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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 "오프 오프 브로드 웨이"
홍성현.
겨울 날씨가 바람불어 많이 춥다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불현듯 따끈한 국물과 쏘주 한잔이 하고싶어 진다.
근데 마땅히 갈 곳이 없고 갈데도 없다.
해운대에서 정칙한지 십 일 이년이 다되가는 탓도 있겠지만 손잡이에 때 묻은 듯 드나들던 정겨운 단골 술집들이
광복동 쪽에서 거의 없어 졌다는 사실들이 아쉽고 그립기만하다.
아!
나의 젊은날에 노스텔지어여!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담배 연기에 그때 그 시절을 잠시 잠깐 스쳐 본다.
부산 중구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는 부산 문화예술가들과 그 추종자들을 포용했던 다양한 문화사랑방들이 존재했었다.
광복동과 남포동. 이 두 지역을 두고 흔히 '광포동'이라 불렀었다.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를 아우르는 말로써 문화예술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이 광포동은 내로라하는 부산문화예술인들에게 있어서 '정신적 거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부산의 모든 문화가 광포동에서 화들짝 꽃이 피고, 새로운 경향의 예술 또한 광포동에서 도도한 물결처럼 넘실거렸었다.
때문에 광포동은 해방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줄곧 부산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주로 드럼통 탁자의 통술집이나 막걸리 대폿집에서 삼삼오오 술 추렴으로 문화적 허기를 달랬다.
이른바 '문화사랑방'이라 통칭되는 이 술집들은, 문화를 사랑하는 지식인들과 문화애호가,
문화를 생산하던 언론·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부박한 문화를 개탄하고, 경직된 세태를 우려하며, 자신의 개똥철학과 예술관을 피력하면서 밤을 기꺼이 지새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만의 새로운 방식의 '문화 재생산 공간'이 아니었을까 판단된다.
그 시작은 자갈치 건어물시장 입구의 '남포집'이라고 이야기 한다.
적산가옥에 남포관으로 술청을 열고 막걸리에 자갈치의 생선으로 만든 회무침과 장어내장 술국을 끓여 팔았다.
광복로 입구 일광카메라 맞은편 좁은 골목에는 막걸리 주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3~40여 미터 정도의 골목 양쪽으로 갓집, 대학촌, 왕대포, 마산집, 양산집, 골목집 등이 어깨동무 하듯 마주하고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을 자처했다.
'대학촌'은 막걸리와 노가리 안주를 팔았는데, 부산의 대표 화가들이 드나들었었다.
임호, 김봉진, 추연근, 김종식, 김원명, 한국화가 청파 이석우, 이규옥과 미술평론가 김강석 등이 단골이었다.
향파 이주홍, 요산 김정한 선생도 최해군, 윤정규 소설가를 대동하고 드나들었다.
또한 김규태, 송재근, 최봉경 등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도 기사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주 찾곤 했다.
'갓집'은 주로 정종을 팔았는데, 유리병 속에 바둑돌을 넣어 잔술을 계산했다.
부산시향 식구들이 연습을 마치고 모여서 술을 마시던 곳이다.
당시 예총회장이던 김창배와 유신, 고태국, 제갈삼 등이 자주 모였고, 무용 평론가 김이문 등도 드나들었다.
'왕대포집'은 주인장이 무쳐주는 가오리무침이 맛깔스럽고, 철철 흘러넘치게 담아내는 막걸리도 넉넉한 집이었다.
'마산집'과 '양산집'은 막걸리에 부침개를 팔았기에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인들과 기자들이 드나들었고,
'골목집'은 가난한 젊은 예술인들이 제각각 모여 앞날을 의논하고 술 추렴을 하던 곳이었다.
미화당 맞은편 할매회국수집 옆에는 '수복센터'가 둥근 드럼통 탁자에 따뜻한 정종 잔술을 팔았다.
