 될까?"
시이버지는 루시의 물음에 답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르겠군요."
루시가 중얼거렸다. 배는 방향을 바꾸어 만(灣)으로 들어갔다.
방파제 위에 두 개의 조그만 형체가 보였다. 한 사나이와 한 마리의 개였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글쎄. 이십 년이나 저 곳에 혼자 있었다면 어딘가 좀 남들과는 다르게 될 테지. 그는 개와 이야기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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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는 선장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 섬에는 며칠에 한 번씩 오시는 거죠?"
"2주에 한번씩 오지요. 사다 달라는 것을 톰이 가져다 준답니다. 그건 많지는 않아요. 우편도 있기는 하지만 좀처럼 오는 일이 없어요.
두 분께서는 2주에 한 번 필요한 물건 이름을 적어 주세요. 에버딘에서
살 수 있는 것이면 사다 드릴 테니까요."
선장은 엔진을 끄고 로프를 선착장 틈으로 던졌다. 개가 짖어대면서 톰의 둘레를 돌았다. 루시는 선착장으로 뛰어 내렸다.
톰은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는 그녀 보다도 키가 작고 커다란 브라이어 덮개가 붙은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땅딸막하게 퍼진 체구와 풍파에 시달린 얼굴, 모세혈관이 드러난 붉은 큰 코, 놀랄 만큼 건장한 이 노인은 체크 무늬의 모자를 쓰고, 보풀이 일은 트의드의 저고리 안에 털 스웨터를 입고 군화를 신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그 어조는 2주 만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임에도 흥분하는 기색은 없었다.
"톰, 여기 있어."
선장은 두꺼운 종이로 만든 두 개의 상자를 톰에게 내밀었다.
"계란은 품절이야. 그 대신 데본에서 편지가 왔어."
"조카 딸한테서 온 거겠지."
이 말을 듣자 루시는 톰의 스웨터를 짠 사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선장이 배에 있는 데이비드 쪽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까?"
톰과 데이비드 부친이 뱃전에 한 쪽 다리를 걸고 세 사람이 데이비드를
휠체어에 태운 채 들어올려서 방파제에 내려 놓았다.
"자, 나는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2주나 여기서 기다려야 할테니까."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너희가 살 집은 수리도 했고 너희들이 필요한 것도 모두 가져다 놓았다. 뭐가 어디 있는 지는 톰이 가르쳐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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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는 루시에게 작별 키스를 하고 데이비드 어깨를 꼭 잡고 나서 톰과 악수를 했다.
"2,3개월 둘이서 푹 요양하도록 해라. 그리고 완전히 원기를 회복하고 돌아오도록 해. 너희들 둘이 맡아야 할 중요한 전시 임무가 있으니까."
그러나 루시는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이 섬을 떠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배는 데이비드 부친이 올라타자 곧 선착장을 떠났다.
루시는 배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선착장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톰은 데이비드의 휠체어를 밀고, 루시는 톰의 식료품 상자를 들었다.
선착장 끝에서부터 낭떠러지의 꼭대기까지의 길은 좁고 경사가 급한 가파른 길이었다. 루시의 힘으로는 도저히 데이비드의 휠체어를 옮겨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톰은 데이비드를 태운 휠체어를 힘들이지 않고 밀고 올라갔다.
그들이 살 집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것은 아담한 회색의 집이었는데 곁에 솟은 언덕이 바람을 막아 주었다. 집은 새로 페인트 칠을 했고 출입구 앞에는 들장미가 피어 있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연기는 조금 올라가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조그만 창문으로는 아래의 해안가가 보였다.
"참 좋은데요."
루시가 조용히 말했다.
실내는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돌을 깐 바닥에는 두꺼운 주단이 깔려 있었다. 방은 세 개가 있었다. 아래층은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부엌과 돌로 만든 벽난로가 꾸며진 거실이 있고, 2층은 침실이 둘 있었다.
옷장 속에는 두 사람의 옷이 정리되어 있었고 욕실에는 수건이, 부엌에는 식료품이 고루 마련되어 있었다.
"차고에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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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차고는 뒤쪽에 있었는데 그 속에는 지프 한 대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로즈 씨의 말씀은, 이 차는 주인 어른께서 운전하실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한 것이라더군요. 기어는 자동이고 엑셀러레이터도 브레이크도 모두 손으로 다룰 수 있게 되어 있다더군요."
