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작가님께서 주신글]

인물 탐구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
홍명희((洪命熹,1888~1968)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소설가였다.
또한 북한해서 부수상까지 지낸 인물이다.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 사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다. 호는 벽초(碧初)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서 살았다. 제월리에는 그가 살던 생가터가 있다.
아버지 홍범식은 일제하에서 관료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으로 자결하였다.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에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충청북도 최초로 괴산에서 3.1운동을 거사하였다.
엽연초(葉煙草)
양반 집안에서 법도를 잘 아는 홍명희는 왜 아들과 맞담배질을 했을까?
홍명희는 누구보다도 신식 문화에 밝아, 잘못된 관습을 고치고 양반의 위세를 깨부수는데 앞장을 섰다.
그래서 풍산 홍씨 집안부터 이런 폐습을 고쳐나가려고 했다.
부자간에 맞담배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괴산의 집안 어른들이 서울에 사는 홍명희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들 부자는 담배를 피면서, 어른들이 온 줄도 모르고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집안 어른이 불호령을 내렸다.
풍산 홍씨 가문이 어떤 집안이냐? 부자가 맞담배질을 하다니! 오호 통제라! 집안이 망했구나!
서민들이야 연초가 생각나도 반상이 유별하여 못 피지만 양반들은 긴 곰방대를 물고 거드름을 피웠다.
홍명희의 이런 책략은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부자가 한자리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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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와의 인연
홍명희는 상하이로 건너가 춘원 이광수 조소항 등을 만나서 조국 부흥을 논의했다, 그리고 평소 친밀한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를 읽어보도록 권했다고 한다.
문약한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더 이상 궁핍한 생활은 못 하겠으니 조국으로 돌아가자! 하며 떠나버렸다. 그래도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 않았다.
피난 도중에 이광수가 심한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홍명희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강계에서 15킬로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광수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홍명희의 발자취
1948년 월북하여 북한의 내각 부수상, IOC 위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재직 중에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했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거주하는 풍산 김씨 집안이 기탁한 5100여 유물 중에서 홍명희의 편지가 나왔다.
홍범식은 자결 직전 김지섭을 불러 편지를 써준 뒤에 고향인 안동에 가서 전하라고 했다.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급히 홍범식에게 알렸지만 그때는 이미 자결한 뒤였다. 유서는 홍명희에게 전했다.
조선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지어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의 유서 -
문필의 재능이 어찌 수월하리오
허명을 얻는 데 그쳐선 아니 되느니
매사에 임하여 성실을 귀히 여겨라
재주 있으면 반드시 성실해야 하느니
홍명희가 장남 홍기문에게 지어준 시 -
만장에 써있는 글
상주인 저는 보살펴 주신 은혜를 입어, 관을 싣고 집으로 돌아와 이제야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픔의 눈물이 더욱 새롭습니다.
오직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혼미하여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삼가 소(疏)의 예를 올립니다.
1910년 8월 5일 상주 홍명희 올림
항일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룬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장 직을 맡았다. 그리고 신간회를 만들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중국 중경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이 순국선열 추념대회를
기획하자 홍명희도 뜻을 같이 하여 참여했다.
모스코바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의결하자 김구 선생은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홍명희 선생도 국민 총 동원회 위원이 되어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6, 25 전쟁 후에 토사구팽 당해 공직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 선전부 부장이었던 정상진은 홍명희와 최승희 등을 옹호한 죄로 소련으로 추방당했다.
홍명희 선생은 1968년 3월 5일 사망하여, 평양 애국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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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
역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홍기문(洪起文)은 바로 홍명희의 아들이다.
홍기문의 아들인, 황진이를 쓴 소설가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다.
임꺽정 줄거리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13년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가 쓴 모든 글들은 자매지인 '조광'에 실렸다.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조선의 3대 도적은 허 균, 홍명희, 황석영이라는 천재 작가들에 의해 소설로 탄생한 것이다.
소설 임꺽정은 조선 중기 연산군과 중종 시대에 황해도를 근거지로 백정의 아들 임꺽정의 활약상을 적은 글이다.