주로 김규태, 허만하 등 문인들과 이광우, 송재근 등 신문사 기자들, 구철회, 정재훈 등 멋을 아는 의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지금도 주인만 바뀌었을 뿐 60여 년을 그 자리에 남아,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젊은 문학인들은 미화당백화점 뒷골목의 고갈비 골목을 배회하고 다녔다.
'남마담집', '맘보집', '할매집' 등 10여 집을 밤늦도록 옮겨 다니며 젓가락 장단에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은 남마담집과 할매집이 그 골목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
그 뒤 세월은,
양산박과 동광동 주막시대가 펼쳐진다
1980년 후반 쯤에 들어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것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광복동 입구 백조다방(한화생명) 골목의 '양산박'이다.
양산박은 정용해 시인을 돕기 위해 문화인들이 십시일반 마련한 포장마차인데, 정 시인이 운영을 고사하자
소설가 윤진상이 맡아서 운영을 했다.
그러다 시인 임명수에게 장소를 넘기고 그 옆 건물(취미양복 건물)로 옮겨 같은 상호로 영업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양산박은 임명수의 '임산박'과 윤진상의 '윤산박'으로 나뉘어 각각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교류의 장터' 역할을 담당했다.
그때 쯔음에 회원제 문화사라방 아사달이 용두산 계단에 자리한 가마골 소극장앞에 생긴다
90년 후반 까지 우리가 함께 했던 용두산 둘레의 광복동과 동광동 대청동 뒷골목은 수 없이 스쳐 간 예술가들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필하모니와 백조다방,
알만한 사람은 아는 정황적 사연으로 운영을 떠맏게된 소설가 윤지상 선생님의 양산박에서 늘 만나고 헤어졌었다.
삼분법이란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던 .소두 김인환 선생님. 목공예가 차정보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님 김탁돈 선생님
명MC 김영수형님 섹스폰 박은익형 수많은 산악인들 또 다른 양산박의 주인장인 시인 임명수선생님 운동권 출신인들
낙동강의 파수꾼 김상화 선생님 최백호 비슷한 음악가객 최대호 홍성모형 음악쟁이 지씨 방송인이었던 김옥균.
지금의 영화배우 김윤석. 오달수. 조지웅. 이재용. 연출가 이윤택ᆢ등등
클라리넷 김성근형, 백산 안희제 선생의 모시는 사람들
선장출신 엄선생님 설녹원 김말기씨 용두골 안봉룡씨 등 용두산을 중심으로 가마골 소극장과 계림..골목집,
용두골 양산박 다락방 그리고 국제신문 논설위원이신 최화수님이 주축이 되어 만든 동호회 술집 아사달.
하늘개인날 등지에서 어둡고 좁은 술집을 순례하며 시절의 한때를 보내었다.
당시 시청이 광복동 초입에 위치하였고 엔화의 상승으로 광복동 거리는 일본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남북 동란이후
부산으로 몰려온 많은 아티스트들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어 적산가옥과 더불어 근대의 향기가 곳곳에 묻어 있었던 곳이었다.
컴퓨터 음악방에서 비슷한 성향끼리는 약속하지 않아도 비슷한 음방서 만나듯이 대 여섯 군데의 술집을 이리저리 돌다 만나는 사람이
그사람이 그사람이고 보면 비라도 선술집의 양철 지붕을 몹씨도 두드리는 날에는 의기투합하여 괘지나 칭칭나네의
돌림노래 한자락씩의 자리가 주어지고 광복로의 화려한 옷가게들이 안개등의 옷이 입혀지는 연말이면
추위의 몸을 탁자물림과 함께 즉흥 댄스타피도 벌어지기도 하여 승복 차림의 스님네가 춤사위로 질펀한 겨울밤을 삭혀가기도 하였었다.
기억도 못 할 수 많은 사람들, 언론인 종교인 영험떠는 도사들 영화인 연극인 음악가 화가 국악인 춤꾼들,
그 밖에 문화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들...그 중 퍼뜩 떠오르는 인물들은 지금 프랑스로 안주한 화가 최울가 그리고
안창홍 선생 사학을 집필 하시는 최해군 선생님 청해 박오서 박기찬 선생님 전승환 선생님 신태범선생님 판화가
주정희 선생님 화가에서 향토 학자로 활동 하시는 주경업선생님 김인환교수님.
