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의 허황후
홍성현.
어느 날인가 사적인 자리에서 인제대 고고학 김모교수와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흥의 장소가 뜻밖에도 김해 시내 근처에 자리한 판화가로 유명하신 주정희 선생님의 주촌 자택 이었다.
부산에서의 작업실을 김해로 옮겨 생활하신지 오래이신데 참으로 오랫만에 뵙는 것 같아 모두가 들뜬 분위가 됐다.
주촌 산 중턱 넓은 집 마당에는 고운 잔디가 펼쳐져 있고 온갖 아름다운 들꽃들이 심어져 있었으며 안채와 작업실이
선생님의 꼼꼼 하신 성격대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외골수이며 깐깐하기도 하시고 입담이 걸쭉한 선생님의 여담 속에 우리는 넉넉하게 고기도 굽고 신선하게 잘 차려진
음식들로 작업실 밖 잔디밭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주제는 자연하게 가야사 쪽으로 기울어진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들 무렵, 자리의 주최자인 김교수에게 내가 가야가 어떻니 저떻니 콩팔칠팔 아는 체를 했던가 보다
그렇게 대화가 오고 가다 보니 서로 학설과 억측 속에 설왕설래를 하는 중,
그가 나에게 대뜸 "가야를 조금은 아는 것 같은데 가야사에 대하여 뭘 그렇게 전문가 앞에서 아는 체 때깔을 세우냐"고
일 갈을 한 뒤, 가야에 대한 깊은 자료는 충분치 않다. 그런데 그 중 괄목 할 만한 논문이나 서적들이 더러는 있다.
그러면 그 중에 책 한권이라도 읽어 보고 하는 소리냐고 나에게 퇴박을 줬다.
아주 아작을 낼 참으로 나에게 물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당혹스러웠으나 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내리 깔고 저자는 기억이 안나는데
무슨무슨 가야사를 봤다고 대답을 했더니, 그니는 갑자기 크하하 웃으며 박장대소를 하다 잔디밭에 나뒹구는 거였다.
나뒹군 자리에서 나에게 벌벌벌 기어 오더니 술잔을 내게 디밀며 "그 책 내가 썼소!"이었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가락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와 어렴풋하게 비단치 고개일거라는 곳을 찾아가 보았다.
산길은 호젓했고 상상의 날개는 1세기의 2만5천여리 먼 아유타국에서 작은 부족국가에 불과 했던 가락국까지
그녀가 올 수 밖에 없었던 가락국기가 사믓 흥미스러웠으나,
간밤에 대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대강으로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결혼에 얽힌 행적을 수로왕릉의 대문 앞에 새겨진
두 마리 마주한 물고기의 쌍어문 문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중국 한나라 때 세금수탈에 시달리던 인도출신 브라만(허황옥 집단)들은 중국 땅을 떠나야 했다.
보주에서 강하를 지나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한 아요디아 사람들 이들 중의 한사람인 허황옥이 수로왕과 결혼하게 된다.
허황후는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는다.
큰아들 거등은 가락국의 2대왕으로 등극하고 7명의 왕자는 허황옥의 오빠인 보옥선사(장유화상)를 따라
지리산 남쪽 끝자락 하동의 칠불암에서 현지(玄旨) 대철(大徹)하여 모두 성각(成覺)했다고 칠불암 유사에 적혀있다.
그 후 장유암이란 암자에서 장유화상이 오래도록 머물러 살다 갔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 지금의 장유인 것이고,
구약국 이란 지명으로 부족시대를 살다가 그 세가 더하여 가락국으로 변하고 주변의 세력을 장악한 김수로가
가야를 세우는 것이다.
지금도 김해주변의 거북귀자"龜"가 들어가는 지명은 가야 권역이라 보면 된다.
구포. 구암. 구지. 구덕. 등이 그것이다.
한명의 왕자와 공주는 돛단배를 타고 바람에 이끌려 일본 쿠슈 지방에 도착했다는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고 나머지
한 공주는 가락국서 수로왕과 겨루다 패하여 신라로 가 신라 4대왕이 된 석탈해의 아들 구추의 부인이 됐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허 왕후는 수로왕에게 간청을 하여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사성(賜姓) 받는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일가라는 이야기의 뿌리가 2000년의 세월이 지나 동성. 동본의 혼인금지의 근간이 되기도 했던
하나의 신화로 후대인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엔 그 흥미로움은 대단한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하여 장유에 잠시 머므른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넓은 김해의 들 녁을 바라보며 초라하고 쓸쓸하고 누추한 현실 속에 살더라도 행동을 왕과 같이
넓게 하며 살자는 생각으로 가슴을 넓혀 본다.
김수로 왕릉의 헌향 제례 때에 김해 김씨 성을 가진 지난날 대선주자들의 빈번했던 발걸음마져 흔적조차 없어진 계절,
마른 잎들이 낙화하기 시작하는 고적한 왕릉을 찾아 수로왕과 허 왕후의 아름다운 로맨스와 한 사내의 흥망성쇠를
흘러가는 구름에 떠올려 본다.
첫댓글 아~~~유익한글 잘읽었습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