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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82강-1 (十廻向品-十廻向)|* 화엄경 녹취(문수경전
화엄경산림 대법회 82강-1 (2016. 12. 5.)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五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三
四. 十廻向
6. 第五無盡功德藏廻向(2권-175쪽)
(15) 廻向의 果位(2권-183쪽)
上講禮
一 心 頂 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 心 頂 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 心 頂 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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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略纂偈
經名著者
大方廣佛華嚴經 龍樹菩薩略纂偈
歸敬根本
南無華藏世界海 毘盧遮那眞法身
現在說法盧舍那 釋迦牟尼諸如來
華嚴說法
過去現在未來世 十方一切諸大聖
根本華嚴轉法輪 海印三昧勢力故
世主妙嚴品 菩薩大衆
普賢菩薩諸大衆
世主妙嚴品 主體神衆
執金剛神身衆神 足行神衆道場神
世主妙嚴品 雜類神衆
主城神衆主地神 主山神衆主林神 主藥神衆主稼神
主河神衆主海神 主水神衆主火神 主風神衆主空神
主方神衆主夜神 主晝神衆阿修羅
世主妙嚴品 天龍八部衆
迦樓羅王緊那羅 摩喉羅伽夜叉王
諸大龍王鳩槃茶 乾達婆王月天子
世主妙嚴品 欲界天衆
日天子衆?利天 夜摩天王兜率天 化樂天王他化天
世主妙嚴品 色界天衆
大梵天王光音天 遍淨天王廣果天 大自在王不可說
七處九會 說法會主
普賢文殊大菩薩 法慧功德金剛幢 金剛藏及金剛慧
入法界品 根本法會 逝多林 如來會
光焰幢及修彌幢 大德聲聞舍利子
入法界品 枝末法會 婆羅林 菩薩會
及與比丘海覺等 優婆塞長優婆夷
善財童子童男女 其數無量不可說
入法界品 枝末法會 十信 善知識
善財童子善知識 文殊舍利最第一
入法界品 枝末法會 十住 善知識
德雲海雲善住僧 彌伽解脫與海幢
休舍毘目瞿沙仙 勝熱婆羅慈行女
入法界品 枝末法會 十行 善知識
善見自在主童子 具足優婆明智士
法寶?長與普眼 無厭足王大光王 不動優婆遍行外
入法界品 枝末法會 十廻向 善知識
優婆羅華長者人 婆施羅船無上勝 獅子嚬伸婆修密
?瑟?羅居士人 觀自在尊與正趣 大天安住主地神
入法界品 枝末法會 十地 善知識
婆珊婆演主夜神 普德淨光主夜神 喜目觀察衆生神
普救衆生妙德神 寂靜音海主夜神 守護一切主夜神
開敷樹華主夜神 大願精進力救護 妙德圓滿瞿婆女
入法界品 枝末法會 等覺 善知識
摩耶夫人天主光 遍友童子衆藝覺 賢勝堅固解脫長
妙月長者無勝軍 最寂靜婆羅聞者 德生童子有德女
入法界品 枝末法會 成滿 善知識
彌勒菩薩文殊等 普賢菩薩微塵衆
法輪常轉
於此法會雲集來 常隨毘盧遮那佛 於蓮華藏世界海
造化莊嚴大法輪 十方虛空諸世界 亦復如是常說法
說法品數
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
說法品 名 第一會
世主妙嚴如來相 普賢三昧世界成 華藏世界盧舍那
說法品 名 第二會
如來名號四聖諦 光明覺品問明品 淨行賢首須彌頂
說法品 名 第三會
須彌頂上偈讚品 菩薩十住梵行品 發心功德明法品
說法品 名 第四會
佛昇夜摩天宮品 夜摩天宮偈讚品 十行品與無盡藏
說法品 名 第五會-第六會
佛昇兜率天宮品 兜率天宮偈讚品 十廻向及十地品
說法品 名 第七會
十定十通十忍品 阿僧祗品與壽量 菩薩住處佛不思
如來十身相海品 如來隨好功德品 普賢行及如來出
說法品 名 第八會-第九會
離世間品入法界
流通正法
是爲十萬偈頌經 三十九品圓滿敎 諷誦此經信受持
初發心時便正覺 安坐如是國土海 是名毘盧遮那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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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祖師 法性偈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意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是故行者還本際 ?息妄想必不得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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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제 33권이 저희들 손에 이렇게 들어왔습니다. 벌써 33권! 그리고 [십회향품 11]해서,
길고 긴 10회향 품이 끝나는 책이 되겠습니다.
언제나 하듯이 서문을 한 번 마음에 담아서 읽는 것으로 점안을 대신하겠습니다.
서 문
지혜 있는 사람의 회향하는 법을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다 열어 보이고
가지가지 선근을 다 회향하나니
그러므로 보살도를 능히 다 이뤘도다.
불자들이 이 회향을 잘 배우고
한량없는 行願(행원)을 원만히 성취하여
법계 중생 남김없이 다 거두었을새
그러므로 부처님의 힘을 능히 이루었도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보살의
광대하고 수승한 行을 성취하려면
마땅히 이 회향에 잘 머무를지니
이 모든 불자를 普賢(보현)이라 부르도다.
오히려 일체중생 다 셀 수 있으며
삼세의 마음들도 또한 알 수 있으나
이와 같은 보현보살 모든 불자의
그지없는 공덕은 측량 못하리라.
작은 터럭 하나로 허공 끝을 다 재고
많고 많은 세계먼지 다 헤아려 알지만
이와 같은 큰 神仙(신선) 모든 불자의
머무는 行願은 측량하지 못하리라.
2015년 10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마침 行願이야기도 나오고, 보현보살 이야기도 이렇게 나왔는데요. 결국은 불교는 行願!ㆍ보살행! 보현행원! 을 세상에 펼치자고 하는 것이 불교의 최고 목적이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81권이나 되는 경전이지만,
그 가운데 열 한권이나 이 행원의 구체적인 실천 행으로써 회향 품이 내용이 이렇게 깁니다.
오늘우리 강의도 10회향 품이 한참 진행 중입니다만,
‘회향이라고 하는 것 같이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10회향 품을 공부하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오늘 나눠드린 책 가운데 [보현행원품 독송용] 있지요? 아주 순박하고 단순하고, 아주 지극한 신심으로 한 권의 책을 평생 수지 독송할만한 그런 책이라면 당연 이
보현행원품을 꼽습니다.
물론 취미 따라서 금강경을 읽는 분도 있고, 보문품을 읽는 이들도 있고, 또 간혹 보완장을 읽는 이도 있고, 또 간혹 왕복서나 일물서나 이렇게 유명한, 그 다음에 또 규봉스님의 圓覺經疏(원각경소)나 이렇게 해서 3대 서문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런 서문을 즐겨 읽는 그런 이들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 개인 취향이고요. 이 보현행원품을 당연 제일로 칩니다.
그래서 제가 일찍부터 보현행원품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또 그래서 [이와 같이 살았으면] 이라고 하는 책을 내면서, 그것은 보현행원품을 해설한 내용입니다.
제가 지금 읽어봐도 아주 거의 80%는 만족할 정도로 좋은데, 그것은 구구한 설명이고요.
이것은 단순하게 그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어디 여행을 가나 뭘 하나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독송할 수 있는 것.
그야말로 우리가 손에 염주를 들고 항상 염주를 놓지 않듯이, 또 저 티벳사람들이 摩尼車(마니차)라고 하는 돌리는 것 있지요? 그 안에 경전도 들어있고 주로 옴마니반메훔을 새겨서 얼마나 지독하게 놓지 않고 일상생활에 그것 하는가 하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한 쪽 손은 고삐를 잡고 한 쪽 손은 그것을 돌리고 합니다.
그 정도로 신앙이 몸에 꽉 배여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 부러운 것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만 하나도 부족함을 느끼거나 불편함을 느끼거나 그렇지 않고, 꿋꿋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극한 신심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튜브에서 티벳불교를 서양 사람이 찍었는데 아주 잘 찍어서 BTN에서 그것을 우리말로 더빙을 해서 올려놓은 스물아홉 ??짜리 있어요. 저는 수시로 그것을 봅니다.
그것을 보면서 신심을 다지고,
‘아~ 불법을 이렇게 믿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이 보현행원품을 우리가 그렇게 마음속에 지녀야할 그런 책으로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화엄경의 결론으로 마지막 81권에 들어있기도 하지만, 불교의 결론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행원이 없는 불법 수행은 사실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뜻으로 볼 때도 이 보현행원품은,
특히 우리 화엄경을 여러 해 동안 이렇게 공부 하시는 스님들에게는 이것이 아주, 아주 익숙해야 되고, 굳이 외우려고 할 것은 없더라도 그저 입에 익숙하게 그렇게 읽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뜻에서 독송용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을 제가 얼마든지 찍을 테니까 여러분 가져가셔서 신도님들, 또 주변에 이 책이 필요할만한 분들에게 법공양 올리면 중간 심부름하는 일만해도 공덕이 아주 무량할 것입니다. 이 편집도 제가 했는데 예쁘게 아주 잘 했지요?
그 동안 여기 문수선원에서 낸 책, 다른 것 하고는 조금 격이 다르게 이렇게 했습니다.
또 한글로 번역을 글자를 큼직하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 여러 권 책을 만들었는데 아주 수작에 꼽히는 책입니다.
저 혼자 선택한 책이지만 ㅎㅎㅎ 수작이라고 할 정도로 별 오점 없이 잘 만든 책입니다. 그래서 공양 올리고요.
가사 책 불교경전에, 여기 반야심경ㆍ금강경ㆍ아미타경
여기 경북대학교 조현춘 교수라고, 이분은 아주 신심 있는 불자입니다. 이 분도 화엄경 공부 많이 하시고 한 분이, 늘 당신이 번역해서 저한테 와서 검증받고 제가 수정하고...
늘 공력이라 해서 책을 여러 권을 냈는데요.
소리 내서 읽어보면 너무 좋습니다. 소리 내서 읽어보면요.
이번에 또 금강선원에서 금강경독송 대회에 가서 가사 책 금강경을 독송해서 상도 받고 그랬습니다.
뉴스에도 나왔지요. 그런 책입니다.
이 책도 한 권씩 공양 올렸으니까 여기다 연락만 하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좋은 법으로써 회향하는 것이 선근회향의 결정체고, 다른 어떤 의식주문제ㆍ의료문제,
우리가 “사사공양”하면 의료가 들어 있잖아요.
의료문제에 탕약이 들어 있습니다. 의식주하고 의료하고 또 기본교육하고 그것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학교도 많이 지어주고 그렇게 하는데요. 그런 것들도 아주 훌륭한 선근회향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회향하신 것을 우리가 늘 염두에 둔다면, 그 가운데는 법으로써 회향 하는 것이 제일이다.
거기에는 어떤 그런 신념을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보현행원품도 거기에 대해서 분명히 못 박아서 말씀하렸고, 수미산처럼 쌓아서 공양한다하더라도,
또 촛불을 켜는데 심지가 수미산만하고,
기름은 저 태평양 바다 만하게 한다하더라도,
법공양에는 1000분의 1도 못 미치고,ㆍ
10000분의 1도 못 미치고,ㆍ우파니 사타분의 1도
못 미친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공양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아까 입성스님이 원도선원 이야기도하고 그랬는데요.
잠깐 저의 방에 올라와서 대만불교의 어떤 현황들을 얼핏 지나가면서 이야기했는데요. 그 분들의 신심은 참 대단 합니다. 중국 본토에 화엄경을 3000부, 81권짜리를 3000부 또 5000부, 그렇게 해서 최종 목표는 100만부를 찍어서,
‘화엄경을 100만부를 찍어서 전 세계에 공양 올리고 다.’
