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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 경영인’ 광동제약 최수부 회장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넘어갈 때까지 찍어라!” |
●‘비타민을 마셔봐?’ 발상의 전환이 ‘대박’ ●초등학교 4년 중퇴 학력, 제약회사 영업사원 출신에 자긍심 ●인생에 필요한 것은 시장통에서 다 배웠다 ●“국회의사당에 약 팔러 온 건 당신이 처음이야” ●보사부 장관에게 대들고 권력실세에게 주먹질 ●정치인, 원한 만큼 안 준다고 괴롭히지 않았으면 |
“50억원을 대출해주겠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은행돈을 쓸 계획이 없다.” 광동제약 창업주 최수부(崔秀夫·68) 회장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다 이 회사 재무담당자와 한 시중은행 지점장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은행과 이를 거절하는 회사. ‘비타500’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광동제약의 현주소다. 광동제약의 지난해 매출액은 1342억원. 지난 9월에 이미 작년 한 해 판매고를 넘어섰다. 당초 올해 예상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300억원 높게 책정한 1640억원. 하지만 이 수치 또한 무용지물이 됐다. ‘비타500’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예상 매출액을 2000억원으로 상향 조정한 것이다. 올해로 광동제약 ‘문패’를 단 지 41년째. 20대 후반의 청년 최수부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제약업계에서 ‘뚝심 경영인’으로 이름난 최 회장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 초등학교 4학년 중퇴의 학력과 제약회사 영업사원 출신임에 자긍심을 갖고 산다는 최 회장을 광동제약 본사에서 만나 부도위기를 극복한 경영노하우에 대해 들었다.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그의 얼굴에는 넉넉한 회사의 곳간처럼 여유 있는 미소가 넘쳤다. 먼저 ‘박카스’의 아성을 뒤흔들어 제약업계의 화두가 된 ‘비타500’의 탄생배경이 궁금했다. “임원회의에서 ‘비타민을 물에 녹여 먹으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기에 괜찮겠다 싶어 개발을 지시했죠. 사실 ‘비타500’을 만들면서 ‘박카스’에 덤빌 생각은 안 했지. 할 필요도 없었고. 마시는 비타민 음료가 웰빙 바람과 맞아떨어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겁니다. 계획하지 않았는데 ‘박카스’와 어깨를 견줄 만큼 성장한 거죠.” 1963년부터 생산된 ‘박카스’는 판매 첫해부터 돌풍을 일으켜 불과 4년 만인 1967년 동아제약을 제약업계 1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지금까지 수십억 병이 팔려나가 ‘대한민국에서 박카스 한 병 안 마셔본 사람은 간첩’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됐다. ‘박카스’는 2002년 한 해 동안 1980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웬만한 중소기업체의 1년 매출액과 맞먹는 기록이다. 이를 두고 제약업계 관계자들은 ‘박카스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신화’라고 말했다. 2001년 2월15일, ‘비타500’이 처음 세상에 나가는 날 최 회장은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잘 팔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소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타500’, 하늘이 내린 선물 ‘비타500’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첫해 매출액은 53억원. 출시 이듬해인 2002년, 매출액이 두 배로 늘었다. 지난해는 순풍에 돛 단 듯 280억원어치가 팔렸다. 올 연말 ‘비타500’의 예상 매출액은 900억원. 하지만 매출액이 수직상승하는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연말까지 얼마나 더 팔릴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한다. “비타민C 500mg을 섭취하려면 레몬 20개, 사과 60개 정도를 먹어야 해요. 비타민이 몸에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매일 과일을 수십 개씩 까먹고 앉아 있을 순 없잖아요.” 최 회장은 ‘비타500’의 성공요인으로 한 병(100mg)에 비타민C 700mg을 농축시켜 간편하게 마실 수 있다는 점과 카페인 등 중독 성분이 전혀 없다는 점을 꼽았다. ‘비타500’이 제트엔진을 달고 쾌속 질주하듯 팔려나간 사이 ‘박카스’의 지난해 매출액은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2년에 비해 20%가 줄어든 상태. 제약업계는 ‘박카스’의 신화를 깨뜨릴 복병으로 지난 5월까지 3억병이 팔린 ‘비타500’을 지목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출시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500’이 드링크계에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거나 반드시 ‘박카스’의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비타500’은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아온 내게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선물. 내가 많이 배우길 했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나. 아무것도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회사 문을 연 이후 40년 동안 숱한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었죠. 회사 문을 닫고 당장 길거리로 나앉을 뻔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
최 회장은 굴곡 많은 광동제약 40년사 못지않게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6년 일본 규슈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그는 철공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덕에 가정형편은 윤택했지만 학교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조센징’으로 놀림받았던 것.