톰의 설명은 들은 것을 그대로 옮기는 듯했다. 그 자신은 엑셀러레이터나 브레이크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머, 참 좋은데요.!"
루시가 외치자 데이비드가 말했다.
"그래, 좋은 차로군. 하지만 이걸 타고 도데체 어딜 가라는 거지?"
"저희 집에 오세요."
톰이 말했다.
"아무 때나 환영합니다. 담배나 위스키는 함께 나눌 사람이 있으면 맛이 더 좋지요. 오랜만에 이웃이 생겨 좋아하고 있었지요."
"고마워요."
"이것은 발전기에요."
톰이 돌아서서 발전기를 가기켰다.
"제 것도 이것과 같습니다만, 연료는 여기에 넣어요. 교류 전기가 생긴 답니다."
"그것 참 묘한데요."
"소형 발전기는 대게 직류인데..."
"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이 덜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래요. 이것은 감전돼도 몸이 날아갈 정도로 끝나지만 직류라면 죽어버리지요."
세 사람은 집으로 들어갔다.
"두 분께서도 좀 쉬어야 하겠고 저도 양을 돌봐야겠으니 오늘은 이만 실례합니다. 아 그렇지, 이걸 말씀드려야겠군. 뭔가 급한 일이 생기면 저는 본토와 무선연락을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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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자 데이비드는 깜짝 놀랐다.
"송신기를 갖고 있다고요?"
"암요."
톰은 자랑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는 이래봬도 영국 기상경찰대의 적기감시원이라오."
"그래 지금까지 몇 대의 적기를 발견했소?"
데이비드의 이 물음에 비꼬는 감정이 있다고 느낀 루시는 눈짓으로 데이비드를 나무랐다. 그러나 톰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오. 아직 한 대도 발견한 적은 없어요."
톰이 떠난 후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톰은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자기의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이해해 주셔야죠."
이 말을 듣자 데이비드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듯이 말했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데이비드의 비꼬는 듯한 말에 루시는 가슴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불구의 몸이 된 남편의 휠체어를 밀고 두 사람의 새로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고 후 루시는 병원에서 신경과 의사를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데이비드의 뇌에 손상이 있는 거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머리는 왼쪽 관자놀이에 타박상이 있을 뿐입니다."
신경과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두 다리에서 잃은 것에서 오는 외상성 신경증이 문제지요. 그것이 주인 어른의 정신상태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는 지금 예측할 수 없어요. 조종사가 되려는 욕망이 강하셨나요?"
루시는 의사의 질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불안해 한 점은 있었지만 역시 조종사가 되겠다는 욕망은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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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어른은 사랑과 휴식이 필요합니다. 이 점에 마음을 많이 쓰셔야겠어요. 그리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얼마동안은 몹시 짜증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섬에 와서 몇 주일 동안, 데이비드는 애정도 휴양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루시의 몸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휴양은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진해서 목양에 열중하고 휠체어를 지프 뒤에 싣고는 섬안을 돌아다니면서 위험한 절벽 끝까지 목장을 확장하기도 하고 독수리를 쏘기도 했다.
늙은 개 베찌가 시력이 약해서 톰이 강아지를 가져오자, 훈련시키는 일을 돕기도 하고 하이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봄이 오자 거의 밤마다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그것을 돌보기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톰이 집 근처에 있는 큰 소나무를 베어 놓자, 2주일이나 걸려 그것을 잘라 장작을 만들고 쌓아올리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는 그 격심한 노동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끈으로 자기의 몸을 의자에 매어 안정시키고 무거운 도끼를 휘두를 줄도 알게 되었다. 또 그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곤봉을 가지고 몇 시간이고 체조를 했다.
그래서 그의 팔과 등의 근육은 마치 육체미 컨테스트에서 입상한 사나이처럼 그고테스트해 보였다.
루시는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난로가에 앉아서 하루종일 자기의 불운을 비판하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일하는 모양이 좀 걱정되는 면도 있었지만 식물인간처럼 무위의 나날을 보배는 것보다는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날 아침 그녀는 가솔린 엔진이 달려 있는 기계톱을 데이비드에게 선물했고, 그는 비단 옷감 한 필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저녁식사에는 톰을 초대해서 데이비드가 잡은 야생 거의고기로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들었다. 그리고 나서 데이비드는 지프로 톰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52
루시는 남편이 돌아왔을 때 브랜디의 마개를 열었다.
"또 한가지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선물은 내년 5월까지...."