그런 원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200부가 일차적으로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저 탱화(강당에 在)가 그 기록입니다.
“신 화엄 변상도!!!” 저것이 그 기록입니다.
우리가 결국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제일 보람이고, 또 행복이고요. 그것은 ‘불법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겠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개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통도사에는 지금 46회째 화엄산림 법회를 하는데요.
벌써 46년 됐습니다. 이번에 범어사 강주스님은
[약찬게 도표] 여러분 다 받아서 잘 아시지요?
저 밑에 많이 쌓여있습니다. 그것을 만부를 찍어서 통도사에 공양 올렸고요.
저도 또 제가 법회 하는 날, 전번에 남화사에 공양했던,
정행품ㆍ현수품이 들어 있는 제 14권을 3000부를 공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찍고 있습니다.
22일이 제가 법회 하는 날인데요. 그런 것들이 다 대만 불자들이 저렇게 본보기를 보인데서 용기를 얻고 하는 것입니다. 또 법공양을 일찍부터 제가 하던 사업이고요.
1988년, 범어사에 오면서 한 페이지짜리 一紙經(일지경)이라 해서 한 페이지에 부처님 말씀을 찍어서 일주문에 쌓아놓고 나눠주던 것이 오늘날은 이렇게 한 권씩 법공양하게 됐습니다. 이것 저도 하는데 여러분인들 못하겠습니까?
누구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공양은, 이것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장에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모르는 가운데 그런 아주 큰 효과가 있고, 틀림없이 가피력도 있습니다.
우리가 불법을 공부해서 하나ㆍ하나 염주를 돌리듯이 부처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신심이 자꾸 깊어지고 증장되는 겁니다. 그 보다 훌륭한 재산은 없지요.
그 보다 훌륭한 보물은 없습니다. 신심보다 훌륭한 재산은 없고, 신심보다 위대한 보물은 없다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183쪽.
이것이 第五無盡功德藏廻向 - 十廻向品 중간인데요.
無盡功德藏廻向이 아직도 이야기되고 있는 중입니다.
(15) 廻向의 果位
菩薩摩訶薩이 住此廻向에 得十種無盡藏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得見佛無盡藏이니
於一毛孔에 見阿僧祗諸佛이 出興世故며
得入法無盡藏이니 以佛智力으로 觀一切法이
悉入一法故며
得憶持無盡藏이니 受持一切佛所說法하야
無忘失故며
得決定慧無盡藏이니
善知一切佛所說法秘密方便故며
得解義趣無盡藏이니 善知諸法理趣分齊故며
↑ 82강 - 1
↓ 82강 - 2
得無邊悟解無盡藏이니 以如虛空智로
通達三世一切法故며
得福德無盡藏이니
充滿一切諸衆生意하야 不可盡故며
得勇猛智覺無盡藏이니 悉能除滅一切衆生의
愚癡?故며
得決定辯才無盡藏이니 演說一切佛平等法하야
令諸衆生으로 悉解了故며
得十力無畏無盡藏이니 具足一切菩薩所行하야
以離垢繒으로 而繫其頂하야 至無障碍一切智故라
是爲十이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一切善根廻向時에 得此十種無盡藏이니라
廻向의 果位(회향과위)
第五無盡功德藏廻向을 수행하게 되면 어떤 과위에 오르는가? 열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菩薩摩訶薩이
住此廻向에, 이 無盡功德藏회향에 머물 때에,
得十種無盡藏하나니,
열 가지 무진장을 얻게 된다. 다함이 없는 창고!
다함이 없는 창고! 순수한 마음으로 불법을 널리 공양 올리는 것은 곧 무진장이에요. 무진장입니다.
정말이것은 퍼내도ㆍ퍼내도 더 불어나면 불어났지,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닥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어디 가서 각자 인연 따라서 사시는 절에서 신도들 모아놓고 법문을 해봐도, 작년 하는 것하고, 금년 하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훨씬 익숙하고, 법문할 무슨 소재도 많아지고, 말도 더 많아지고, 설명도 더 깊어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것은 자꾸 불어납니다. 법이란 것은 원리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또한 무진장입니다. 바닥날 리가 없습니다. 훨씬...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것이지요.
何等이 爲十고?
所謂得見佛無盡藏이다 그랬습니다.
부처님을 끝없이 친근 하는데 대한 무진장이다.
아, 우리 절에 있는 부처님만 우리 부처님인 줄 알았는데... 이 신심을 자꾸 증장시키다 보면 가는 곳마다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눈에 들어옵니다.
불상만 부처님인 줄 알았는데, 역사적인 부처님도 들어오고, 우주에 변만해 있는 佛身充滿於法界! 그런 법신불도 이해가 되고, 아~! 이것 대단하지요? 見佛無盡藏입니다.
나중에 두두 물물이 청정법신바로지불이라고 하는 데까지 눈을 뜨게 된다고요. 이것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것이 견불무진장에서 얻는다 이 겁니다. 見佛無盡藏!
거기에 제가 별표를 세 개를 쳐나가다 보니까 열 가지 항목에 전부 별이 세 개씩 다 붙었어요. 見佛無盡藏!
그런데 견불무진장이 왜 그러냐?
於一毛孔에, 한 모공에서
見阿僧祗諸佛이, 아승지 모든 부처님이
出興世故며, 세상에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그랬습니다. 야~! 이것은 대단한 것이지요.
제가 곳곳에 산천초목이 부처님이고 하는 것을 넘어서,
한 모공ㆍ모공마다 阿僧祗諸佛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見佛無盡藏이지요.
그야말로 부처님을 무진장 보는 겁니다.
무진장 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지혜가 여기에까지 계합하기는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만, 언젠가 이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得入法無盡藏이다 그랬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무진장이다.
법의 세계.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의 세계.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의 세계에 들어가는 무진장을 얻음이니,
以佛智力으로, 부처님 지력으로써,
佛智力을 “깨달음의 지혜의 힘으로”←이렇게 해석해도 좋습니다. 그런 지혜의 힘으로써
觀一切法이 悉入一法故며,
일체법이 한 법에 다 들어가는 것을 관하는 까닭이다.
일체법이 한 법속에 다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바닷물 한 방울 맛을 보면 온 드넓은 바닷물 맛을 다 안다 이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비유를 잘 들지요.
그와 같이 사실은 어떤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요?
인생사ㆍ세상사 그냥 앉아서 환하게 다 압니다.
왜냐? 이치는 하나니까요. 그래서 일체법이 한 법에 들어감을 본다. 이 것이지요. 그것도 또 별이 세 개나 붙었습니다.
得憶持無盡藏이니,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해서 가지는 무진장을 얻음이니
受持一切佛所說法하야,
모든 부처님의 설하신 법을 수지해서
無忘失故며, 참~~ 이것. 늘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제가 부족한 점이고, 따라서 또 부러워하는 점이고 그렇습니다.
보면 돌아서면 잊어버리고ㆍ보면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一切부처님의 所說法을 수지해서...
그 동안 본 경전ㆍ어록, 이것을 다 외울 수 있으면 좀 좋습니까? 無忘失이라. ←이것이 憶持無盡藏을 얻게 된다.
제가 第五無盡功德藏廻向을 제대로 닦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요.
得決定慧無盡藏이니,
이 화엄경에는 특별히 결정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지요.
決定 = 확실한, 분명한, 아주 결정적인 요지부동, 변할 수 없는, ←이런 의미입니다. 결정이라는 것이요.
決定慧無盡藏, 변할 수 없는 확실한, 분명한 지혜의 무진장을 얻는다. 그것을 가지고,
善知一切佛所說法秘密方便故며,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바 법의 비밀과 또 비밀한 방편을 잘 안다. 그랬습니다. 결정적인지혜ㆍ분명한 지혜가 없으면 그거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得解 義趣(의취)無盡藏이니, 그랬습니다.
義趣를 아는 것. 이것은 이치를, 義趣라 했지만 이치입니다. 이치를 아는 무진장이다. 그래서
善知 = 잘 안다. 무엇을요?
諸法의 理趣分齊故(이취분제고)며,
어떤 이치는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이치의 길은 어떻고, 그런 것들을 환하게 잘 아는 것이지요.
모든 법의 理趣의 分齊를 잘 아는 안다!
分齊라고 하는 것은 한계입니다.
그저 두루 뭉숭이로 처음에는 이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이것이고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데, 좀 더 깊이 이해하면 정말 세밀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신도들이 흔히 편한 말로
“뭐 불교나 기독교나 종교라는 것은 다 그렇고 그렇지요. 다 그것이 그것이지요.”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도 답답하고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찌 불교하고 기독교하고 같으냐고요?
그것 다 우리가 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지요.
義趣가, 이치의 한계가 분명히 있고 천지차인데요.
소승불교하고 대승불교하고도 막 섞어서 그저 이야기하고, 또 선불교 하고... 지금 우리나라불교를 크게 세 갈래고 나누면, 소승불교, 뭐 지금 근래에 상좌부불교 = 근본불교라고 하는데요.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판을 치지요.
수행법도 판을 치고, 교리도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선불교는 아직도 세력이 짱짱하지요.
그런데 세력이 제일 미약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라고요. 사실은 이 대승불교가 제일불교인데요.
제일불교고, 가장 높은 불교고,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는 불교고, 비교할 바 없는 불교가 대승불교인데요.
또 대승불교가 제일 위입니다.
화엄경공부ㆍ법화경공부ㆍ유마경공부! ←이 3대 대승 경전을 가지고... 금강경가지고는 좀 약해요.
유마경ㆍ법화경ㆍ화엄경! ←이 3대 대승 경전을 가지고 대승불교를 크게 일으켜야 됩니다.
이 세 가지 경전은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입니다.
단순하게 여기 있는 이치를 들어내자고 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승불교가 이렇다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세상에다가 선언하는 대승불교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선언서적인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유마경 같은 것ㆍ법화경 같은 것은 아주 대단합니다. 화엄경도 사이사이에 그런 뜻이 많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 소승불교, 대승불교의 차이를 어떤 이가 이야기하는데, 컴퓨터의 진화를 가지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저는 전화기진화를 가지고 비유를 잘 듭니다.
우리가 처음에 쓰던 유선전화. 방 안에 있는 유선전화하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하고 차이다.
근본불교는 아주, 불교의 출발로서는 그만한 공이 없습니다. 최고의 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하고 비교를 하면 그것은 유선전화이고, 대승불교는 우리가가지고 있는 아주 기가 막힌 성능을 지닌 스마트폰이다.”←이렇게 저는 비유를 잘하는데, 그 차이점을 우리가 확실하게 잘 알아야 됩니다.
우선 가장 큰 특징이 숫타니파타나 그 다음에 법구경이나 이것은 초기불교 대표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데는 무조건 이생을 버리고,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 것. 적정열반에 들어서 인생살이 이제는 영원히 굿바이 하는 것. ←이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도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하면 완전히 다시는 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생에 다시 오지 않는 것.
그럼 고생하는 중생들 어쩌자는 말입니까?
근본불교는요? 생을 받지 않고, 이 세상하고 완전히 이별해 버리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이 그겁니다. 그런데 화엄경은
끊임없이 다시 와야 된다.= 受生.= 생을 받아서
다시 와서 중생들하고 더불어 同苦同樂하고,
울고 웃고 같이 지지고 볶고 같이 살아야 된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것 천지차이잖아요.