“일본인에게 당하는 이지메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느 날 쇠가죽으로 만든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어요. 무기를 들고 학교에 간 바로 그날, 끝장을 봤지.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놈과 평소에 나를 유독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쇠가죽을) 휘둘렀는데 다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지더라고. 헤아려보니 모두 여섯 놈이었어요. 그러곤 뒤도 안 돌아보고 미련 없이 학교를 박차고 나왔죠.”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생활을 정리한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외가가 있는 경남 달성군 화원면에 정착했다. 귀국 직후 다시 사업에 손을 댄 아버지가 1년 만에 사기를 당하고 병석에 눕자 그는 열두 살에 학교를 그만뒀다. 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시장통이 학교였다”
“일본에서는 학교를 그만둘 각오로 싸운 거였지만, 이번엔 아버지가 쫄딱 망해 기를 쓰고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거죠.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려 고생하는 어머니를 따라 참외를 떼다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걸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어요. 가난이 참 싫었어요. 가난 때문에 다섯 살 난 막내동생까지 죽었고. 약 한 첩 못 쓴 채.”
-뜻하지 않게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거네요.
“자발적이었다고 봐야죠. 형이 있었지만, 성격이나 체격으로 보아 고된 일을 하기에는 내가 제격이었어요. 그때 돈 되는 일은 뭐든 다 했어요. 밑천 없이 몸뚱이만 있으면 되는 일을. 땔감을 해서 내다 팔고, 뻥튀기, 담배, 해삼에 돼지 장사까지. 시장통은 내게 학교였어요. 살면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죠. 사업 하면서 고려대와 서울대 경영대학원 등을 수료했는데 이곳에서 배운 것도 많지만 그 어떤 지식도 시장통에서 배운 것만 못했어요.”
열두 살에 처음 시장에 나선 그는 군 입대 전까지 온갖 장사를 하며 사업수완을 익혔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삼시 세 끼 밥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좋았다”는 그가 제대 후 얻은 첫 직장은 제약회사인 고려인삼사 영업사원이었다.
“영업사원이란 게 결국 물건 파는 장사꾼이라는 얘긴데, 찬물 더운 물 가릴 형편이 아니라 무작정 덤벼들었죠. 면접날 한 켤레뿐인 낡은 구두에 탁탁 침 뱉어가며 제법 윤나게 닦고 갔는데 며칠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더라고. 영업사원의 기본은 호감 가는 인상과 남다른 말재주일 텐데. 못난 얼굴에,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으니 연락이 없을 수밖에. 군댓밥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내 얼굴과 인상은 뜯어고치지 못했어요.”(웃음)
-합격통지서를 못 받았다는 얘기네요.
“두말 할 것도 없이 떨어진 거죠. 그래도 낙망하지 않았어요. 계란 두 꾸러미를 들고 지사장 집에 찾아가 ‘배운 것도 없고 생긴 것도 변변치 않지만 물건 파는 건 자신 있으니까 뽑아달라’고 했지. 말투에 자신감이 묻어났는지, 아니면 집까지 찾아간 정성에 탄복했는지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합디다. 사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라기보다는 ‘경옥고’ 외판원이라고 봐야죠. 그 회사에 팔 제품이라고는 ‘경옥고’밖에 없었으니까요.”
퇴짜 맞으면 또 찾아가
-약을 판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그때 ‘경옥고’ 가격이 2만환이었는데 웬만한 회사원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었어요. 먹고 살기도 힘든 때라 그걸 살 사람을 찾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죠. 일주일에 하나만 팔아도 실적 좋다는 평가를 받는데, 난 첫 출근 날 두 개를 들고 나갔어요. 종로와 광화문을 이 잡듯이 훑고 다녔지만 허사였죠. 회사로 들어가는데 을지로에 즐비한 양복점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문득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양복점을 할 정도면 형편이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양복점에서 연거푸 퇴짜를 맞았는데 ‘미양사’ 주인이 내 말을 경청하더라고. 그것도 오랜 시간을. ‘됐다’ 싶었죠. 그 양반이 ‘나만 먹을 수 있냐’며 아내 몫까지 두 개를 산 겁니다. 그 인연으로 20년 넘게 그 집에서 양복을 맞춰 입었죠.”
