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동피랑 벽화길 – 달동네 꽃물들다
‘새끼 오이소! 동피랑 몬당꺼지 온다꼬 욕 봤지예! 짜다리 벨 볼 끼 엄서도 모실 댕기드끼 어정거리다 가이소’ 자글자글 주름꽃 핀 할매의 다정한 목소리 들리는 듯하다. 이는 동피랑 마을에 설치된 통영사투리 간판이다. 표준어로 옮기면 ‘어서 오세요. 동피랑 언덕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별 볼거리가 없어도 마실 다니듯이 천천히 둘러보세요.’ 라는 뜻이다.
동피랑은 통영 중앙시장과 강구항을 품고 있는 하늘아래 언덕마을이다.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동쪽 벼랑(피랑)에 자리했다. 전망이 좋은 만큼 가파르다. 물길, 발길이 닿기 어려운 지형 탓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두의 막노동꾼, 지게꾼, 엿장수, 붕어빵 굽는 아낙 등 가난한 사람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통영사람들조차 동피랑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는 동네였다고 한다.
“스산하고 쓸쓸한 마을이었죠. 통영시에서는 배가 들어올 때 낡고 지저분한 마을이 보이니까 미관을 해친다며 철거를 발표했어요. 충무공이 설치한 옛 통제영의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은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었죠. 주민들은 약간의 보상비를 받고 마을을 떠나야 할 처지였는데, 할머니들이 갈 곳이 없잖아요. 우리는 ‘가난이 왜 죄가 되느냐, 달동네도 가꾸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며 마을가꾸기를 시작했습니다.”
지역차원의 환경실천계획인 지방의제21에 따라 2006년 구성된 민관협치기구 ‘푸른통영21’ 김형진 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터놓았다. 통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민관 내남없이 머리를 맞댔다. 무조건 낡은 것을 부수고 획일적인 건물을 세우는 진부한 발상에서 벗어나 마을을 가꾸는 삶터보존으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제1회 전국골목그림공모전이 열렸다. 충무여중 미술반, 거리미술동회, 외국인 영어강사, 통영이 고향인 화가, 화가출신의 통영시장 등 전국 각지에서 17개 팀이 참가했다.
자유롭게 벽을 정하고 거침없는 붓질이 시작됐다. 다 쓰러져가는 재래식 화장실과 뼈만 남은 폐가는 상상력 가득한 비밀의 정원으로 꾸며졌다. 낡은 시멘트 담벼락에는 연이 날고 어린왕자가 웃고 바이올린이 춤추고 시구가 새겨졌다. 만선의 고기떼가 골목까지 밀려왔다. 동물내장처럼 좁고 긴 골목길이 형형색색 벽화골목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마침내 시난고난 삶이 이어지던 희미한 ‘달동네’는 빛과 색이 덧입혀져 생동감 넘치는 마을로 되살아났다. 김형진 위원장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던 곳”인데 요즘엔 주말이면 200-300명이 찾는 통영의 명소가 됐다고 귀띔했다.
“동피랑을 벤치마킹 한다고 다른 지자체에서도 많이 와서 보고 성공비결을 묻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순수함이죠. 마을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 할머니들을 살리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여기를 관광지로 꾸미자는 거창한 목적이 있었으면 분명 실패했을 겁니다.”
어디라도 벽화를 그릴 순 있어도 마을을 살리긴 어렵다. 통영의 동피랑이라서 ‘기적’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통영을 짝사랑하는 이들은 그렇게 믿는다. 통영은 풍광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항구도시지만 번잡하거나 드세지 않고 밀레의 그림 속 풍경처럼 평온하다.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하다. 그런 바다를 바라보며 37년째 약국을 운영하는 최홍림 약사는 ‘통영은 기후가 온화하고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모인 동네’라고 말했다.
“인간애가 넘칩니다. 그래서 관공서 장들이 떠날 때는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고 가죠. 또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극작가 유치진 형제, 음악가 윤이상, 시인 김춘수를 배출한 예향의 도시고요. 통영 사람들 중에 시 한 두 줄 못 외우는 사람이 없어요.”
지그시 두 눈 감고 ‘봉선화’라는 시를 줄줄 읊는 그의 등 뒤로 <김약국의 딸들> <한국의 명시> <촌스러운 것에 대한 그리움>등등 문학서적과 의학전문서적이 빼곡하다. 그는 10년 전 의약분업이 실시된 이래 근처에 병원이 없어 약국살림에 애를 먹지만 대신 책도 보고 붓글씨를 쓰며 여가를 즐긴다고 했다.
“삶이 아무리 입에 풀칠하기 위한 몸부림이라지만 다른 사람 힘들게 하기가 차마 맘이 아파서 약국을 옮기지도 못하고 근근이 현상유지만 해나갑니다.”
가슴에 시가 흐르는 중년 약사의 넋두리에서 인간과 예술을 사랑하는 통영사람의 DNA가 동피랑의 운명을 바꿔놓았음을 직감한다. 허름한 달동네에서 통영의 몽마르트로 새롭게 태어난 동피랑. 가난은 분명 불가항력적 생의 조건이다. 그 사실은 어찌하지 못하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동피랑은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 숙제가 남아 있다고 푸른통영21 윤미숙 사무국장은 말한다.
“마을이 살아난 건 좋지만 할매들이 젖통 내놓고 살던 동네였는데 연일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민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합니다. 주민들이 더 행복해져야하는데 구판장 만들어드린 것밖에 한 일이 없어요. 극복 방안을 계속 모색해야죠. 쉽게 무너뜨리지 말고, 쉽게 헐어버리지 말고 쉽게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방법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을 뿐이죠.”
윤미숙 사무국장은 동피랑 구판장을 운영하는 박부임(60)씨와 이양순(73)씨를 ‘어매’라고 부르며 살갑게 담소를 나누던 참이다. 탁자 위 누런 옛날사진에는 때깔고운 한복과 꽃무늬 몸뻬 차림의 아낙들이 수줍게 웃고 있다.
“나는 저 사진들 다 없애 뿌릿다! 메누리가 흉보까시퍼. 이리도 가난한 동네 살았냐꼬!”
“그래도 가난한 동네가 전망은 좋아. 세상은 공평하지. 답답한 일이 있어도 바다만 보면 가슴이 확 트인다 아이가~”
이제나 저제나 뱃일나간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며 가슴 졸이던 곳. 동피랑 언덕배기에 서면 애잔한 바다가 가슴에 와 안긴다.
-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