‘내몰라라. 이 세상이야 썩든 말든, 너희들은 죽든 살든 상관없이 나만 저~~ 기 멀리 도망가 버리면 된다.’ 하는 것이 소승불교 교리고, 대승불교는 아니다. 죽어서 또 오고,
죽어서 또 오고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이 세상에 다시 돌아와서... 속환사바하라고 스님들 돌아가시면 으레 그렇게 축원하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습니까?
빨리 사바세계에 돌아와서 우리같이 삽시다. 하는 것이
그것이 이치가 같이 안 살 수 없도록 돼있습니다.
으레 다시 오게 돼있습니다. 자기는 도망 못갑니다.
소승불교를 아무리 공부 잘해서 인생을 하직하고 더 이상 사바세계에 안 온다고 원력을 세워도 자기는 안 오고 못 배깁니다. 오게 돼있습니다.
달라이라마 같은 분은 열 네 번이나 오신 것이 확인 된 분이잖아요. 우리도 다 전생에 어떻게, 어떻게 살다가 왔는데 확인이 안 됐을 뿐입니다. 사실은 우리도 여러 번 왔습니다.
환생. 여러 번 했습니다. 이생에, 여기서 우리가 지은 인연이 도대체 어디 가겠습니까? 피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 진 빚이 얼만데요? 진 빚이 얼만데 그 빚 갚아야지요. 빚 갚으면서 또 빚지고, 빚 갚으면서 또 빚지고...
이렇게 사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진화해왔어요.
그렇게 진화해왔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와야 되고, 오도록 돼있고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온 겁니다. 근본불교에서 다시는 안 온다하고 갔지만, 그것 몰라서 그래요.
으레 오게 돼있습니다. 왜냐? 여기 살면서 당신 지은 빚이 있고, 인과가 있고, 인연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외면 한다 말입니까? 그것은 잘못 본겁니다.
초기불교는 그것 잘못 본겁니다.
떠났으면 좋겠지요. 하도 괴롭고 힘들고 하니까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 그저 뜨거운 햇빛의 인도사회 같은 데서 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지옥과 같이 뜨거운 그런 세상이라 하더라도,
안 오고 안 되게 돼있습니다. 오게끔 돼있습니다.
그것이 이치입니다. 그런 것들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큰 차이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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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82강-2 (2016. 12. 5.)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五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三
四. 十廻向
6. 第五無盡功德藏廻向(2권-175쪽)
(15) 廻向의 果位(2권-183쪽)
(16) 金剛幢菩薩의 偈頌
가. 廻向할 善根
나. 菩提에 廻向
諸法理趣分齊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것 뭐 두루 뭉실로 소승불교도 그렇고, 대승불교도 그렇고, 선불교도 그렇고, 선불교는 우리가 짚고 넘어가자면, 선불교는 견해는 아주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높습니다. 그래서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높이 두는 겁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 대화에 보면,
“네는 여래선은 알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못 봤다.”
이런 소리를 잘 쓰는 이유가 그 겁니다. 그 견해는 정말 대소 성을 뛰어넘는 그런 높은 고준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행동은 아주 소승불교입니다.
아주 소승입니다. 아무것도, 그것이 어디 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래서 뭐라고요?
“일생에 한 개나 반개를 제도해도 좋다.”이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보탬이 안 되니까요.
잘해야 하나건지고, 아니면 반개건지고, 그 정도 제도하고 끝나는 것이지, 그 고준한 라인을 저 하늘 높이까지 쳐놓고, 거기에 올라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거기에 턱걸이라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래서 “한 개ㆍ반개”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뭡니까?
그물이, 아주 촘촘한 그물입니다. 아주 작은 멸치 한 마리도 놓치지 않으려고, 다 건지려고 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꼭 큰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더라도,
않더라도 조그마한 인연이라도 맺어서 그 인연이 보다 더 성숙되도록, 자꾸 성숙되고 성숙되도록 그렇게 세월을 기다리면서 그들을 이끌고 가는 그런 정신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선불교하고도 아주 엄청난 차이가 있고,
또 소승불교하고도,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큰 차이가 있고 그렇지요. 그래 한국불교가 한 때 선불교가 휩쓸어서,
지금도 선불교가 휩쓸고 있는데요.
그 견해는 고준하나 그 행위에 있어서는, 행위에 있어서는 아주 개인만을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추락했습니다.
그것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이 큰 잘못...
본래는 그렇게 안 되어 있는데, 현실이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이야기...
그것이 諸法理趣分齊를 善知하는 연고며, 그것을 알려면 解義趣無盡藏이 있어야 되겠지요.
의취를 이해하는 무진장을 얻어야 그것이 가능하다.
得無邊悟解無盡藏이니,
가없는 깨달아서 아는 무진장을 얻음이니,
以如虛空智로, 허공과 같은 지혜로써,
通達三世一切法故며, 그랬습니다.
삼세일체 법을 통달한다.
허공과 같은 지혜가 있어야 돼요.
하~~ 어디에도 가림이 있으면 안 된다. 툭 터져야 됩니다. 툭~~ 터져서 하나도 이해 못하는 것이 없는 그런 것이 돼야 삼세일체 법, 과거ㆍ현재ㆍ미래, 예를 들어서 초기불교가 어떻고, 비밀불교가 어떻고, 무슨 근본불교가 어떻고, 기복 불교가 어떻고, 호국불교가 어떻고 그 모든 것들을 환하게 통달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같이 너무 대승불교에 집착하고 있어도 안 되는 겁니다. 대승불교는 그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줄 알아야 그것이 또 대승입니다.
三世一切法을 다 通達하는 연고다. 그랬습니다.
得福德無盡藏이니,
복덕 무진장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복덕 무진장을 얻는다. 福德! 참 좋은 것이지요.
글자만 봐도 벌써 퉁퉁하게 생겼어요.
福자도 그렇고, 德자도 그렇고요. ㅎㅎㅎ허허허
참 福德! ㅎㅎㅎ 좋은 것이지요. 거기다 무진장입니다.
복덕이 무진장입니다.
福德無盡藏을 얻으니
充滿一切諸衆生意하야, 일체중생들의 생각을,
일체중생들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서 뭐든지, 뭐든지 좋아하는 대로 다 가득히 채워주는 겁니다. 채워줘서
不可盡故며, 다함이 없게 한다.
누가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간에 다 오 케이ㆍ오 케이하면서 다 받아 채워주고 다 채워주고 다 원만하게 해준다.
이런 말 한 마디만 하더라도, 보살대승불교ㆍ화엄불교는 이렇게 참 넉넉합니다.
그러니까 대만의 원도선원이라고 하는, 저는 듣도 보도 조그마한 절에 조그마한 스님, 기껏해야 30대 중반비구니 스님이 화엄경을 100만부를 찍어서 전 세계에 깔려고 하는 것이지요. 아~~! 대단하잖아요. 100만부를 찍어서...
1차로 200부가 우리 문수선원에 왔었잖아요.
充滿一切諸衆生意하야 不可盡故라.
다함이 없게 하는 연고다.
그런 마음내서 설사 하필 100만부에 그치겠습니까만,
그렇게 하다보면 1000만부도 할 수가 있고, 70억 인구에 억 만부는 찍어야 되겠지요. 억 만부는요.
得勇猛智覺無盡藏이니,
용맹智覺 무진장을 얻음이니,
勇猛한 智覺! 그랬습니다.
悉能除滅一切衆生의 愚癡?(우치예)故며,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다 없애게 하려면, 아주 용맹한 그런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할 때는 가차 없이해야 됩니다.
인과 같은 것 이야기할 때,
“참~~ 그것, 그것이 다 우리들의 인과다.”이렇게 하고 싶어도, 입에서 나가고 싶어도 그 사람마음 다칠까봐 못 나가는 경우 많지요. 우리불자들은 그런 것이 참, 갈등입니다.
“그것 다 인과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 도리지 그것이 어디멀리 가겠느냐?” 이런 소리하고 싶지만 그 사람마음 다칠까봐 못하지요.
그것 勇猛智覺이 아닙니다.
勇猛智覺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소신이 확실하다면 이야기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 다치게 해줘야 됩니다.
마음에 상처를 내줘야 됩니다. 상처가 나야 고쳐진다고요. 그렇게 해야지, 늘 오냐오냐 해가지고는 이것 고쳐질 까닭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첫째 자신에게 그렇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가르쳐 줄 때도 역시 勇猛智覺이 있어서 그런 이치를, 어리석음을 소멸해줘야 됩니다. 어리석음을 소멸해주면요?
당장에야 섭섭해 하고 다시는 안 본다고 돌아설지언정,
‘그래도 좋다.’ 말입니다.
‘그래도 네가 그런 이치를 제대로 깨달아서 앞으로 지혜롭게 살기만하면 나는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다.’ ←이 소신가지고 가르쳐주면 되거든요. 그렇게 해야 됩니다.
‘다시는 나한테 안 와도 좋다. 그러나 그러한 이치는 네가 분명히 알고 살아라.’그렇게 돼야 됩니다.
그것이 勇猛智覺이 아닐까 싶습니다.
得決定辯才無盡藏이니,
분명한 변재, 확실한 변재, 법을 전할 때 말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말하는 것도요. 저는 가끔 ‘설법도 우리가 오디션을 한 번씩 보는 그런 기회가 있어야 된다.’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저도 늘 이렇게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지만, 고칠 점이 많을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보완할 점도 많을 것이고요.
이것을 우리가 화반탁출해서 적나라하게 탁탁 지적하면서 “아 이것은 스님! 그 손짓 그것 틀렸습니다. 손짓 그것 좀하지 마세요. 보기 싫습니다.” 예를 들어서,
“옷은 왜 그렇게 입고 왔습니까? 옷도 고쳐야합니다.”←이런 소리, 우리가 지적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k팝, 우리가 보면 노래하는 것 보다, 평하는 것이 들을 만하다고요. 아~ 평하는 것! 기가 막히게 합니다. 정말 깊이 있게 하거든요. 거기에 마음이 안 담겨있다느니, 무슨 자연스럽지가 않다느니, 거기는 왜 가성을 그렇게 많이 쓰느냐든지,
우리 설법하는 스님들 보면요? 아직 살아계신 분이라서 누구라고 이름은 지적 못하겠습니다. 가성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가성을 쓸 때는 어느 정도 써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너무 많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법 잘하는 스님인데 그런 경우가 있고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가차 없이...
요즘은 TV나 인터넷 있으니까 당장에 언제든지 띄워놓고, 앉아서 우리가 한 10분 듣고 스톱시키고 평하고, 한 10분 듣고 메모해 놨다가 스톱시키고 평하고, 이렇게 하면 학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설법훈련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이것도, 決定辯才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로 우리가 해석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한 변재! 그러니까 태도라든지, 말씨라든지,
예를 들어서 너무 사투리를 많이 써도 그렇고요.
말의 속도라든지 ←이런 것들, ‘누가 전부 교정을 해줬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演說一切佛平等法하야,
일체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연설해서,
令諸衆生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悉解了故며, 잘 알도록 해준다.
그렇지요. 음식자체도 중요하지만, 음식물을 담고 있는 그릇도 참 중요합니다. 그릇을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음식을 빛나게도 할 수가 있고, 그 음식을 망치게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릇을 잘 써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릇을 잘 쓰면 그 음식보다도 훨씬, 그 음식의 가치보다도 빛나게 할 수가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辯才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得十力無畏無盡藏이니,
열 가지 힘! 그 다음에 4무소외 = 4무외!
이것은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지요.
그것에 대한 무진장을 얻는다. 그래서 10력 존!