영업 첫날 2개를 팔아 회사를 놀라게 한 그는 입사 후 10일 만에 20만환 어치의 ‘경옥고’를 판매했다. 지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당의 일부를 가불한 그가 달려간 곳은 남대문시장. 여름용 셔츠와 남색바지를 구입했다. 그만의 영업전략 중 하나였다. 입고 다니는 군용점퍼가 고객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영업사원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이 팔았지만 특별한 영업요령이랄 건 없었어요. 나도 다른 영업사원들처럼 태반은 문전박대를 당했죠. 다른 점이 있다면 퇴짜 맞은 그 집에 다음날 또 찾아갔다는 거지. 약 사라는 얘긴 안 꺼내고 안부만 묻고 나왔어요. 그러기를 열 번 이상 반복했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얘기네요. “그건 틀린 말이에요. 내가 열두 살 때부터 톱이나 도끼로 온갖 나무를 다 베 봐서 아는데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허다해요, 허다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면? 그야 넘어갈 때까지 찍으면 되죠. 중요한 건 상점과 사무실에 자주 들러서 인사하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이 사람이 내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대하는 자세예요.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념과 끈기라고 봐요.” -집념과 끈기 다음으로 중요한 게 있다면요? “당당한 자세와 남다른 배짱! 영업사원이라고 무조건 굽실거려서는 절대 안돼요. 약 하나 팔려고 굽실거리고 애걸하면 상대방이 무시하게 돼 있어요. 인간적인 모멸이 든 상태에서는 오히려 실적 올리기가 어렵거든. 난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다녔어요. 취직한 지 얼마 안 돼 좀 엉뚱한 생각을 했어요. 비싼 약을 팔려면 돈 많은 곳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 많은 곳이 어딜까. 결론은 재무부였어요. 은행을 좌지우지하는 곳이니까, 그곳이 돈 많은 관공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길로 재무부의 이재국장 방을 찾아갔죠.” -영업사원 신분으로 이재국장을 쉽게 만날 수 있었나요? “웬걸, 비서에게 내 직업을 숨긴 채 국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죠. 국장 앞에 ‘경옥고’의 효능을 알리는 전단지를 꺼내 설명했더니 얼굴이 바로 일그러집디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여비서를 부르더니 ‘어디서 약장수 따위를 내 방에 들여보냈냐. 그러고도 월급을 받을 거냐’고 호통을 치더라고.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참았죠. 어린 시절부터 온갖 궂은일을 다 해왔지만 그날만큼 가슴을 짓누르는 수모를 당한 적이 없어요. 된통 혼난 여비서에게도 미안했고.” ‘약장수 따위’라는 말을 들은 그는 영업사원을 그만둘 생각도 했지만 밤새 고민한 끝에 다음날 이재국장을 다시 찾아갔다. 국장실 앞 복도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만난 이재국장에게 “나 같은 장사꾼과는 달리 국장님은 최고학부를 나오고 고시까지 패스한 분 아니냐. 이재국장이라면, 우리 같은 서민이 하늘같이 여기고 우러러보지 않느냐. 나도 세금 꼬박꼬박 내고 사는 이 나라 국민이다. 하지만 녹을 받고 사는 사람이 하잘것없는 외판원이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가슴에 맺힌 얘기를 쏟아내자, “미안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자네 마음이 풀어지겠는가. 약 하나 사주면 되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뜻밖이었지. 국장의 말이. 약 값이 얼마냐고 묻기에 ‘기왕 살 거면 온 가족이 다 먹을 수 있는 큰 것으로 사달라’고 했어요. 국장은 내 말을 듣고 기가 막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지. 그날 이재국장에게 16만환짜리 ‘경옥고’ 한 개를 팔았어요. 지금 돈으로 치면 1000만원이 넘는 거금인데 외판원 생활을 하는 동안 이 기록을 깨지 못했어요. 제약업계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재무부 이재국장의 ‘항복선언’ -보통사람 같으면 이재국장을 다시 안 찾아갔을 텐데, 대단한 배짱이네요. “배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못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한번은 광화문에 있던 국회로 영업을 나갔어요. 한 상임위원회 회의실에서 국정 현안을 놓고 여야 의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더라고. 휴식시간에 회의실에 들어가 홍보전단을 쭉 돌렸더니 의원들이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겁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의원이 ‘내, 의원생활 십수년 동안 국회 회의실에 뭘 팔러 들어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 그럽디다.” -의기양양하게 국회에 들어갔는데, 약은 팔았나요. “아니, 못 팔았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죠. 국회의원 대신 전문위원 한 사람을 상대로 영업을 했죠. 