그러자 데이비드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도데체 그건 뭐야? 내가 없는 사이 브랜디를 너무 많이 마신게 아니야?"
"애기가 생겼어요."
이 말을 듣자 데이비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루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뭐라고?"
"아니, 당신은 기쁘지 않아요?"
"글쎄, 그런 ....언제 그런 일이...?"
"생각해보시면 알게 아니에요. 결혼식 1주일 전이 틀림없어요. 충돌사고로 유산하지 않았다는 건 참 기적이에요."
"병원에 가 보았어?"
"가 볼 기회가 있어야지요?"
"그럼 어떻게 알지?"
"참 당신두 왜 그렇게 몰라요? 저는 알 수 있어요. 멘스가 없어졌고,
젖꼭지가 아파요. 또 아침에는 구역질이 나고 허리는 4인치나 굵어졌어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당장 알 수 있는 일이에요."
"응, 그래?"
"당신 도데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때는 보통 기뻐하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 그애가 사내애라면 산책을 데리고 가고 또 함께 축구도 할 수 있겠지. 그 아이가 커가면서 아버지처럼 전쟁 영웅이 아니, 다리 없는
꼴사나운 광대가 되고 싶다고 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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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데이비드."
루시는 휠체어 앞에 무릎을 끓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태어나는 아이는 꼭 당신을 존경할 거예요. 당신은 그런 무서운 불운에서 훌륭하게 일어섰으니까요. 또 보통 사람의 두 배나 일할 수 있고 용기와 쾌활함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자기의 불운과 고통을 극복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시시한 설교는 그만 둬. 교회 목사도 아니고."
루시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 사고의 책임이 마치 저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그만 둬줘요. 좀더 조심스러운 운전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트럭을 어떻게 조심하란 말이오!"
이것은 어리석은 말다툼이었고 또 그것을 둘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기대가 컸던 크리스마스였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방 한쪽
구석의 트리도, 벽에 붙인 색종이도 부엌에 남은 야생 거위고기도 모두 루시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그저 버려지기를 기다리는 잔해에 불과했다.
이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남편과, 그 남편이 환영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하고, 도대체 나는 이 황량한 고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자기가 갈 곳이 없다는 것과 결국 자기는 데이비드 로즈 부인이요 그밖엔 아무것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 데이비드가 불쑥 말했다.
"먼저 자야겠어."
그리고는 휠체어를 몰고 복도로 나간 다음 휠체어에서 내려앉아 두 팔로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갔다. 그녀의 귀에는 그가 이층의 마룻바닥을 기듯이 가서 침대에 앉아 잠옷을 입고 침대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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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위의 브랜디 병에 시선을 보내면서 지금 이것을 전부 들이키고 목욕을 하고 잔다면... 아마 내일 아침이면 임신한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그녀의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결론은 데이비드와 이 섬, 그리고 애기를 잃었을 때, 자신이 느낄 공허감에 비한다면 현재의 상태가 그래도 낫다는 것이었다.
결국 루시는 울지도 않고, 브랜디도 마시지 않고, 섬을 떠날 결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침실에 들어가서 이미 잠들어 있는 남편 곁에 누웠다.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 갈매기가 울기 시작했다.
곧 북해의 하늘에 비 오는 날의 회색빛 구름이 몰려오고, 두 사람의 침실에는 차디차고 침울한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루시는 그후 겨우 잠이 들었다.
봄이 오자 루시의 출산을 앞두고 불행의 그림자는 잠시 뒤로 미루어진 것 같은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2월의 눈이 사라진 후 루시는 부엌문과 차고 사이의 빈터에 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꽃과 채소의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이 채소와 꽃들이 싱싱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또 친정 어머니에게 몇 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고, 많은 뜨개질을 하고 우편으로 기저귀를 주문하기도 했다.
출산은 친정에 돌아가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이 권했지만 한 번 돌아가면 다시는 섬에 돌아올 마음이 내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사용하지 않는 장식장에 몇 병의 브랜디를 남겨 두고 있었는데, 언제든 우울증에 걸리면 브랜디 병을 보고 그 때 자칫하면 잃을 뻔한 아기를 생각하고 기분을 전환하려 했다.
예정일의 3주 전, 루시는 그 배를 타고 애버딘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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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와 톰은 선착장에서 손을 흔들며 전송했다. 파도가 몹시 거칠어서 선장도 루시도 배에서 아기를 낳게 되지 않을까 하고 겁을 먹었지만 무사히 에버딘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4주후 그녀는 사내 아기를 안고 같은 배로 섬에 돌아왔다.