부처님을 十力이라고 표현할 경우가 많습니다.
화엄경에는 특히 많습니다.
“부처님ㆍ부처님” 하면 막연하잖아요.
그것을 十力이라고 해버립니다.
“열 가지 힘 가지신 분!”그러면 그냥 그가 누군지 아는 겁니다. 부처라 해도 좋고, 보살이라 해도 좋고 상관없는 것이지요. 부처님을 10력 존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具足一切菩薩所行하야,
일체보살의 소행을 구족해서
以離 垢繒(구증)으로, 때 없는 비단으로써
而繫其頂(이계기정)하야, 그 이마에 두른다.
이것은 최후로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는 그런,
옛날에 관정의식하고 같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왕의 대를 물려받는 그런 의식처럼 부처님 법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실행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마에 두르고
至無障碍一切智故라.
無障碍, 장애 없는 일체지혜에 이르는 연고라.
일체지혜! 평등과 차별을 다 아는 지혜!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존재의 평등성과 차별성! 크게 나누면 이 두 가지거든요. 우리는 지금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은 전부 차별성인데요.
그것 내용을 조금만 들치고 들어가면, 우리는 전부 평등합니다.
제가 늘 확인하고 넘어가잖아요.
진여불성은 평등하다. 어떻게요?
지금 말 듣는 것은 어떤 조건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듣는 겁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그 평등한 실체가 있어서 그 능력으로 듣는다.
그것이 진여불성이다. 그렇게 여러 번 확인했잖아요.
그것이 見性입니다. 見性을 넘어서 用性이라고요.
우리는 성품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아는,
그 양면을 다 아는 그런 지혜가 一切智입니다.
장애 없는一切智에 이르는 연고라.
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一切善根으로
廻向時에, 회향할 때에,
得此十種無盡藏이니라.
이와 같은 열 가지 무진장을 얻느니라. 그랬습니다.
(16) 金剛幢菩薩의 偈頌
가. 廻向할 善根
爾時에 金剛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菩薩成就深心力하야 普於諸法得自在하고
以其勸請隨喜福으로 無碍方便善廻向이로다
金剛幢菩薩의 偈頌(금강당보살게송)
廻向할 善根(회향선근)
爾時에 金剛幢菩薩이
承佛神力하사,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서,
普觀十方하고, 시방을 두루두루 살피고,
而說頌言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시기를,
菩薩成就深心力하야,
보살이 深心力! 깊고 깊은 마음의 힘을 성취해서,
종교적인 어떤 수행, 마음의 이치를 확연히 파헤쳐 놓은 이런 불법 안에서 가능한 이야기지요.
深心力! 깊은 마음의 힘을 성취해서,
普於諸法에 得自在하고,
널리 모든 법에서 자유자재 함을 얻고,
그렇지요. 깊은 마음의 힘이 있어야 제법에 자재한 힘을 얻습니다.
以其勸請隨喜福으로,
보현행원품 나눠드렸는데 그 안에 보현보살의 10대 행원을 주로 설명하잖아요. 거기서 勸請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법륜이라고 할 수가 있고, 그 다음에 隨喜는 수희공덕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10대 행원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두 개만 들었지만 그 속에 10대 행원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勸請. 법문 해주기를 권하는 것.
누구든지 질문하면 질문 받은 사람은 다 좋아합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니까요. 남 가르치기를 좋아하니까요.
가끔, 옛날에 건강할 때 외국여행을 가면, 스님들이 꼭 외국아이나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말을 한 마디라도 가르치려고 합니다. 지는 그 나라말 한 마디도 모르면서...
그 나라말 한 마디라도 들어서 쓰려고 안하고,
우리말 가르치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 참, 사람심리가 그냥 드러납니다.
간 김에 그 나라말 한 마디라도 들어서 외우고 연습을 하고 그러지, 만나면 우리 말 가르쳐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기 인도성지 같은데 가면, 거기의 인도아이들이 우리말 잘해요. 하도 가르쳐서요. 하도 가르쳐서 잘한다고요. 그런데 간 사람은 몇 번을 가도 인도 말 한 마디도 못 배우고 와요. 허허허허허허허 아이고 참, 그러니까 그것 아주 그야말로 아주 얇은 막이 하나 착 가려있는데, 그것을 뚫지를 못해서 우리는 그러는 겁니다. 뒤에 앉아서 가만히 보면 참 기가차지요. ㅎㅎㅎㅎㅎㅎ 기가 차요.
막 가르치려고 합니다.
지가 배우려고는 안하고 가르치려고만 해요.
그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입니다. 예컨대 그 사람이 한 마디라도 더 알고 싶어 하면 가르쳐 주고 싶어서 그 때는 환장하는 것이지요. 그래 勸請이 중요한 겁니다.
자꾸 묻는 것. 알려고 묻는 것. 그 다음에
수희공덕! 이것 제일 어려운 문제지요.
남 잘 하는 것. 특히 친한 도반이 공부를 잘하거나, 뭘 잘하거나 나 보다 더 잘나가거나하면 그만 그 때부터 배 아픕니다. 배가 아파서, 그 아픈 배는 아스피린으로도 못 고치고, 무슨 위장약가지고도 못 고쳐요.
그런 것들을,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해주는 것.
이것 참, 두고두고 우리가 곱씹고ㆍ곱씹어야 할 그런 내용입니다. 이것만 잘 해도...
처음에는 잘 안 되지요.
연습을 해서 나중에는 진심에서 우러나도록,
그렇게 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해주면 그것은
큰 복이 됩니다. 그런 복으로써
無碍方便善廻向이로다.
걸림 없는 방편으로 잘 회향하는 도다.
그것이 바로 선근회향이지요.
남 잘하는 것.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환영해주고, 기뻐해주고, 아주 좋은데 취직했는데 축하한다하고 뭐라도, 조금이라도 실질적으로 표현해주고요.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도 표현해주고요. 진심으로 그렇게 하면
그 보다 더 좋은 선근회향이 없지요.
나. 菩提에 廻向
三世所有諸如來가 嚴淨佛刹遍世間하사
所有功德靡不具하시니 廻向淨刹亦如是로다
三世所有諸佛法을 菩薩皆悉諦思惟하고
以心攝取無有餘하야 如是莊嚴諸佛刹이로다
盡於三世所有劫토록 讚一佛刹諸功德이라도
三世諸劫猶可盡이어니와 佛刹功德無窮盡이로다
如是一切諸佛刹을 菩薩悉見無有餘하야
總以莊嚴一佛土하고 一切佛土悉如是로다
有諸佛子心淸淨하야 悉從如來法化生이라
一切功德莊嚴心이 一切佛刹皆充滿이로다
彼諸菩薩悉具足 無量相好莊嚴身하며
辯才演說遍世間하니 譬如大海無窮盡이로다
菩薩安住諸三昧하야 一切所行皆具足하고
其心淸淨無與等하야 光明普照十方界하니
如是無餘諸佛刹에 此諸菩薩皆充滿이라
未曾憶念聲聞乘하며 亦復不求緣覺道로다
菩提에 廻向(보리회향)
三世所有諸如來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 = 모든 여래가, 嚴淨佛刹遍世間하사,
佛刹,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해서,
한 곳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간을 다 그렇게 장엄해요.
그것이 上求菩提下化衆生입니다.
내 자신의 인격을 자꾸 향상시키고, 따라서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
그것이 嚴淨佛刹遍世間입니다.
所有功德靡不具하시니,
있는바 공덕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시니,
廻向淨刹亦如是로다.
회향으로써 세상을 청정하게 함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런 뜻입니다. 廻向淨刹! 회향으로 세계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렇습니다. 공덕으로써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요.
三世所有諸佛法을
菩薩이 皆悉諦思惟하고,
보살이 다 아주 깊이 사유하고, 그리고는
以心攝取無有餘(이심섭취무유여)하야,
남김없이 마음으로 불법을 攝取해야 됩니다.
以心攝取無有餘! 하나도 남김없이 마음으로 모든 불법을 섭취해서, 불법에 대해서 알 것은 다 알아서
如是莊嚴諸佛刹이로다.
불법으로써 세상을 장엄하는 겁니다.
如是莊嚴諸佛刹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학교도 지어주고, 우물도 파주고,
다 좋은 일이긴 한데요. 불법으로 세상을 장엄해야 됩니다. 如是莊嚴諸佛刹이라 그랬습니다. 여기는,
두 번째 게송 이것이 三世所有諸佛法을 菩薩들이 깊이깊이 사유해요. 깊이깊이 사유해서 모든 불법을 남김없이 내 마음에 다 攝取해요. 다 거둬들여서 그것으로써 세상을,
諸佛刹을 장엄한다. 이 말입니다.
如是莊嚴諸佛刹이로다.
아~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버리면 별것 아닌데요. 불법으로 세상을 장엄한다.
제가 천 번ㆍ만 번 말씀드리지요? 급식 활동 좋다 이 겁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이 카드만한 그런 작은 데라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선인선과 악인악과.
그거라도 딱 써서 주면서 밥 한 그릇, 국수 한 그릇하고 같이 주라 이 겁니다. 제가 늘 하는 소리가 그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불법으로 세상을 그렇게 장엄해야지,
‘야 이것,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 이것 이럴 일이 아니다.
뭔가 열심히 해서 나도 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되겠다.’ 이런 뜨끔한 순간을 제공해주는 것.
이것이 불법으로 세상을 장엄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지 늘...
불교에서 그런 비유를 들면 안 되지만,
“안 되지만” 하면서 또 들지요. 고기를 한 마리 사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 흔히 우리가 세상에서 쓰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그런 비유 드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필이면 고기 잡는 이야기를 합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예컨대 그런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치를 가르쳐주면, 특히 인과의 이치를 가르쳐주면 그 사람이 딱 언젠가 한 번 가슴에 뜨끔한 그런 계기가 있어서 그 때부터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탁~ 자존심 생기는 겁니다.
‘왜 내가 니꺼 먹어? 나도 내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데...’사람이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주더라도 ‘네 것 말고도 내가 실컷 해결 할 수가 있는데...’ 그런 자세가 되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그 두 번째 게송에다 별을 세 개를 쳐놨습니다.
불법으로 세상을 장엄한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盡於三世所有劫토록,
삼세의 모든 겁이 다 하도록,
讚(찬) 一佛刹諸功德이라도,
한 佛刹의 모든 공덕을 찬탄할지라도,
三世諸劫 猶可盡(유가진)이어니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세월들은 오히려 다 할 수가 있지만, 佛刹功德은 無窮盡(궁진)이로다. 그랬습니다.
이 세상 이 대로 아주... 세상이 이러니저러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器世間(기세간)! 이 세상이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좋은 것이고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우리가 깨닫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세 번째 내용은요.
아무리 세월이 많다 하더라도,
그 세월 동안 한 세계의 모든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그것은 세월이 다 할지언정 그 공덕은 다 할 수가 없다. 이런 말입니다. 그 공덕은 다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지요.
이 지구에 몸담고 살면서 거기에 대한 공덕을,
佛刹功德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 공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가 없다고 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如是一切諸佛刹을,
이와 같은 일체 모든 佛刹을 = 세계를
菩薩이 悉見無有餘하야,
보살이 다 남김없이 보아서
總(총) 以莊嚴一佛土하고,
모두 한불토를 장엄하고,
一切佛土도 悉如是로다.
한불토를 장엄하고 또 모든 불토를 역시 그렇게 한다.
내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이것이 좀 더 발전해서 이웃과 사회전체가 다 살기 좋은 불토로 만드는 것! ←이것이 불보살의 꿈이고, 불교의 꿈이지요.