이후 그 사람을 통해 국회의원 여럿을 소개받아 고객으로 만들었어요. 결국 국회의원에게 약을 팔겠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죠.” 그는 주머니에 두 가지 종류의 담배를 넣고 다녔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그가 평소 피우는 값싼 ‘파랑새’를, 왼쪽 주머니에는 고객 접대용으로 고급 담배 ‘아리랑’을 넣었다. 고객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한 영업전략이었다. 그의 외판원 시절 경험담을 들으니 영업의 귀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다른 집념과 쉽게 포기하지 않는 끈기, 당당한 자세와 배짱, 성실한 고객관리로 그는 3년 연속 판매왕 자리를 지켰다. 영업사원을 시작한 이듬해 그는 자기 사업체를 경영하겠다는 목표하에 적금을 들었다. |
“매월 7만9700환씩, 1년 후 100만환을 타는 상품이었는데. 한 달 불입금이 웬만한 직장인의 대여섯 달치 월급과 맞먹었죠. 외판원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적금통장만 보면 피로가 풀렸어요. 그렇게 3년 동안 모은 건 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꿈이었죠. 사업을 시작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요.” -3년간 부은 적금 300만환이 광동제약의 창업자금이었던 셈이네요. “세상에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은행에서 적금을 찾아 본격적으로 창업에 뛰어들었어요. 용산구 동빙고동에 대지 87평 건평 30평짜리 집을 산 뒤 뒷마당에 가건물을 짓고 ‘경옥고’를 다릴 수 있는 가마를 설치한 게 광동제약의 시작이었죠. 얼마 동안은 혼자 약도 만들고 나가서 팔기도 했으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셈이죠.” 술집 아가씨 임신으로 허가취소 ‘경옥고’ 단일품목을 생산한 광동제약은 1960년대 후반까지 비록 가내수공업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성장을 거듭했다. 첫 시련은 엉뚱한 데서 비롯됐다. 창업한 지 2년이 지난 1965년, 제약회사 허가취소 처분이 내려진 것. “관리약사가 결혼을 해 약사 명의를 변경해야 했어요. 총무부장에게 증지대 3만원을 주고 그 일을 시켰죠. 약사 명의가 불명확하면 제약사업을 할 수 없으니까 무척 중요한 일이었는데, 어느 날 보건사회부 실태조사 때 이게 걸렸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거죠.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니, 아 글쎄 총무부장이 증지대 사라고 준 돈을 사귀던 술집 아가씨의 낙태수술비로 쓰고 약사 명의변경을 안 했다는 겁니다. 광동제약 4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면허 사태는 이렇게 한 술집 아가씨의 임신에서 비롯된 겁니다.” 웃지 못할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영업사원이 창업주인 최 회장의 저돌적인 영업전략을 흉내내다 대형 사건이 발생한 것. “(영업사원의) 의욕이 지나치다 보니 영업상대를 잘못 고른 거죠. 제품을 팔려고 들어간 건물이 하필이면 서울시청 뒤에 있는 보건사회부였어요. 더 끔찍한 사실은 그가 들어간 방이 제약을 관리 감독하는 약정국장실이었다는 거죠. 당시 의약품 외판은 해당기관이 묵시적으로 용인했을 뿐 원칙적으로는 금지돼 있었거든요. 그런 판국에 다른 데도 아닌 의약품 관련 법규를 감독하는 약정국장실에 가서 약을 사라고 내놓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검찰청 마약단속반에 들어가 마약을 사라고 내놓은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 일로 보사부에서 전화가 왔는데 광동제약 같은 회사는 처음 봤다는 겁니다. 보사부에 약 팔러 온 회사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면서.” 최 회장이 보건사회부로 부리나케 달려가 통사정한 끝에 영업허가 취소는 면했지만 영업정지 3개월의 징계는 피할 수 없었다. 총무부장의 애인이 임신하는 바람에 3주, 그리고 영업사원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바람에 3개월. 창업 초기에 닥친 악몽 같은 시련이었지만 최 회장은 잘못한 직원을 다그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영업사원 시절 재무부 이재국장실과 국회에 쳐들어갔던 일을 떠올리며 영업공백을 이겨냈다고 한다. 99일간의 옥살이 광동제약은 창업 이후 10여년 동안 제약회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생산제품이 적었다. ‘경옥고’와 이동 건재상(십전대보탕 등 한약재를 비닐에 담아 파는 것), 두 제품만 가지고 제약업을 한다고 말하기에 민망한 구석이 있었던 것. 1970년대 들어 장을 깨끗하게 해준다는 ‘쾌장환’과 부인병 치료제인 ‘비니스환’을 개발해 제조허가를 얻었다. 이후 서울 시흥동에 제약회사의 면모를 갖춘 공장을 마련했다. 광동제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쌍화탕’과 ‘우황청심환’이 시흥공장에서 탄생했다. 한방 외길을 걸어온 이유에 대해 그는 “양방에 비해 효능이 뛰어난 한방의 과학화와 대중화를 사업목표로 삼았다”는 말로 설명했다. 최 회장은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진짜 어려움은 제품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생기더라”고 말했다. “1977년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영업사원에게 대리점을 내줬는데 그 사람이 물건 판 돈을 입금하지 않아 약품 공급을 끊었어요. 그랬더니 앙심을 품고 자신이 보좌하던 국회의원에게 뭐라고 고자질했는지 국회의원이 찾아왔어요. ‘약사법을 위반하고 탈세하지 않았냐’기에 ‘죄 지은 게 없으니 국회에서 폭로를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 의원이 국회본회의장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국세청장, 법무부 장관에게 ‘광동제약 허가를 취소하고 세무조사와 함께 강도 높은 수사를 하라’고 요구합디다.” |
