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신화처럼 받아들여집니다. 특히 국내에서는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반작용 때문에 인터넷 등지에서는 프랑스를 본받아야 한다는 글이 곧잘 올라오지요. 그러나 그 실상을 상세히 살펴보면 프랑스의 사례가 정의로웠다고 단언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그 과정은 지나친 감정이 개입된 학살에 가까웠지요.
프랑스에서 벌어진 최초의 숙청은 재판정이 아닌 거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분노한 국민들이 중심이 된 ‘민중 재판소’가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요. 물론 치안판사나 변호사는 없었습니다. 개인, 혹은 일부가 누군가를 부역자로 지목하면 곧바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재판을 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성과 법률이 들어설 리 만무합니다.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대단한 변론권을 갖지 못했고 판결은 성급하게 내려졌지요. 다음 기록은 당시의 참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해방에 따른 숙청은 프랑스혁명기의 공포정치에 비유되고 당시의 잔혹성은 전시의 적에 의한 것만큼이나 과도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부역자인 남편이 살해되고 이어 부인이 성폭행 당한 뒤 자신의 11살된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중략) 고문이 처단 직전에 따랐다. 부역 혐의자의 눈을 찌르고, 불타는 침대 위에 눕혀졌다. 한 신부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고 생매장 되었다.”
-박원순, ‘2차대전 후의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연구’ 중에서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여러 가지 비인권적인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죽은 이들만 10,000여명에 달하지요. 진짜 문제는 이들이 정말 죽음에 이르거나 머리에 주홍글씨를 새길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실재 악질적인 나치 부역자가 존재했겠지만 대다수는 대단한 잘못이 없음에도 처벌받았지요.
특히 여성의 경우 ‘나치 병사들과 사귀었다는 이유’ 이것 하나만으로 처벌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강제성이 있는지, 스스로 원했는지, 실질적인 부역 행위가 있었는지는 고려되지 않았지요. 위안부 피해자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던 프랑스인들이 이들의 처벌에 열광했습니다.
더 나가서 당시 레지스탕스 내부 조직 싸움에 위와 같은 약식재판이 악용된 적도 있습니다. 정치적 노선이 다른 파벌을 나치 부여자로 몰아 처형한 것이지요. 리비에라의 생-막심에서는 공산주의 계열 레지스탕스가 비공산계열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16명 살해한 사례가 존재합니다.
해방 이후 영국에서 돌아온 드골 정부는 최대한 빠르게 전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국치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국가가 주도하는 재판소를 전국에 열었지요. 대다수의 피고인들은 징역이나 공민권 박탈 정도에 그쳤지요. 물론 드골의 이런 정책은 사적 재판을 원하는 레지스탕스와 갈등을 벌였습니다. 레지스탕스 입장에서 사형을 최소화하는 국가의 처벌을 바람직하지 못해 보였거든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 국내에서 반나치 언론활동을 벌였고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알베르 카뮈의 사례가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1945년 1월만 하더라도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사람들의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카뮈는 불과 수개월 만에 입장을 바꾸지요.
“이제 프랑스에서의 숙청은 실패한 것만이 아니라 신용을 잃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숙청’이란 말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고통스런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 가증스러운 것이 되었다.…어쨌든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 <콩바>지 1945년 8월 30일 기사
카뮈는 나치 청산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대학살극에 실망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건 딱히 카뮈 같은 개인의 의견도 아닙니다. 프랑스 국민운동본부 산하 통계국이 1944년 12월에 낸 통계에 따르면 당시 부역자 처벌에 만족하는 여론은 21%에 불과했고 71%는 극명한 반대 입장을 보이지요.
사실 이런 여론조사의 결과가 단순히 학살 때문만은 아닙니다. 민중 재판소가 학살의 형태로 부역자들을 처벌했다면 국가에서 설치한 재판소는 돈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지요. 경제력을 지닌 부역자들은 실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해 법망을 빠져나갔고, 힘없는 노동자들만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후자가 경제력이 없는 만큼 대단한 죄를 범했을 가능성도 적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큰 벌을 받게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프랑스에서의 나치 부역자 숙청 열기는 빠르게 식어갑니다. 1951년이 되면 부역자로 잡아들인 사람의 일부를 석방하는 사면 법안이 통과되지요. 사실 말이 일부지 1945년 당시 징역형을 살고 있던 4만명중 대다수가 풀려나 1953년에는 62명만 남게 됩니다.
흥미로운건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이 사면 법안에 비교적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찬성 60%, 반대 23%였지요.
종합하자면 프랑스는 우리에 비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청산에 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때문에 이 분야를 연구한 서울대학교의 이용우 교수는 ‘청산의 의의는 부정할 수 없지만 프랑스식의 청산을 교과서화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못을 박습니다. 프랑스 역사는 청산과 학살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지요.
첫댓글 ..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