임꺽정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문관 교리 이장곤은 갑자사화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우연히 고리 백정을 만나 그 집에서 기거하다가 백정 딸인 봉단과 혼인을 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장곤은 신분을 밝히고 동부승지로 출사했다. 부인는 왕의 배려로 숙부인으로 봉해진다.
양주 백정의 데릴사위가 된 외삼촌 임돌은 임꺽정을 낳았다.
임꺽정은 갖바치가 된 양주팔의 집에 머물며 이봉학, 박유복 등과 사귀고 학문과 검술을 익혔다.
임꺽정은 불교에 입문하여 병해대사가 된 양주팔을 따라 전국을 유람했다.
백두산에서 만난 황천 왕둥이의 누이 운총과 결혼하고, 양주로 돌아와 아들 백손이를 낳았다.
임꺽정이 서른다섯 살이 되자 봉산 황주를 손아귀에 넣고. 청석골을 소굴로 하여 큰 도적이 되었다,
행랑 어멈의 유복자 박유복,
빈농 출신 머슴 곽오주,
처남이자 백두산으로 도망친 관노비의 자식 황천왕동,
양반의 서자 이봉학,
가난한 소금장수 길막봉,
역졸 출신 배돌석
힘이 장사인 임꺽정은 평안도, 함경도 등을 휩쓸며 조정에서 임명한 지방 수령들을 상대로 의적 활동을 벌렸다.
지방 수령들이 보내는 봉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고, 마패를 위조해서 금부도사로 위장해 관리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옥을 부수어 동료들을 구출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임꺽정이 서울 장안의 이름난 기생집에 드나들며 향락에 빠지면서 청석골 화적패는 위기를 맞았다.
기생집에 머물던 임꺽정은 포교들의 습격을 받고 치열한 싸움 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을 했다.
아전 출신 서림의 배신으로 평산 군수를 살해하려던 청석골 화적패들는 곤경에 빠졌다.
관군과 결전을 벌인 끝에 형세가 불리하여 산 속의 소굴로 돌아오지만 상대적으로 열세 때문에 다시 위기에 빠진다.
이에 임꺽정은 패거리와 함께 청석골을 떠났다.
너도 풍산 홍가 딸이냐?
딸아! 친정 내력은 이렇다.
풍산 홍씨는 조선시대 5대 명문가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홍이상(洪履祥) 이후 줄줄이 관직에 출사하였다.
본관은 안동 풍산이고 그곳에 세장지가 있다.
딸아 친정에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읍혈록”을 읽었을 것이다. 이 책은 고인이 된 홍기원 회장이 심형을 기우려 수집한 자료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문중의 할머니였다.
다산 정약용의 부인도 우리 집안의 할머니였다.
조선의 3대 천재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는 도문중 인사다.
도올 김용옥의 부인도 우리 집안에서 출가한 여인이다.
네 큰 고모를 봐라!
젓을 물릴 어린 아이 둘을 두고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심리학 박사를 따가지고 오셨다.
둘째 고모를 봐라!
어렸을 적에 얼마나 야문지 깡깡네라고 불렀다.
마당에 널어둔 고추를 잘 보라고 했다. 그런데 와보니 엉망이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냥 봤어요!”
복장 터질 일이다. 그래도 서울대를 나왔다.
현숙한 풍산 홍씨 딸들은 출가하여 하나같이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너도 풍산 홍가 딸이냐?”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딸들은 출가해도 친정 성현들의 길을 걷는다. 너도 그 길을 갈 것이다.
까꿍 아침산책 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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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청주 MBC창사 28주년기념 특집다큐멘타리)
1998.10.27 - 풍산홍씨 관련 자료방1
- 풍산홍씨정익공파종회 -
https://m.cafe.daum.net/hongpungsan/cgCu/31?svc=kakaotalkT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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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일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룬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장 직을 맡았다. 그리고 신간회를 만들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중국 중경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이 순국선열 추념대회를
기획하자 홍명희도 뜻을 같이 하여 참여했다.
모스코바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의결하자 김구 선생은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홍명희 선생도 국민 총 동원회 위원이 되어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6, 25 전쟁 후에 토사구팽 당해 공직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 선전부 부장이었던 정상진은 홍명희와 최승희 등을 옹호한 죄로 소련으로 추방당했다.
홍명희 선생은 1968년 3월 5일 사망하여, 평양 애국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