희곡문학을 전공하신 장세종 선생님 이기원형 이상복형 퍼모먼스 스럽던 권태원시인 김영민형 신도사 소암스님 무학도사 등등
이루 헤아 릴 수 없는데..술한잔 걸치면 발딱 일어서서 악성으로 내 뱉는 엉터리 벨칸토 창법의 정봉길 교수의
내 고향집 앞에는 또 언제 들어 볼 수 있으련지.
문화 사랑방은 한차례 동광동 동광초등학교 주위에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주자가 '산마루(부산호텔 뒤 동남빌딩)'였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의 부인 강정자 여사가 대구집을 시작으로 다락방, 산마루 등 상호와 장소를 옮겨가며
문화예술인들을 반겼던 사랑방이었다.
산마루는 먼구름 한형석, 율관 변창현, 천재동 등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계 어른들이 드나들었는데
특히 이곳에는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이 좌장으로 늘 자리하고 있었기에 성창순, 임동창 등 국악계 대가들과
심우성 등 민속학자, 수많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이 부산에 오면 필히 들러 주흥에 겨운 거방진 놀음을 한판씩 벌이곤 했다.
백산기념관 아래 골목에는 인근의 골목집을 운영하던 주모 이행자가 '그냥 갈 수 없잖아'를 새로이 열었다.
원래 한형석 선생 18번 노래 제목을 간판으로 사용한 것인데
'부산포'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중견 화가들과 김규태 시인 등이 참여했던 목요 모임,
서세욱 등 부산을 가꾸는 모임 회원들이 자주 찾았다.
지금은 타워호텔 아래 골목으로 옮겨져 계림, 한길, 강나루, 양산박, 수미산, 죽림헌 등이었다.
현재는 강나루, 계림, 양산박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강나루는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이상개 시인의 부인인 목경희 여사가 주인장으로,
부산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간간히 시 읊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하는 그야말로 '시인 사랑방'이다.
'계림'은 순박한 촌부 이매자 여사가 운영을 했었다. 주로 영화 관계자들이나 연극배우, 젊은 음악인들이 자주 들리던 곳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서울의 영화 관계자들이 대거 몰리기도 했다.
'수미산'은 시립극단 배우인 정행심이 운영했던 곳. 주로 극단 관계자와 성악가들이 자주 모였다.
가끔 가곡과 오페라의 한 장면들이 한바탕 연출되기도 하는데,
좋은 노래를 듣고 난 후면 서로 맥주를 몇 병씩 몰아주는 인심도 발휘되던 곳이었다.
'양산박'은 광복동의 '임산박'이 이곳으로 옮겨 명맥을 잇다가 주인장이 부산을 떠난 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상호만 유지하고 있다.
현재 광포동 범주의 문화사랑방 중 남아있는 곳은 수복센터와 부산포, 동광초등학교 앞 골목의 강나루 정도이다.
마이카 시대가 시작돼고 부산시청이 옮겨가고 해운대권으로 시외로 산속으로 지방으로 서울로 문화예술인이 떠나자
그들이 머물던 자리도 사라져 갔다.
그래도 이곳을 출입했던 이들에게는 '문화의 향유와 교류의 풍족함에 만족해하고, 나처럼 아직도 저마다 가끔 그 시절들을 추억하고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인들을 살뜰히 챙기고 거둬 먹였던 주인이거나 주모들도 유명을 달리하거나 일선에서 사라져 갔다.
더하여 그 시절을 풍미했던 문화사랑방의 스타급들도 무심한 세월과 함께 피었다 졌다.
그런것이다.
글월 文자에 꽃 花자 "문화"란 말그대로 피었다가 지는 것이다.
'그중에 산마루'의 주모 강정자 여사는 '문화사랑방의 여장부'로 유명했었다.