데이비드는 출산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의 아이도 양의 새끼처럼 간단히 낳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분만의 고통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간호원들의 오만하고 잘난체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임신중의 아내를 선착장에서 전송하고 얼마 후에 아름다운 순백의 유아복에 쌓인 건강한 아기의 얼굴을 보자,
"이 아이 이름은 조나단으로 하지."
하고 선언했을 뿐이다.
그들은 조나단에게 그후 데이비드 아버지 알프레드, 루시의 아버지 말콤,
톰 노인의 토마스, 이런 이름을 덧붙여 조나단 알프레드 말콤 토마스 로즈라고 했지만, 조나단이라고 부르기에는 아기가 너무 어리고 작았기 때문에 단지 "죠" 라고만 불렀다.
곧 데이비드는 우유 주는 법, 기저귀를 채워 주는 법 등을 알게 되었고 때로는 무릎 위에 안고 얼러 주기도 했다. 다만 그의 죠에 대한 태도는 간호원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문제에 대처하는 식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죠의 의미는 루시가 생각하는 죠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러나 톰 영감은 데이비드와는 달리 죠에게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애기가 있는 방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톰 영감은 몇 시간이고 그 커다란 브라이어 파이프를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어린 죠를 얼러주기도 하고, 죠가 발길질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루시가 목욕을 시키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루시가 넌지시 양을 돌봐야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면 톰 노인은 양은 자기가 돌보지 않아도 알아서 풀을 뜯어먹으니까 괜찮을 거라며 아기가 우유를 먹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그는 나무를 깎아서 자갈을 넣은 딸랑이를 만들어 주었는데 죠가 그것을 잡고 흔들면, 참 신통하다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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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계속되어도 데이비드와 루시는 부부 관계를 갖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채 낳지 않은 데이비드의 부상, 그러나 지금은 섹스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저 이제는 정상이에요."
"그건 무슨 뜻이지?"
"산후가 끝나서 이제는 정상적인 몸이 되었단 말이에요."
"아, 그것 참 다행이군."
그 후, 루시는 잘 때 그와 함께 침실에 들어가서 자기가 옷을 벗는 모습을 일부러 그에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다른 곳을 향해 돌아누우면서 그녀 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루시는 넌지시 자기의 손, 무릎, 유방이 남편에게 닿도록 침대 속에서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골적인 그녀의 유혹에도 데이비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루시는 자기가 정상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상스런 성욕자는 물론 아니다. 그녀는 섹스에 굶주린 바람기 많은 여자가 아니라 남편의 사랑에 굶주린 아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끝내 충돌은 일어나고 말았다. 둘은 침대 속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반듯이 누워 있었다. 옆의 침실에서는 아직 자지 않고 있는 죠의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는 이제 남편이 그녀를 안든가, 그것이 안된다면 안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그것은 루시가 요구하지 않는 한 그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피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이 알수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괴로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요구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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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무릎에 슬쩍 손을 가져가면서 입을 열려고 하다가 그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이 남편의 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정상적인 애정생화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고도
싶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그녀는 남편의 욕망의 증거물을 의기양양하게 꼭 쥐고 그의 몸에 가까이 기대면서 한숨짓듯이 말했다.
"데이비드!"
"제발 이러지 말아."
데이비드는 루시의 손목을 뿌리치고 돌아눕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루시는 그 냉혹한 거부 반응을 침묵으로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왜 안된다는 거죠. 데이비드?"
"제기랄!"
데이비드는 내밷듯이 말하면서 덮고 있던 담요를 밀어 제쳤다. 침대에서 내려서자 한 손으로 이불을 붙잡고 문쪽으로 옮겨갔다.
루시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데이비드를 향해 외쳤다.
"왜 안된다는 거예요?"
죠가 울음을 터뜨렸다.
데이비드는 짧게 만든 잠옷 바지의 텅 빈 자락을 말아올리며 절단된 허벅지를 보이면서 외쳤다.
"그 이유는 이거야 ! 이것이 그 이유란 말이오!"
그리고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거실의 쇼파에서 자고 말았다.
루시는 울고 있는 죠를 달랬다.