국회의원의 ‘입’은 무서웠다. 국회대정부 질의 며칠 후 그는 약사법위반과 탈세혐의로 구속수감 됐다. 99일 동안의 옥살이보다 더 분하고 억울했던 것은 1심의 일부 유죄 판결이었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99일이 아니라 999일을 갇혔어도 억울하지 않았을 거야. 나중에 고등법원이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지만 회사가 받은 타격과 내가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의원, 정말 웃기는 작잡디다. 나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얼마 후 부탁이 있다며 찾아왔지 뭡니까. ‘전에 당신을 걸고 넘어진 보좌관이 이번에는 내가 여성 당원을 성폭행했다고 청와대에 투서를 했다’면서 ‘혹시 그 일과 관련해 청와대나 수사기관이 당신을 부르면 그놈(보좌관) 말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증언해달라는 겁니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부탁입니까. 회사와 나에게 씻지 못할 큰 상처를 입힌 사람이. 그게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의 모습이었어요.” -기업가로서 정치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정치자금 달라고 손 내밀지 말고, 원하는 만큼 안 준다고 괴롭히는 일 절대 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서 이익을 남기는 기업가를 부도덕한 자본가로 매도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세금 꼬박꼬박 내고 일자리 창출하는 기업에 큰 박수를 보내고, 불필요한 법규 줄여주고 시장이 불안하지 않도록 안정된 정치를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1980년대 말 이후 광동제약은 그야말로 ‘신바람나게’ 돌아갔다. 한방 제약사로서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향정신성의약품 취급허가를 따내고 국내 최초로 B형간염 치료제 개발, 효소처리에 의한 ‘우황청심환’ 제조 등 각종 특허를 취득하는 성과가 이어졌다. 이처럼 성장일로를 걷던 광동제약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은 1999년 4월. 최 회장은 운동을 하던 중 뉴스를 통해 회사가 부도난 사실을 알았다. 자금을 담당하는 임원이 무리하게 사채를 끌어다 쓴 게 원인이었다. “부도 난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어요. 주거래은행을 찾아가 급한 불부터 껐죠. 자금담당자의 판단착오로 부도를 자초했으니 결국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내 책임이었죠. 어렵고 힘든 시기에 직원들이 상여금까지 반납해 회사 살리는 데 앞장섰죠. 눈물나게 고마웠어요.” 최 회장은 부도위기를 넘기자 자신의 주식 10만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지인들 중 일부는 “괜한 짓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려움을 함께한 직원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도 때 애쓴 직원들에게 주식 배분 사람들은 광동제약 하면 가장 먼저 ‘최씨 고집’을 떠올린다. 1990년대 중반 최 회장이 TV광고에 출연해 “아직도 내 손으로 직접 우황을 고른다”며 ‘최씨 고집’을 알렸기 때문이다. 창업주가 광고모델이 된 것은 최 회장이 처음이다. “외모가 수려하기를 하나, 끼가 넘치기를 하나. 내 얼굴이 방영되면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한편으론 비싼 모델료를 아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아이고,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닙디다. 5시간 동안 촬영하고 3시간 녹음하고 나서 앞으로 광고모델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작정했다니까요. 평소 전문모델이나 탤런트들의 모델료가 다소 비싸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그 뒤론 그런 생각 안 한다는 거 아닙니까.”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우황’뿐만 아니라 약재를 고르고 관리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는 최 회장. 그는 스스로 ‘고집 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정부가 약가(藥價) 거품을 제거하기 위해 표준가격제를 실시하면서 200원짜리 ‘쌍화탕’을 150원으로 인하하라는 지침을 내리자 그는 정면으로 대들었다. 그 돈으로는 제대로 된 쌍화탕을 만들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보사부 장관에게 불려가 약가인하를 종용받았지만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약재를 사용해 300원짜리 ‘광동탕’을 출시했다. 보건사회부 담당국장은 “(광동제약의) 위반사항을 들춰내 아예 문을 닫게 만들겠다”며 약사 감시원 7∼8명을 파견했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잘못 없는 회사를 이런 식으로 죽이려고 하면 나도 국장의 비리를 들춰내 아예 옷을 벗게 만들겠습니다”고 맞서자 결국 보건사회부가 그의 고집에 손을 들었다. |