有諸佛子心淸淨하야,
여기에 어떤 불자가 마음이 청정해서
悉從如來法化生이라.
다 여래의 법으로부터 화생한 것이다.
금강경 32분 중에 依法出生分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에 의해서 출생하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지금 여래의 법으로부터 화생한 겁니다.
특히 우리 승려들은, 전문가인 승려들은, 프로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전부 여래 법으로부터 이렇게 지금 화생한 겁니다. 여래 법에 의해서 화생한 겁니다.
依法出生이라. 다시 법에 의해서 출생한 겁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겁니다.
一切功德으로 莊嚴心이,
일체공덕으로 마음을 장엄한 것이,
一切佛刹에 皆充滿이로다.
하~~ 공덕으로써 마음을 장엄했다. 말입니다.
공덕으로써 장엄한 그 마음!
一切佛刹에 다 충만했다. 가득했다. 이 말입니다.
그것 참, 다섯 번째 게송도 아주 좋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항상 되새기고, 또 느끼고 그래야할 내용이지요.
彼諸菩薩悉具足 無量相好莊嚴身하며,
저 모든 보살이 무량 상호를 구족해서, 그 몸을 장엄한다.
그래요. 無量相好, 저절로 상호가 자비로워지고, 선량해지고, 그것이 상호도 자꾸 바뀌는 것이지요.
얼굴이 수술한 것처럼 당장에 그렇게 고쳐지는 것은 아닌데, 풍기는 것은 다릅니다. 틀림없이 풍기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 이야기들 많지요.
어떤 관상가가 어떤 사미를 보고는
“이 아이 여기 놔뒀다가 얼마 안 있다가 송장을 치를 아이다. 그러니 집으로 얼른 보내세요.”
그러니까 그 아이가 가다가, 비가 와서 물에 떠내려가는 개미를 수 100마리ㆍ수 1000마리를, 떠내려가니까 그냥 본심으로, 본심으로 그냥 건져준 겁니다.
그것이 무슨 ‘자비행이다.’이런 생각 없이 그냥 건져준 겁니다.
그리고는 아이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 관상가가 보고는
이 아이는 아주 길상이고 복덕 상이고, 오래살상 이라고,
엊그저께는 금방 죽을 아이라고 했다가, 오늘은 왜 그렇게 다른 말을 하느냐? 얼굴을 수술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 이 겁니다.
금방 그 개미 몇 100마리 생명을 살려준 그것이, 그냥 본심으로 한 것이지만, 저절로 그 아이의 인상에 그 어떤 자비심이 넘치고, 그렇게 풍기는 것이 달라졌다 하는 것이지요.
相好고친 것은 아닙니다.
여기 無量相好를 具足해서 몸을 장엄한다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예요.
辯才演說遍世間하니,
변재로 연설해서 세간에 가득하니,
譬如大海無窮盡이로다.
비유컨대 큰 바다가 다함이 없는 것과 같더라.
우리가 불법을 많이 공부하면 저절로 이야기꺼리가 많고,
특히 화엄경은 그 설명이 참 풍부하고 많잖습니까?
어떤 경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렇게 넉넉하고 풍부하고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익숙하게 공부하다 보면 말거리도 충분히 많아지고, 말도 저절로 잘하게 되고요. 또 따라서 ‘마음도 그렇게 화엄경내용만치나 넉넉해지고 풍부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한 구절ㆍ한 줄 읽은 것이 어디 가겠습니까? 전부 우리 아뢰야식 속에 다 알알이 박히게 되거든요. 이것은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컴퓨터에 올려놓은 것은 지워져요. 지워지는데, 타고난 우리의 藏識은 지우려야 도저히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능력가도 그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은 안 지워져요.
안 지워진다고요.
그것이 얼른얼른 떠오르지 않을 뿐이지, 지워지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엄경공부하면서 “아이구 이것 비슷비슷한 소리, 이것 뭐 자꾸 읽어서 뭐하나?”그 신심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같은 소리라도 자꾸 반복해서 읽음으로 해서 그것이 전부 내 마음 속에 저장이 되어서, 언젠가 그것이 싹을 틔울 때가 있는 것이지요.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요.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이치가 너무나도 확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지요.
菩薩安住諸三昧하야,
보살이 모든 삼매에 안주해서,
一切所行을 皆具足하고,
일체 모든 수행을 다 갖추고,
其心淸淨無與等하야,
그 마음이 아주 뛰어나고, 훌륭하기가 누구하고 더불어 같을 이가 없어요.
光明普照十方界하니,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니,
여기서 三昧라고 했잖아요.
마음이 딱~~ 안정이 돼요. 안정이 되면 아주 明鏡止水가 되어서, 명경지수가 되어서 일체소행을 다 갖추게 됩니다. 明鏡止水가 되면 거기에, 물밑에는 고기가 기어 다니고,
하늘에는 구름이 지나가고, 새가 지나가는 것, 환하게 비치잖아요. 一切所行皆具足입니다. 菩薩이 安住諸三昧입니다.
보살이 삼매에 딱~~ 평정심을 유지하고, 그 평정심을 딱~~ 아주 동요하지 않게 오래가면 저절로 그런 행이 갖춰지는 것이지요. 그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其心淸淨 ←이것이 아주 뛰어난 마음입니다.
이 心淸淨이라고 하는 淸淨은 깨끗하다ㆍ훌륭하다ㆍ뛰어하다ㆍ아주 근사하다ㆍ멋지다ㆍ아주 품위 있다. ←이런 모든 좋은 뜻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淸淨입니다.
또 어떤 때는 텅 비었다는 의미도 되고요.
觀三輪淸淨할 때는 텅 비었다. 하는 그런 의미고요.
더불어 같을 이가 없어서 光明이 普照十方界하니,
그 광명이 시방세계를 널리 두루 비추니,
如是無餘諸佛刹에,
이와 같이 남김 없는 모든 佛刹에,
此諸菩薩皆充滿이라. 모든 보살이 가득히 차요.
모든 보살이 가득히 차야 됩니다.
이것이 화엄경이 바라는 바고, 모든 불보살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未曾憶念聲聞乘하며,
일찍이 성문승을 曾憶하지 아니하며, 또
亦復不求緣覺道로다.
또한 다시 연각도도 구하지 않는다.
제가 앞에서 소승교ㆍ대승교이야기를 했는데요.
보살이 이 세상에 充滿하다고 하는 것은 6바라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고요. 그 다음에 聲聞乘은 뭐지요?
사성제ㆍ팔정도입니다. 4성제ㆍ8정도만 닦는 겁니다.
그래 처음부터 고집멸도 나오지 않고,
‘아~~ 그 고통 좀 떨쳐버렸음 좋겠다.’보살은 그런 소리 안합니다. 고통, 그것 관심 없습니다.
그저 중생이 화두일 뿐이고, 오로지 중생ㆍ중생ㆍ중생.
화엄경 중에서 아주 열심히 독송하는 품을 또 한 가지 소개하자면 정행품입니다. 淨行品!
거기 보면 100 열 가지의 불교의 어떤 명제를 딱~ 걸어놓고, 이 명제! 가장 좋은 내용들이지요. 이것을 완성하려면, 이 100 열 가지의 이 이름을 완성하려면 무엇을 하는 것이 좋으냐? 딱 한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善用其心하라 = 그 마음을 잘 써라.(1권 p,331=36강-1)
그럼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이냐? 해가지고 게송이 쫙~~~ 내려오는 겁니다.
넉자 게송이 끝까지 가버리지요. 淨行品 끝까지요.
그런 내용이니까 제가 정행품ㆍ현수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요. 그것 끝까지 가는데
보살이 집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하고,
보살이 식구들과 모였을 때는 중생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當願衆生ㆍ당원중생. 끝까지 當願衆生!
보살의 화두는 오로지 중생입니다.
보살의 님은 중생입니다.
부처의 님은 중생입니다.
그저 자나 깨나 불보살은 중생ㆍ중생ㆍ중생.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菩薩은 6바라밀. 그것이 뭡니까?
주로 보시부터 나오잖아요. 중생을 위하는 것이지,
지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聲聞乘은 뭡니까?
4성제ㆍ8정도는 지 잘 살자고 하는 겁니다. 지 잘 살자고... 4성제ㆍ8정도는 지 잘 살자고 하는 것이지,
여기도 남을 위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
緣覺道는 뭡니까?
인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
12인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 그것이 緣覺道입니다.
그것도, 제가 인과이야기를 잘하고 하는 것도 여기
緣覺道에 해당되는데요.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좀 바로 세우는 데는 참 좋은 이치입니다.
연연의 도리가,
인과의 법칙이 좋은 이치이기는 한데요.
보살은 그것 관심 없습니다. 그 깊은 병에 앓고 있는 자식이 있는 어머니는요? 자기감기 걸리고, 어디 가다가 좀 다치고, 뭐 상처받고, 한두 끼 굶고 하는 것, 아무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자식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자식이 어떻게 하더라도 병이 낫도록 하고, 자식이 안전하기를 바라고, 자기는 100번 굶어도 상관없으니까 그저 자식ㆍ자식. 그래서 불 속에 뛰어 들어가서 자식은 살리고,
부모는 돌아가신 그런 사례들을 우리가 많이 보지 않습니까? 보살의 마음은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고통이 있다. 인과의 법에 걸린다,
안 걸린다. 그것, 아무 관심 없습니다.
그저 중생만을 위하고, 중생만 바라보고 가는 것이 보살입니다. 차원이 다르잖아요. 천지차이지요.
그저 자나 깨나 자기 안녕만을 도모하는 그런 소승불교하고는 여기는 차원이 달라요.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느냐 못하느냐는 그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 다음 문제라고요.
그래서 모든 법의 分齊 = 한계.
그것을 우리가 잘 알고, 내가 실천하느냐 못하느냐는 그것은 현재 지금 따질 것이 아닌 겁니다.
그것은 그 다음 문제고, 그것은 세월이 가고 그것이 충분히 납득이 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닮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보살은 닮아가게 돼있다.
그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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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82강-3 (2016. 12. 5.)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五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三
四. 十廻向
6. 第五無盡功德藏廻向(2권-175쪽)
(15) 廻向의 果位(2권-183쪽)
(16) 金剛幢菩薩의 偈頌
다. 衆生에게 廻向
라. 利益
마. 菩提의 離相
바. 衆生의 離相
사. 成德의 離相
7.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2권-187쪽)
(1) 菩薩의 衆生救濟
(2) 菩薩의 自在한 功德
그 法의 分齊라고 하는 것, 앞의(82강-1)시간에 있었는데요. 여기 나오니까 菩薩ㆍ聲聞乘ㆍ緣覺道(82강-2)하는 것의 세 가지가 나와 있어서, 그것은 우리 경전을 가지고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곤히 잠든 사람을 두드려 깨워서 성문법은 뭐냐? 연각법은 뭐냐? 보살법은 뭐냐? 이렇게 물어도 언제든지 즉각 그냥 1초도 주저하지 말고, 착 나올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정도는 확실하게 우리가 무장하고 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다. 衆生에게 廻向
菩薩如是心淸淨하야 善根廻向諸群生하고
普欲令其成正道하야 具足了知諸佛法이로다
衆生에게 廻向(중생회향)
菩薩이 如是心淸淨하야,
보살이 이와 같이 마음이 청정해서,
善根廻向諸群生하고,
선근으로 모든 군생들에게 회향하고,
善根廻向이지요. 제가 노래처럼 부르는 선근회향!