죠는 좀처럼 잠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달래고 있는 루시 자신이 더 절실히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죠도 어머니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맛보면서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것일까. 눈물이야 말로 애기가 인생에서 최초로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시는 죠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염려할 것 없어요.' 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그냥 꼭 껴앉고 흔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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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죠의 체온에 위로를 받고 기분이 가라 앉았다. 애기는 그녀의 품 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는 죠를 아기 침대에 내려 놓고 한동안 잠든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래층 거실에서는 데이비드의 코고는 소리가 들여왔다. 수면제를 먹고 잠든 것임에 틀림없다. 루시는 지금 당장 남편 곁을 떠나 그의 얼굴도 볼 수 없고 음성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떠나가고 싶었다.
그곳은 비록 남편이 그녀을 찾는다 해도 몇 시간은 찾아야 할 곳이라야 한다. 그녀는 바지와 스웨터를 입은 다음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부츠를
신고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어둠 속으로 향했다.
밖은 이 섬 특유의 찌르는 듯한 차디찬 안개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루시는 코트의 깃을 올리며, 스카프를 가지러 되돌아갈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싸늘한 안개가 목에 아픔을 주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픈 마음을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절벽 끝에 오자 루시는 그대로 물가로 가는 가파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험하고 좁은 길 위에 놓인 널판은 미끄러웠다.
그녀는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옮겨서 겨우 해변에 닿았다.
바람과 바다는 그 숙명적인 계속하고 있었다. 위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이 파도를 우롱하면, 화가 치민 파도는 바위에 부딪쳐 포말을 뿜어올린다. 끝을 모르는 이 싸움은 양자가 그곳에 있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루시는 파도와 바람 소리를 머리 속에 새기면서 해변을 걸어갔다.
그리고 파도가 절벽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해변의 끝에 오자 걸음을 되돌렸다. 그녀는 그 좁은 해안을 밤새도록 걸었다. 동틀 무렵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올렸다. 데이비드의 저런 태도는 사실은 그 나름대로 강하게 살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중한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동안 그녀는 그것을 생각 해 보았다. 그러자 주먹이 열리면서 손바닥 안에 든 지혜의 진주가 조금씩 그 빛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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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의 루시에 대한 쌀쌀한 태도는, 그가 혼자 힘으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 지프를 몰고, 나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하고, 자기가 만든 체조 도구로 장시간 격한 운동을 하고, 처음부터 이런 열악한 자연 환경을 가진 고도로 옮겨 온 것들과 사실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을 '전쟁의 영웅, 다리가 없는 꼴 사나운 광대....' 라고 표현을 외쳤지만 그는 뭔가 입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일, 말로 표현하면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는 어떤 일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수목의 벌채나 방책을 만드는 일, 휠체어의 생활 등. 그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김으로써 지금도 할 수 있다고 입증하고 싶은 것이었다.
남들이 그를 시험하지 않으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 시험에 도전할 겁니다. 내가 견디는 것을 지켜보세요."
그는 용기를 가졌고 저 비참한 부상에도 참고 견디어 왔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자랑할 수는 없었다. 만약 적의 메서슈미트기가 그의 다리를 빼앗아 갔다면 휠체어는 그의 무공훈장이 되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생애를 두고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래, 전쟁중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사실은 나는 한 번도 전쟁에 참가한 적이 없어. 이건 교통사고 때문이었어. 나는 공중전의 훈련도 다 끝내고 내일은 이제 실전으로 떠나려던 전날 밤이었어. 자신도 있었고 비행기도 좋았고 마음껏 적과 대결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렇다. 그것은 데이비드가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도 강해져야 한다. 난파되어 가는 그녀 생활의 배를 무슨 방법으로든 수리해서 다시 한 번 돛을 올리고 항해하게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데이비드도 전에는 착하고 정답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그녀도 마음을 느긋이 먹고 그가 회복을 이루는 날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희망과 삶의 보람을 찾아내는 일도 전혀 바랄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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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별한다거나 폭격으로 집을 잃은다거나 또는 남편이 포로로 잡혀 있는 많은 여성들, 그녀들도 그러한 고통들과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루시는 발밑의 돌맹이를 주어서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돌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들리지도 않았다. 지구의 주위를 도는 인공위성처럼 영원히 날 수 있는 궤도에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강해질 수 있어!"
그녀는 몸을 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절벽을 올라갔다. 곧 죠에게 아침 우유를 주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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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게이트의 언덕, 빅토리아조 풍의 벽돌집 마님,과 페이퍼 `~ 다음이야기가 기대 됩니다
ㅎㅎㅎ저도 다음 얘기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