-정말 회사 문 닫을 각오하고 정부에 대든 겁니까. “그럼요. 값을 내리라는 건 질 나쁜 싼 약재를 이용해 약을 만들라는 얘긴데, 그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요. 아예 안 만들고 말지. 그래서 ‘쌍화탕’ 생산을 중단하고 ‘광동탕’을 만들었어요.” 그의 고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5년 권력의 실세였던 정부기관장 J씨가 관세청에 간장병 치료제 ‘편자환’의 주재료인 전칠의 수입금지를 요구했다. 광동제약이 고려인삼 대신 중국 인삼인 전칠을 넣어 외화낭비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죠. 고려인삼과 중국인삼은 둘 다 인삼과에 속하지만 효능 면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특유의 효능 때문에 전칠을 넣어야 하는데 그 사람 말만 듣고 막무가내로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겁니다. 당시 대통령과 둘도 없이 친한 사이로 알려진 그를 만나기 위해 인맥을 총동원했죠. 결국 그 사람 집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그는 아무 연락도 없이 약속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게 나타나선 대뜸 ‘당신이 무슨 깡패야? 왜 여기서 꿈쩍도 안 하고 버티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더군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지요. 아예 회사 문 닫고 길거리에 나앉을 생각으로 멱살을 잡고 덤벼들었어요.”
권력 실세와 ‘맞짱’ -J씨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권력의 실세에게 주먹질을 했으니 당시 분위기에선 회사가 불이익을 당하는 건 물론 감옥까지 갈 노릇이었죠.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그 상황에선 공격이 최선의 방어였으니까요. 지은 죄가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고, 설사 억지로 옭아맨다 한들 부당한 일에 내 자존심을 팔고 싶지 않았어요. 그 양반이 나를 향해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 나도 여차하면 신문에 폭로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잠잠하기에 나도 준비한 칼을 다시 집어넣었죠. 그 사람과의 한판은 2라운드 없이 싱겁게 막을 내렸어요.” 맨손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견실한 제약회사를 일군 최 회장은 “요즘 늘어나는 청년실업자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쉬운 일만 찾고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요. 일이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 일자리가 없다고들 난리지만 아직도 영업직은 기회가 많아요. 영업직에 과감히 도전하는 젊은이가 늘어나 제2, 제3의 최수부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 사업밑천과 경영노하우는 영업현장에서 얻고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요즘 경기침체로 어려움에 처한 기업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기업은 신용과 정직이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해요. 어려울 때일수록 유혹이 더 많고, 그 유혹과 타협하기 쉽지만 신념과 신용을 바탕으로 기업의 허리띠를 졸라매면 기회는 반드시 와요.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을 줄 아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죠.” 최 회장은 “기회는 제 발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회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는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 준비된 자에게, 준비를 철저히 한 자에 의해 기회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할 기업인의 자존심과 의무를 지켜왔다”는 최 회장. 숱한 고비와 부도위기를 극복하고 ‘비타500’의 인기에 힘입어 탄탄대로를 걷게 된 데 대해 “시련을 산삼보다 귀한 보약으로 여겼다”는 처방전을 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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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말로던 듣던 최수부 회장님에 대한 글을 올려줘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