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온 김응종 교수님의 <프랑스혁명사는 논쟁중>을 읽었습니다. 제1부 혁명과 반혁명, 제2부 혁명가, 제3부 혁명사로 나뉜 책의 내용은 주요한 논쟁들을 중심으로 주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저자인 김응종 교수님의 견해가 수정주의에 가깝고, 치밀한 논변으로 주장을 일관되게 녹이시다 보니 수정주의와 재평가에 조금 더 기울어진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기존에는 수정주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상당부분 우파의 레토릭으로 쓰이고 있는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철저한 글을 읽다 보니 책의 의견에 상당부분 공감하게 되었네요. 무엇보다 한국어로 수정주의를 잘 설명하는 책이 없는데(효시격인 퓌레의 저작도 현재 절판) 여러모로 귀중한 자료였습니다. 저자의 확고한 주장이 잘 드러나는 주장을 일부 가져오겠습니다.
한국의 프랑스혁명사 이해는 여전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프레임에 갇혀 있거나 '혁명 찬가'에 머물러 있다. 이제는 프랑스 학계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시각으로 혁명의 전모를 보아야 한다. 혁명과 함께 반혁명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면적이고 다중적인 혁명사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이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벗어나 폭넓고 균형 잡힌 이해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p.25 머리말
프랑스혁명사를 공부하다보면 혁명가들이 제시한 자유, 평등, 형제애의 이념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영웅적인 시민혁명에 부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혁명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제시한 혁명이념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적을 만들어내고 학살하는 것을 접하게 되면 분노를 느끼며 절망한다. 혁명의 불편한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폭정 중에서 최악의 폭정은 사상이 지배하는 무정한 전제정치"라는 폴 존슨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위대한 휴머니즘이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위로를 얻는다. 라로슈자클랭 후작 부인을 숨겨준 브르타뉴의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들, 테르시에의 탈주를 도와준 브르타뉴의 여자들, 콩도르세를 숨겨준 베르네 부인, 지롱드파 의원들을 숨겨준 테레즈 부케 부인, 5천 명의 청군 포로를 석방해준 방데군 사령관 봉샹 장군과 그 부인, 오스트리아의 감옥으로 남편을 찾아가 감옥에서 함께 생활한 라파예트 부인 위고의 <93년>에 나오는 랑트낙 후작…… (...)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이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혁명이 환희와 고난을 경험한 스탈 부인은 "혁명은 악보다 더 많은 눈물을 뽑는다"며 버크처럼 말했다. 혁명은 미래를 위해 희망의 이념을 제시했지만 현실에서는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pp.568-578
문뜩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해보고 싶어서, 몇 가지 중대한 균열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1. 선언과 현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혁명은 인권선언으로 시작해 인권선언으로 끝납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그 내용이 변경되기도 하고, 명칭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 선언>으로 바뀌었다가 나폴레옹 헌법에서는 혁명의 종식과 함께 인권선언 대신 서문을 채택하였습니다.
인권선언은 자유와 평등의 의미와 그 관계에 대하여 제시합니다. 그러나 비단 인권선언뿐 아니더라도 혁명가들은 다양한 구상을 제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 시기 프랑스 최초로 제정된 성문헌법은 그러한 발상이 집약된 소산입니다. 하지만 입헌군주제를 정치체제로 하는 1791년 헌법은 국왕과 대의기관, 시민 사이의 충돌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1793년 산악파의 주도로 제정된 헌법은 재산에 따른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의 구별을 없애고 남성보통선거를 규정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권을 보장하였으며 저항권을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보장하는 등 사회적 권리를 중심으로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국을 주도한 자코뱅파는 헌법을 공표한 후 헌법의 시행을 평화시까지로 연기하였습니다. 이는 헌법을 시행하여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게 되면 지롱드파와 왕당파에게 기회를 내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연상하는 것은 의회정치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 공언한 선거나 의회정치를 부정하였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자코뱅파는 물론이고, 로베스피에르파를 몰아내고 1795년 헌법에 따라 세워진 총재정부도 왕당파가 의회에 대거 진출하자 쿠데타로 이들을 제거하였습니다. 혁명기 동안 집권한 정파들은 반대파들과의 공존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들을 비민주적·탈법적 방법으로 배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실질적으로 정권이 안정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혁명가들이 지키지 못한 인권선언의 주요한 약속 중에 하나가 종교의 자유입니다. 1790년 혁명정부는 가톨릭 성직자를 공무원으로 삼고, 주교를 국민이 선출하게 한다는 성직자시민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성직자시민법에 따른 선서를 거부하거나 교황의 반대 이후 철회한 성직자는 전체의 절반 이상인데, 의회는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통합을 위해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혁명을 긍정하는 애국파는 민중을 동원해 유형지로 향하는 이들을 구타하기도 했고 우발적으로 처형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또한 이들을 가두는 강제수용소도 운영이 되었는데, 맬패에 의하면 총 5만 명의 신부가 유형에 처해졌고, 이들 가운데 절반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혁명의 격화와 함께 성당이 폐쇄되고 미사가 금지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여러 선언들과, 그러한 선언이 담은 가치는 분명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과 함께, 그러한 선언이 어떻게 지켜졌는지, 그리고 혁명 프랑스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고 과연 존속이 가능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현실만을 가지고, 부정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 그 가치와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부당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실제 있었던 현실과 존속가능성을 염두하지 않고 그 가치만으로 평가하는 것도 타당하지 못합니다.