普欲令其成正道하야,
널리 그 군생들로 하여금 正道를 이루게 해서,
具足了知諸佛法이로다.
모든 불법을 구족하게 了知하게함이로다.
라. 利益
十方所有衆魔怨을 菩薩威力悉?破하니
勇猛智慧無能勝하야 決定修行究竟法이로다
菩薩以此大願力으로 所有廻向無有碍하야
入於無盡功德藏하니 去來現在常無盡이로다
利益(이익)
十方所有衆 魔怨(마원)을,
시방에 있는 온갖 魔ㆍ怨. 많지요.
부정적인 요소, 장애되는 요소. 하~~ 내 몸이 아파서 장애되기도 하고, 마음에 어떤 상처를 받아서 장애되기도 하고, 외부에 어떤 문제들, 주변의 환경. 이런 것 때문에 뜻하지 않게 장애되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더라도
菩薩威力으로도 悉?破(실최파)하니,
菩薩의 威力! 보살의 위력이 뭡니까? 원력!
굳건한 어떤 願力! 보살심! 그것으로써 다 꺾어버리고
깨뜨려버린다. 그것 뭐 부정적인문제들, 그런 상황들,
우리가 쫓아다니기로 하면 끝도 없습니다.
감기 걸렸다고 거기에 끄달리고, 무슨 소화 안 된다고 끄달리고, 배고프다고 끄달리고, 너무 많이 먹어서 안 된다고 끄달리고, 국수 먹었다고 방선하고 허허허 참, 떡 먹었다고 방선하고, 조기방선하고, 무슨 삭발일이라고 방선하고 ㅎㅎㅎㅎㅎㅎㅎ 빨래한다고 방선하고 ㅎㅎㅎㅎㅎㅎ허허허 그래서 1년 365일 중에 공부하는 날이 반도 안 됩니다.
공부하는 날이 반도 안 돼요. 와~~ 참, 신기하지요? ㅎㅎㅎㅎㅎㅎㅎ신기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신기하다고 밖에ㅎㅎㅎㅎㅎㅎㅎ
그 전에는 그렇게까지...
20년 전만하더라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요.
제가 은해사에서 승가대학원이라고 모처럼 총무원에서 그런 법을 만들어서 ‘전통경학을 좀 부흥시켜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제가 첫 소임을 맡게 됐는데요.
1월 1일도 쉬지 않았습니다. 1월 1일도요.
1월 1일에 쉴 핑계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요?
아무리 음력 설 쇤다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1월 1일인데, 제야의 종을 울리고 야단법석인데 그날도 안 쉬었습니다.
그냥 했습니다. 밀어붙였어요. 그것 밀어붙이면 밀어붙여지는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공부한 것만 남는 거라고요.
공부한 것만 남아요.
그런 것이 다 보살위력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주변에 장애요소. 마군이라는 것이 뭡니까?
마군이니 무슨 원수니 하는 것이, 무슨 원한 관계니 이런 것들이 전부 장애요소를 그냥 일괄 말하는 것입니다.
勇猛智慧無能勝하야,
용맹한 지혜, 능히 그 누구도 이길 이 없어서,
決定修行究竟法이로다.
決定 = 확실하게ㆍ분명하게 究竟法. 최고가는 법을 수행하도다. 究竟法 = 제일가는 법ㆍ화엄 법ㆍ최고 대승불법. 보살대승불교를 수행한다. 決定修行究竟法이로다.
菩薩이 以此大願力으로, 여기 바로 나오네요.
이 대 원력으로써, 큰 원력으로써,
所有廻向無有碍하야,
있는바 회향이 걸림이 없어서,
그렇지요. 원력가지고 밀어붙이는데, 누가 그것 감당하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바른 길이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법이고요. 많은 사람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는 법이기 때문에 그것 통하는 겁니다. 결국은 그것이 승리하게 돼있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원력이 좀 부족하면 주저주저하게 되고, 주저주저하다 보면 이것저것 핑계 댈 걸이가 많이 생깁니다.
入於無盡功德藏하니,
無盡功德藏廻向이잖아요. 그래서 無盡功德藏!
다 함이 없는 공덕의 창고! 공덕의 보물창고에 들어가게 되니, 去來現在常無盡이로다.
과거든ㆍ미래든ㆍ현재든 간에 항상 無盡입니다.
항상 無盡功德藏입니다.
그래 무진장스님은 이 뜻이 좋아서 당신 이름을 그냥
無盡藏ㆍ無盡藏그래버렸잖아요. 우리본성이 원래 無盡藏입니다. 그런데 그 無盡藏한 것을 이렇게,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것을 일깨워야 됩니다.
가만히 사장시켜 놓으면 끝까지 사장된다고요.
자꾸 이렇게 이런 것을 가지고 들쑤셔서 일깨워 놔야지,
그냥두면 안 됩니다. 그래서 보살의 원력이라고 하는 것은 참 중요한 겁니다.
조금 전에 쉬는 시간에 제가 좋은 소식하나 들었는데요.
뉴스 잠깐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서울에서 공부하러 다니는 원욱스님 있잖아요.
자기 절이 반야사인데요. 주지 월급이 150만원이래요.
완성된 화엄경강설 책이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은 한 달에 한 권씩이니까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고요.
책이, 출판이 다 완성되는 것은 내후년, 18년 가을이라야 된다고요. 18년 가을이면 81권이 다 완성되는데요.
그러면 제가 제2차 원력으로 “이것을 한 만부쯤 찍어서 보급하고 싶다.”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또 그런 꿈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책을 찍는 것도 중요하고, 이렇게 강설을 쓰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주려고 보이니까 만부 책을 받을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솔직하게, 받을 사람이 없다고요.
그래서 스님이 한 달에 150만원씩 고스란히 모아서, 아주 절약해서 쓰면서 모아서, “18년 가을에 81권 강설 책이 다 완성이 되면 3000만원을 거기다가 투자를 해서 81권 강설 책을 보급하는데 내가 보태겠다.”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대강 계산해 보니까 만부를 그렇게 하려면 한 60억 정도 들어요. 60억 쯤 가까이 드는데, 3000만원을 그렇게 보시하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여러 사람하고 약속을 해버려야 그것이 지켜지는 겁니다.
박수한 번 쳐주세요.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원욱스님, BBS에서 더러 봤지요?
BBS 아주 스타입니다. 그래 한 1만부 정도는, 아까 이야기한 대만의 견휘스님은 100만부를 보급하겠다고 하는데,
저는 기껏해야 1만부를 보급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우리 글로 읽을 만한 사람들이 만 명이 과연 있을까?’그것도 크게 염려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다 받아 버렸지요.
지금 한 달에 820권을 제가 보급을 하는데요.
820권은 이미 다 받아 버렸고, 또 개인적으로 몇 10부씩ㆍ몇 100부씩 그렇게 사서 보급한 그런 일도 있고,
그래서 한 2ㆍ3000명은 이미 보급이 된 겁니다.
2ㆍ3000명은요. 그럼 나머지는 그만치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스님한테 말하기를 “나 이 보급하는 것, 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줄 사람도 스님이 선별해서, 스님이 선물하고 싶은 도반이나 신도들이나 이 책이 해당되는 사람들 명단을 해가지고 오면, 그 사람들에게 보내도록 그렇게 하자.” 그런 이야기까지 해놨습니다.
스님들도 그런 것 마음속에, 뭐 책 사라는 뜻은 아니고요. ‘스님, 이 사람은 꼭 주고 싶은데 내 형편은 안 됩니다.’
그러면 명단만 가져오시면 제가 보내드리겠습니다.
만부 그것 소진하기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받을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앞으로는 자꾸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2차 꿈으로써 그것이 영글도록 그렇게 할 계획입니다. ‘菩薩이 以大願力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마. 菩提의 離相
菩薩善觀諸行法하야 了達其性不自在하니
旣知諸法性如是일새 不妄取業及果報로다
無有色法無色法하며 亦無有想無無想이라
有法無法皆悉無하니 了知一切無所得이로다
一切諸法因緣生이라 體性非有亦非無니
而於因緣及所起에 畢竟於中無取着이로다
一切衆生語言處가 於中畢竟無所得이라
了知名相皆分別하야 明解諸法悉無我로다
如衆生性本寂滅하야 如是了知一切法하니
三世所攝無有餘라 刹及諸業皆平等이로다
以如是智而廻向에 隨其悟解福業生이나
此諸福相亦如解하니 豈復於中有可得가
如是廻向心無垢하야 永不稱量諸法性하며
了達其性皆非性하야 不住世間亦不出이로다
菩提의 離相(보리이상)
相을 떠난 내용입니다. 相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입장. 그것을 여기는 중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菩薩이
善觀諸行法하야, 모든 행법을 잘 관찰해서
了達其性이 不自在하니,
그 성품이 자유 자재하지 아니함을 了達하니,
旣(기) 知諸法性如是일새.
모든 법의 성품이 이와 같음을 이미 알았을 세.
不妄取業及果報로다.
업과 그 과보를 망령되이 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품과 현상. 그것을 업과 업의 과보는 현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이야기하는데요.
조금 까다로운 내용입니다.
無有色法無色法하며,
색법도 무색법도 없으며,
亦無有想無無想이라.
생각이 있음도 없고 또한 상이 없음도 없음이라.
有法과 無法이 皆悉無하니,
유법도 무법도 전부 다 없으니
了知一切無所得이로다.
일체가 얻을 바 없음을 了知함이로다.
이것도 전부 중도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미 현상은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데, 여기의 내용은
有法도 無法도 다 없다. 라고 하는 말은 중도적으로,
그야말로 ‘無差別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一切無所得을 了知한다.
一切諸法因緣生이라,
모든 법은, 현상은 또 인연으로 생겼어요.
인연의 이치는 불교의 아주 큰 발견인데요.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돼서 생겼느냐? 인연으로 생겼다고 하는 것이 아주 정답입니다.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늘 진화하거든요. 進化! 그러니까 처음에는 미생물이 생기다가 차츰차츰 그것이 진화해서 오늘날 이렇게 사람으로도 생기고, 온갖 천지만물들이 이렇게 생긴 것. 一切法이 인연으로 생긴 겁니다. 그것이 다...
體性이 非有亦非無니,
그런데 그 본성은, 본체의 성품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요.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그 본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연기연멸 하듯이 또 흩어집니다. 인연이 다 하면 흩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정해진 이치입니다.
而於因緣及所起에,
인연과 그리고 그 일어난 바에, 인연으로 인해서 일어난 바에, 畢竟於中無取着이로다.
필경에 그 가운데서 취착할 것이 없더라. 취할 것이 없더라. 그래 공을 설명할 때, 공을 설명할 때 연기이기 때문에,
인연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공이다. 그런 緣起(연기)空이 있고요.
또 그 보다 더 차원이 낮은 것은 분석공이 있습니다.
分析空. 그것은 하나ㆍ하나 떼놓고 보면, 예를 들어서 이 “마이크는 여러 가지 부품으로 조립이 되어서 마이크가 이렇게 형성이 됐다. 그 부품을 다 분해해 놓고 나면 마이크는 없다. 자동차는 2ㆍ3만 개의 부품으로 형성이 됐는데,
그 2ㆍ3만 개의 부품을 다 분해해 놓고 나면 자동차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이것이 分析空입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분석방법이라고요.
인연공이라고, 緣起空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緣覺의 이치로써, 緣覺乘(연각승)의 이치로써 해석해내고, 불교적인 안목으로 해석해내는 겁니다.
그런데 卽空(즉공)! 반야심경은요? 보살의 空입니다.