30대 후반에 동광초등학교 골목의 대구집을 인수하여 문화사랑방을 시작했는데,
워낙 미색도 뛰어나고 음식 솜씨가 좋아 이곳을 드나드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다.
거제 하청이 고향이라 갯것 재료의 음식은 그야말로 일미를 자랑했다.
홍어는 남도예술가들에게도 소문이 자자해, 그 맛에 반해 드나드는 이들도 있었다.
조기와 가오리는 상자 째 사서 찜을 하는데,
주흥이 도도할 때쯤이면 동이 나 주당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곤 했다.
가끔씩 '조기 맛 있게 먹기' 경연도 하고 그 부상으로 호기롭게 술상을 새로 내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대여섯 평의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와 줄을 서거나 인근 다방에서 기다리다 자리를 잡는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다.
다락방 시절에는 가게 앞에 맥주 박스를 놓고 쟁반을 얹은 즉석 술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때문에 화장실도 즉석에서 해결되기 일쑤였다.
맛있는 음식에 호기로운 여장부 주모가 주흥을 더하다 보니,
수많은 예술인들이 즉석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는데, 춤과 악기, 소리 등이 어우러진 신명난 자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이 신명을 강 여사는 주방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특히 될성부른 젊고 가난한 예술인들을 잘 챙겼는데, 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투정도 잘 받아줘 인기가 좋았다.
이들에게는 그저 퍼주다시피 할 정도로 음식 손도 커, 가끔씩 밑지는 장사도 감수할 줄 아는 대범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전시회를 하거나 공연을 할 때는 밥값이라도 찔러주고,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는 말없이 그들의 작품을 떠안아 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던, 큰누님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술주정으로 사랑방 분위기를 흐린다거나 옆 술청에 방해가 되면 가차 없이 쫓겨나거나 빗자루나 대걸레 자루로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문화계 어른들도 술 기운에 경우 없는 말을 했다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강 여사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동시대를 살았던 "어델트 컨템퍼러리"의 문화 사랑방들이, 용두골. 아사달. 학마을 .동녘. 창고 .
하늘개인날. 가베. 산에산에.등등이 술추렴의 아지트들이었습니다.
몇 년 전, 산마루를 끝으로 업을 접은 강정자 여사. 칠순에 닿은 연배에 이제 남은 것은 문화예술인들과의 추억과
그들이 남기고 간 외상장부 뿐이다.
장부는 외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드나들던 사람과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추억하기 위해 보관 중이라 했었던가!
광포동 문화사랑방 시대를 오롯이 함께한 노 주모의 눈에는 그저 아련함만 가득 할 것이다.
......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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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랴도 날개님께서는 기억 할수있는 여건이라도 되는데 지는 가본적도 없는데다.ㅎㅎ 당최 모르는 이름들만 잔뜩 이라 ~^^딱히 댓글을 뭐라 쓸지도 모르겠어요.본문내용을 다읽기에도 제 견문이 짧아서리~^^
@날개. ㅎㅎ 우리 날개님은 공부만 열심히 했던걸루~^^;;저는 지금도 우물안 개구리인걸요. 횡성에만 한우가 있는줄#^^
@날개. 나두 동래 사직동이라 많이 반가와요...어릴적 광복동까지 몇번가본기억이없네요..
쇼핑다녔던기억은 남아있는데~~
@여리미 지는
현재
동래에서 살아예~~^♡^
@슈퍼모델 반가워용~^♡^
어젯밤 저는 윗글읽으면서 답글을 잔뜩 달았었는데
깜짝 놀랬어요 순식간에 날라가더라구요
황당했었죠 제가 뭔짓을 했던건지?
젊었던 시절에 몸과마음이 남포동과 광복동에서
수많은 추억에 젖었던곳인데
어쩌면 그리도 생생하게 나열해주셨는지
감격스럽습니다
히야~~~~정말 대단한글입니다
그시절 모든것들은 이제 더이상 돌아오지않지요?
기억력이
대단한 분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