2. 민중, 진짜 민중과 가짜민중?
보통 프랑스 혁명은 민중 혁명과 시민 혁명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파리 코뮌은 대의기관인 국민공회를 압박하거나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바스티유 습격이나 9월 학살, 5월 31일 등에서는 중대한 변곡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파가 상퀼로트와 굳은 연대가 있었던 에베르파를 숙청하고, 로베스피에르파르 몰아낸 테르미도르 정변이 있고부터 비로소 프랑스 혁명은 다시 시민혁명으로 돌아오죠.
전통적인 프랑스 혁명사 연구의 시발점인 미슐레는 프랑스 혁명이 민중의 역사이고, 민중은 옳은 선택을 한다 이야기 하였습니다. 동시에 9월 학살과 같은 과오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민중이 옳으냐 그르냐, 혹은 그들이 충분히 성숙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냐는 이미 당대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혁명가들은 민중의 역량을 불신했고, 몽테스키외의 주장과 같이 큰 공화국은 성공하기 어렵다 보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한때 로베스피에르도 지롱드파의 국왕 폐위론을 비판하고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대 파리의 민중의 상태와 이들이 일으킨 사건들에서 한 발 더 떨어져 본다면, 과연 이들만을 민중으로 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볼 지점이 될 겁니다. 예컨대 파리의 상퀼로트들은 당시의 정치를 지배하다시피 했지만 파리 이외의 지방의 여론은 배제되었습니다. 방데 지방은 혁명정부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봉기하는 길을 택했고, 툴룽이나 보르도, 리옹과 같은 지방도시에서는 파리시민들이 자신의 대표자인 의원들을 불법적으로 무시한다 여겼습니다. 파리에 기반을 둔 산악파들은 특히 남부 지방도시들의 요청을 연방주의자라 폄하하였고, 끝내 이들을 반란분자로 정의해 잔혹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방의 목소리 역시 효과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치인들에게 전달하지 못했을 뿐, 민중의 범주에서 굳이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혁명정부는 민중의 목소리에 둔감하고, 민중을 적극 탄압한 정부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지방이 아니더라도 소외되고 파리에서 배제된 집단은 많습니다. 여성이 있을 수 있고, 유대인이나 기타 소수 종파 신자 등도 이에 해당하겠지요. 따라서 민중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기 전에, 민중을 이야기할 때는 민중이라는 집단을 가르키면서 다른 이들을 민중이 아닌 이들로 배제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테르미도르 반동'이라는 표현을 단편적인 주장만 반영하는 것이라 하여 '열월 정변'으로 고쳐씁니다. 물론 용어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열려 있는 지점은 맞습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의 모든 부분, 더 나아가 모든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 할 때 다양한 해석과 논쟁에 열려있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사실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런 글을 볼때마다(특히 시민혁명 전통이라는 의식을 가진 한국인에게는?(진짜로 그런 전통이 있다기 보단, 그걸 계승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정 문장이나 특정 단어가 민감하고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이란 표현은.. 이걸 들으면 '이게 어떤 의미일까?'하는 궁금증이 나오는게 아니라, '혹시 또 레밍이나 개돼지 타령인가!'하는 반발심부터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 자체야 언급하신 바 대로 원래부터 그런 주장을 반영하기 위해 쓰인 책이고 그걸 숨기지도 않았으니 별 문제될건 없겠지만요.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적었듯이, 1번과 2번에 적으신 항목도 소위 '개돼지론'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고요. 하지만 이곳 저곳에서 우익 수정주의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며 역사 속 인물들의 개인적 치부를 열심히 드러내는 요즘 모습을 보면..
2번 마지막의 배제된 집단은.. 그 이야기 떠오르네요. 방데에 있던 공화파는 반란군한테 학살당하고, 공화파 학살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파견된 진압군한테도 학살당했다고(...)
이러한 과정이 없이 민중이든 높으신 분이든 '계몽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