緣起空도 아니고, 分析空도 아닙니다.
緣起이기 때문에空이다. ←이렇게 반야심경을 해석하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보살의 공은 뭔가 하니 卽空입니다.
그대로 空입니다.
그냥 두고 空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을 해서 이것 분석을 해보니까 空이 아니냐? 이 시계가 실체가 없는 것 아니냐? 자동차가 실체가 없는 것 아니냐?
또 모든 것은 인연으로 됐기 때문에, 우리 육신이,
육신이 전부 인연화합으로 됐기 때문에 결국은 인연이 흩어지면 결국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 이것도 반야심경공은 아닙니다. 그것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 각자 절에서 반야심경 해석할 때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반야심경은 色卽是空이잖아요.
卽空이잖아요. 卽空! 그대로 두고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해가 안 되지요? 分析空도 이해가 됩니다.
‘자동차를 분해해 놓으니까 공으로 돌아가더라.
또 우리 육신은 인연으로 되었으니까 인연이 흩어지면 공으로 돌아가더라.’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고요.
그런데 卽空! “이 몸 이대로 바로 공이다.”하면 그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보살의 차원은 그만치 다릅니다.
그래도 말을 하려면 卽空이라고 이야기를 해야지요.
그래야 반야심경을 그대로, 이해가되든 안 되든 간에 그대로 법을 전하는 것이 되지, 그것을 分析空, 아니면
緣起空,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반야심경을 잘못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 아셔야 됩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卽空입니다.
보살의 안목으로 보면 그냥 그대로 공으로 보는 겁니다.
언제 그것을 인연화합이니까 공이다. 유수한 선사들도 공이야기 많이 하거든요. 공이야기를 안하면 이야깃거리가 없으니까요. 공이야기를 하면 으레 연기 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연기공ㆍ분석공. 이것을 두루 뭉실로 섞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卽空이야기하는 선사, 잘 못 봤어요.
그것이 납득이 되든 안 되든 卽空입니다. 卽空!
그대로 공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그것을 끌어내려서 설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분명히 즉공이라고 했지,
연기공도 아니고, 분석공도 아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一切諸法이 因緣生이라 體性이 非有며 亦非無라.
而於因緣及所起,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바에
畢竟에 於中에서 無取着이라. 잡을 것이 없다.
이것은 연기 쪽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一切衆生語言處가, 일체 중생들의 말이,
於中에 畢竟無所得이라.
말속에 뭐 얻을 것이 있습니까? 그 가운데는 필경에 얻을 바가 없음이라.
了知名相皆分別하야,
名相이 다 分別임을 了知해서, 이름이니 형상이니 하는 것 전부 망상분별ㆍ분별망상으로 우리가 이렇게 얼기설기 엮어서 名相이 다 分別임을 了知해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明解諸法悉無我로다.
諸法이 다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밝게 앎이로다.
그렇습니다. 諸法이 다 無我임을 밝게 안다.
明解한다.
如衆生性本寂滅하야,
중생성이 본래 적멸한 것과 같이
如是 = 이와 같이 了知一切法하니,
중생의 성품이 본래 적멸해요. 일체법도 마찬가지입니다.
三世所攝無有餘라.
그러한 이치로써 3세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그 이치에
攝해 드려요. 그래서
刹及諸業皆平等이로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계와 그리고 우리의 업이 다 평등하다. 그런 뜻입니다.
以如是智而廻向에,
이와 같은 지혜로써 회향함에
隨其悟解하야 福業生이나,
그 悟解를 따라서, 깨달아 앎을 따라서 복업으로 생기나,
그 悟解를 따라서, 복업으로 생기나, 글이 좀 서툴기는 한데요.
以如是智而廻向하나,
이와 같은 지혜로써 회향함에
그 悟解를, 이해함을 따라서 福業이 생기나,
此諸福相은 亦如解하니,
또 이 福相이라고 하는 것, 복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解 = 悟解. 저 앞에 隨其悟解하야 하는 그 解자입니다. 悟解하는 것과 같으니
豈復於中에 有可得가?
어찌 다시 그 가운데 가히 얻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하고는 말이 좀 다른데요.
그것이 悟解, 우리 “이해한다.”고 하는 것, 그리고 “복”이라고 하는 것, “지혜”라고 하는 것,
여섯 번째 게송은 그런 관계를 이렇게 했는데요.
궁극적으로 얻을 것이 없다. 하는 내용입니다.
복도ㆍ이해도, 그 다음에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들이 다
얻을 것이 없다.
如是廻向心無垢하야,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마음에 때가 없어서,
永不稱量(영불칭량) 諸法性하며
영원히 모든 법성을 稱量할 수 없으며,
칭량하지 못하며,
了達其性皆非性하야,
그 성품이 다 성품이 아님을 了達해서,
不住世間亦不出이로다.
세간에 머물지도 아니하고, 또한 벗어나지도 않는 도다.
세간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이것이 세밀하게 분석하면 전부가 중도적으로 이해해야 된다하는 것입니다. 복의 문제도 그렇고, 깨달아 아는 문제도 그렇고 회향의 문제도 그렇고요.
如是廻向心無垢라고했거든요.
그래서 회향의 문제도 우리가 회향ㆍ회향하지만,
궁극적으로 회향도 결과적으로 중도적으로 이해해야 된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분명히 있되 또 없는 면도 있고, 분명히 없되 또한 있는 면도 있는 것. 그 양면을 우리가 같이 이해해야 된다.
우리 육신에서부터 마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사실은 그렇게 존재해요. 사실은 그렇게 존재합니다.
우리가 공부한다고 아~~~ 목을 매고 공부하지만, 공부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 실체를 찾아보고 분석해보고 낱낱이 쪼개봐야 어디 있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영혼을 너무나도 크게 지배하고 있어요.
크게 지배하고 있다고요. 여기에 아주 감동하고 깨달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보면 또 너무나도 확실하게 있는 겁니다. 결정적으로 있는 겁니다.
분명하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분석해보면 실체는 없고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육신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것이 중도성인 겁니다. 존재의 중도성!
중도성을 내면으로 깔고 있으면서 또 천변만화성이 있는 것이지요. 千變萬化性! 천 가지로ㆍ만 가지로 변화해서 나타내는 그런 성질도 또한 함께 가지고 있는 것. 그것입니다.
바. 衆生의 離相
一切所行衆善業을 悉以廻向諸群生호대
莫不了達其眞性하야 所分別皆除遣이로다
所有一切虛妄見을 悉皆棄捨無有餘하며
離諸熱惱恒淸凉하야 住於解脫無碍地로다
衆生의 離相. 상을 떠난 것.
상을 떠난다는 것이 전부 중도를 뜻하는 것이지요.
一切所行衆善業을,
일체소행의 여러 가지 선한 업을,
悉以廻向諸群生호대, 모든 군생들에게 다 회향해요.
莫不了達其眞性하야,
그 참다운 성품을 요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회향하지만 그 참다운 성품을 다 了達해야 돼요.
所分別皆 除遣(제견)이로다.
있는바 분별을 다 날려 보낸다.
차별심ㆍ분별심을 다 날려 보낸다. 그렇게 알면 집착할 것도 없고, 애착할 것도 없고, 잘 했느니ㆍ못했느니 할 것도 없고, 그런 가운데서 보살행을 열심히 발휘하는 것이고요.
所有一切虛妄見을, 있는바 일체 허망한 소견을
悉皆棄捨無有餘(실개기사무유여)하며,
다 버려서, 남김없이 다 버리며,
離諸熱惱恒淸凉하야, 熱惱를,
모든 熱惱. 뜨거운 번뇌를 다 떠나서 항상 시원하게 해서, 住於解脫無碍地로다.
解脫, 걸림 없는 땅에 머물도다.
아주 시원한 게송이네요.
一切虛妄見을 남김없이 다 버려 버리면, 뜨거운 번뇌가 다 사라져요. 그리고 시원해져요. 恒청정해져요.
그것이 해탈 걸림 없는 경계, 解脫감에 젖어있는 것이지요. 解脫感! 참 좋은 것입니다.
스님들 외국여행 할 때, 간혹 俗服도 아니고 僧服도 아닌 中間服입지요. 그러면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해탈 복”이라고 그래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어떤 여행사에 가면 “스님들 이제, 해탈 복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아,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 뭐 뻔히 아는 사실이니까요.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것 그렇게 해탈 복으로 갈아입고 나면 아 정말 해탈감이 느껴집니다.
잠깐이지만, 진짜 해탈감이 느껴진다니까요.
그런데, 우리같이 익숙한 사람은 오히려 구속입니다.
각자 성향 따라서 다른데, 그것이 영 불편하고 부자유하다고요. 그 전에 중국 갔을 때 보니까 여러 가지 모습들이 기고만장하지요. 그럴 때 한 번 씩 어떤 해탈감을 맛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요.
사. 成德의 離相
菩薩不壞一切法하며 亦不滅壞諸法性하고
解了諸法猶如??하야 悉於一切無所着이로다
了知三世諸衆生이 悉從因緣和合起하며
亦知心樂及習氣하야 未曾滅壞一切法이로다
了達業性非是業호대 而亦不違諸法相하며
又亦不壞業果報하야 說諸法性從緣起로다
了知衆生無有生하며 亦無衆生可流轉하니
無實衆生而可說이로대 但依世俗假宣示로다
成德의 離相(위덕이상).
위덕에 대해서도 상 떠나고, 중생으로서도 상 떠나고 전부 상 떠난 이야기입니다.(성음이 위덕이라 하십니다.)
1. 菩薩이 不壞一切法하며,
보살은 일체 법을 不壞. 부정하지 않는다.
壞자는 무너뜨린다니까 부정하지 아니한다.
亦不滅壞諸法性하고,
또 모든 법과 성품을 부정하지도 아니해요.
여기서 법 따로 이야기하고, 뒤에 법성을 이야기했을 때는, 그 때는 법의 성품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法性圓融無二相 할 때 그 때,
法과 性은 그냥 “법성” “법의 성품” 하지 말고,
“법과 성품”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저도 그것이 여러 해 동안 아주 고민이었는데요.
조선 500년에 최고 천재! 설잠 김시습 선생!
그분이 법성게를 해석한데 보니까 아주 똑 떨어지게
法과 性을 나눠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부터는 제가 아~~! 法性圓融無二相 할 때,
法은 현상법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고,
性은 그 현상의 내면에 깔려있는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때 一切法(1.) 하면 현상이고,
法性할 때는, 그 때는 내면에 깔려있는 어떤 실상을 法性이라고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현상도 부정하지 않고,
또 法性도 = 법의 성품도 부정하지 아니하고,
解了諸法 猶如響(유여향)하야,
모든 법을 마치 메아리와 같이 알아서,
悉於一切無所着이로다.
모두 일체에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로다.
了知三世諸衆生이, 3세의 모든 중생들이,
悉從因緣和合起하며,
다 인연화합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了知해서,
그렇지요. 3세 일체의 모든 중생들은 전부 인연화합으로
생겼잖아요. 전부 인연화합으로 여기 이 모습까지 온 겁니다.
처음에 태어날 때는 이렇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자꾸 덕지덕지 인연이 화합되니까 전부가 이 모습까지 온 겁니다. 또 세월이 어느 만치 가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가겠지요. 悉從因緣和合起인 줄 了知하며,
亦知心樂及習氣하야,
마음에 즐겨하는 것하고 또한 우리가 익숙하게 익힌 것 = 習氣. 이것을 또한 알아서,
未曾滅壞一切法이로다.
그것을 알아서 일찍이 일체 법을 부정하지 않는 도다.
일체 법을 부정하지 아니해요.
그렇지요. 자기가 마음에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오랫동안 습관 들어온 그 습기도 우리가 전부 인정해주고, 이해 해줘야 된다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未曾滅壞一切法이라. 일체 법을 부정하지 않는 도다.
了達業性非是業호대,
業性이, 업이 아닌 것을 了達했으되, 업의 성품이,
業性은 업은 아닙니다.
而亦, 그러면서 또한 不違(불위) 諸法相하며,
모든 현상을, 法相 하면 확실하게 현상입니다.
法相을 또한 어기지 아니하며,
又亦不壞業果報하야,
또한 업 과보를 부정하지 아니해요.
不壞 = 무너뜨리지 아니해서,
說諸法性從緣起로다.
모든 법의 성품이 緣起로, 인연으로 쫓아 일어남을 설함이로다. 說諸法性從緣起로다. 아~~ 참! 구구절절이요?
아주 진리! 정말 진정한 참다운 이치들만을 이렇게 그냥 쏟아내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 정말 귀한 진리의 가르침이지요.
了知衆生無有生하며, 중생은 중생이 없으며,
亦無衆生 可流轉(가류전)하니,
또한 중생 가히 流轉함도 없음을 了知하나니,
중생도 없고, 또 중생이 없음도 없고, 중생이 流轉하는 것도 없음을 환히 알아요. 그것 뭐 있는 것이야 더 알기 쉽고요. 없는 내용을 안다. 이 겁니다. 그래서
無實衆生而可說이로대,
실로 중생 가히 이야기 할 것이 없음이로되,
無實衆生而可說, 실로 중생이 가히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了知衆生無有生이니까요. 중생은 중생이 있지 아니하며, 또한 중생이 가히 流轉함도 없음을 了知했기 때문에 실로 중생은 가히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요.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공한 것이고,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생이, 중생을 중생으로 보는 것은 가관이고, 空한 것으로 보는 것은 공관이고, 부처로 보는 것은 중도관이다. 空觀ㆍ假觀ㆍ中道觀. 이것이 모든 존재들을 다보는 그런 세 가지 견해지요.
但依世俗假宣示(단의세속가선시)로다.
다만 세속을 의지해서, 세속적인 그런 관점에 의지해서 거짓으로 宣示. 펼쳐 보이는 일이다.
“중생ㆍ중생” 하지만 보통 우리들 상식에 맞추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들 상식에요.
우리가 본래로, 불교를 알기 이전에, 또 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직은 마음에 썩, 계합이 덜 되었으니까 俗諦.
세속적인 관점에 의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空觀으로 봐도 아니고,
中道觀으로 봐도 그것은 더 아닌 겁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 얼른 납득은 안가지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가 다섯 번째 無盡功德藏廻向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다섯 번째 無盡功德藏廻向입니다.
그 다음에는
7.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인데요.
이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은 10회향 중에 하나의 회향인데 3권 반 이나 됩니다. 세권하고도 또 반이나 됩니다.
나머지 반 권하고 나중에 세권이 더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二十五권인데, 二十五권 중간에서 二十八권 끝까지가 이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입니다.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견고한 일체선근을 수순하는 회향. ←이렇게 할까요?
그것이 좋겠지요?
7.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1) 菩薩의 衆生救濟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고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或爲帝王하야
臨御大國하면 威德廣被하야 名震天下일새
凡諸怨敵이 靡不歸順하며
發號施令에 悉依正法하며
執持一蓋하야 ?蔭萬方하며
周行率土에 所向無碍하며
以離垢繒으로 而繫其頂하며
於法自在하야 見者가 咸服하며 不刑不罰호대
感德從化하며 以四攝法으로 攝諸衆生하며
爲轉輪王하야 一切周給이니라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제육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
菩薩의 衆生救濟(보살중생구제)
佛子야
云何爲菩薩摩訶薩의,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고?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이냐?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이 보살마하살이,
或爲帝王하야, 혹은 제왕이 되어서
臨御大國(임어대국)하면, 큰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威德이 廣被(위덕광피)하야, 그 위덕이 널리 미처요.
미국 대통령쯤 되면 그렇지요?
名震天下(명진천하)일새, 이름이 천하에 떨칠세.
凡諸怨敵(범제원적)이, 모든 원수와 적들이,
靡不歸順하며, 귀순하지 아니함이 없어요.
저~ 기 석유나는 나라가, 그 옆의 나라하고 찌그럭 째그럭 하면 그것 괜히 말린다고 가서 그냥 차지해버리고 그러잖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힘이 세면 그냥 그렇게 돼버립니다. 유엔군으로 와서 지금까지, 벌써 수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대로 있잖아요. 좋은 점도 있고, 그 반대 의미도 있지요. 아무튼 靡不歸順하며,
發號施令(발호시령)에,
號를 발하고 영을 내림에,
悉依正法하며, 모두 정법을 의지하며,
그렇지요. 왕이 모든 존재의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알아서 그 이치대로, 참다운 이치대로 법을 그렇게 시행하면 좀 좋겠습니까? 큰 법은 놔두고라도, 인과의 이치라도 알아서 그렇게 국가법을 시행한다면 얼마나 아주 좋은 나라가 되겠습니까?
執持一蓋(집지일개)하야,
한 일산을 떡~~ 잡아서, 한 개의 일산이라고 하는 것이 큰 법이겠지요.
?蔭萬方(단음만방)하며, 만방에 드리우며,
周行率土(주행솔토)에,
率土 = 온 국토를 두루 돌아다님에,
所向無碍하며, 향하는 바가 걸림이 없으며,
周行率土에 所向無碍라고 하는 것은,
진나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자기가 통일한 국가가 얼마나 되는가하고 돌아보려고 큰 수레를 만듭니다.
그 당시 만든 수레가 엄청 큽니다. 지금 아마 한4차선 내지 5차선정도 되는 길을 다듬어야 지나갈 수 있는 그런 큰 수레를 만들어서 진시황이 천하를, 周遊天下입니다.
자기가 통일한 국가를 다 보러 가다가 여행 중에 죽잖아요. 진시황도 그렇게 여행 중에...
불사 초를 구하려고 하고,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53세에 죽었나요? 그렇지요. 그것은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周行率土라. 온 국토를 주행함에
所向無碍라. 그야말로 향하는 바가 걸림이 없어요.
以離垢繒(이이구증)으로, 때를 여읜 비단으로써
而繫其頂(이계기정)하며, 머리에 동여매며.
於法에 自在하야, 법에 대해서 자유자재해서
見者가 咸服(함복)하며,
보는 사람마다 전부 조복을 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진시황이 횡행천하 할 때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아요.
不刑不罰(불형불벌)호대,
형도 주지 아니하고, 벌도 주지 아니하되,
感德從化(감덕종화)하며,
덕에 감동하고 그 교화를 따르게 되며,
이것은 말하자면 바람직한 왕이, 천자가 이렇게 천하를 다스리는, 보살대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이야기인데요.
모습이 마치 진시황이 횡행천하 할 때의 모습을 보는 것하고 똑 같아서 제가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以四攝法으로 攝諸衆生하며,
사섭법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포섭하며,
爲轉輪王하야, 전륜왕이 되어서,
一切周給(일체주급)이니라.
모든 곳에ㆍ모든 사람ㆍ모든 지방에 두루두루 다 나누어서 미친다.
사섭법이 뭐지요?
보시ㆍ애어ㆍ이행ㆍ동사. 중생을 교화하는 데는, 그것이 아주 최고지요. 보시! 무조건 나눠주고 배려해주고요.
애어! 사랑스러운 말, 귀에 거슬리지 않는 좋은 말.
이행! 이롭게만 하는 겁니다. 무조건 사람들에게 이롭게만 합니다. 그래도 안 되는 사람에게는 같이 놀아주는 것이지요. 같이 일해주고 같이 놀아주고요. 그것이 동사!
6바라밀ㆍ4무량심ㆍ4섭법. ←이것이 보살이 늘 지니고 다녀야할 아주 필살의 무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6바라밀과 4무량심과 4섭법, ←이것은 아주 항상 보살이 지니고 다니는 무기다. 그 무기만 잘 장착하고 있으면 어디든지 걸림 없이 다닐 수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2) 菩薩의 自在한 功德
菩薩摩訶薩이 安住如是自在功德에
有大眷屬하야 不可沮壞하며
離衆過失하야 見者無厭하며
福德莊嚴으로 相好圓滿하야 形體支分이
均調具足하며 獲那羅延堅固之身하며
大力成就하야 無能屈伏하며 得淸淨業하며
離諸業障하니라
菩薩의 自在한 功德(보살자재공덕)
菩薩摩訶薩이
安住如是自在功德에,
이와 같은 자재한 공덕에 安住함에,
有大眷屬(유대권속)하야, 큰 권속들이 있어서,
不可沮壞(불가저괴)하며,
아무도 그 권속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離衆過失(이중과실)하야,
여러 가지 허물이 없어서, 過失을 떠나서
見者無厭(견자무염)하며,
보는 사람마다 아주 좋아라고 싫어할 줄 모르며,
福德莊嚴으로써 相好가 圓滿해요.
어디에 가든지 보살마하살은 늘 그렇습니다.
相好가 圓滿해서
形體支分(형체지분)이 均調具足(균조구족)하며,
形體와, 몸 생김생김이라든지 팔 다리라든지 이런 것들이
골고루 균형 잘 잡히게 구족했으며,
獲那羅延堅固之身(획나라연견고지신)하며,
那羅延, 나라연도 견고한 것을 말하지요.
아주 견고한 몸을 얻으며,
大力成就하야, 큰 힘을 성취해서,
無能을 屈伏(무능굴복)하며,
능히 굴복할 사람이 없으며,
得淸淨業하며, 청정한 업을 얻어서
離諸業障하니라. 모든 장애를 떠나느니라.
그 다음에는 보시 이야기가 아주 길어지는데요.
여기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이라고하는 것이 전부가 보시하는 내용입니다. 뒤에 가면 60종의 별별 보시가 나오는데요. 우리가 상상도 못할 그런 보시바라밀이 소개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왜 이렇게 보시가 같은 뜻인데도,
자꾸 이렇게 비슷비슷하게 반복하는가?
반복해서 읽으니까 달라져요. 감동이 달라져요.
그것 아주 중요하다고요.
관세음보살을 한 번 외우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 외우는 것하고, 10분 외우는 것하고 다르고,
한 시간 외우는 것하고, 두 시간 외우는 것하고 그 기도하는 사람의 가슴은 달라요. 그 느낌이 달라요.
그것이 신앙심이 깊어지는 일이지요.
기도라는 것은 그런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른 것 다 기대할 것은 아니고요.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 그것은 뭐, 신앙심이 깊어지면 그 어떤 세속적인 성취보다도 천배ㆍ만 배 나은 것이니까요.
사실 그래서 “기도ㆍ기도”하는 겁니다. 그 속뜻은 그래요.
티벳 스님들이나 티벳 불자들보면 신앙심이 얼마나 지극 합니까? 그러니까, 신앙심이 지극하니까 마음이 부자인겁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지독한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은 하나도 해결 안 해줍니다.
그것은 따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인과의 법칙에 근거하면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주 옴마니반메훔을 끊임없이 돌리면서 신앙심이 깊어지고ㆍ깊어지고, 다져지고ㆍ또 다져짐으로 해서, 그 신심에 의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겁니다.
그렇게 어렵게 가난하게 살아도 더 바랄 것이 없고,
행복감은 넘쳐나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의 공덕은 바로 그거예요.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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