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시간이 흐른 글이지만 한국회화사에서 워낙 중요하고 문제점이 많은 그림이라서 올립니다. 그림을 읽는 능력의 향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졸겠습니다.
균와아집도.hwp
김홍도와 떠나는 그림여행
화가들의 풍류
2013년 7월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강세황 탄신 300주년 기념 특별전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2013. 6. 25~8. 25)에서 충격적인 그림 한 점을 만났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다. 조선후기 화단을 주름잡던 쟁쟁한 화가들을 한 그림 속에 한꺼번에 등장한다.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당시의 충격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한국회화사를 전공한 나로서는 소름이 기치는 일이었다.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1763년 51살 지본담채 112.5×59.8cm 국립중앙박물관

倚几彈琴者 豹菴也 傍坐之兒 金德亨也 含煙袋而側坐者 玄齋也 緇巾而對棋局者 毫生也 對毫生而圍棋者 秋溪也 隅坐而觀棋者 煙客 凭几而欹坐者 筠窩 對筠窩而吹簫者 金弘道 畵人物者 亦弘道 而畵松石者 卽玄齋也 豹菴布置之 毫生渲染之 所會之所 乃筠窩也
癸未四月旬日 煙客錄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강세황)이다.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심사정)이다. 緇巾을 쓰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호생관(최북)이다. 호생관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는 사람은 추계이다. 구석에 앉아 바둑 두는 것을 보는 사람은 연객(허필)이다.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균와이다. 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사람은 홍도(김홍도)이다.
인물을 그린 사람은 홍도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바로 현재이다. 표암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하고, 호생관은 색을 입혔다. 모임의 장소는 곧 균와이다.
계미년(1763) 4월 10일 연객이 적다.
균와아집은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풍류가 아닌가 쉽다. 이 모임에 참석한 8인인데, 그 가운데 강세황(1713~1791), 심사정(1707~1769), 최북(1712~1786 무렵), 허필(1709~1761), 김덕형(1750무렵~?), 그리고 김홍도(1745~1806 무렵) 등 조선후기의 쟁쟁한 화가들이 참석했고, 그들의 면면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三園三齋 중 단원 김홍도와 현재 심사정이 보이고, 조선 후기 藝林의 總帥인 姜世晃이 참여했으며, 崔北과 許佖도 한국회화사의 한 자락을 장식하는 화가들이다. 이 모임을 가진 1763년에는 강세황이 51세, 심사정 57세, 최북 52세, 허필 55세인데, 김홍도는 19세이고, 김덕형은 13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김홍도와 김덕형은 아마 스승인 강세황의 배려로 쟁쟁한 화가들의 모임에 찬가할 수 잇는 기회를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김홍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아집과 풍류가 잦아지는 것으로 볼 때, 이 모임이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風流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통이다. 통일신라의 학자 최치원은 유교, 불교, 선교가 통합된 것이 풍류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모임이 많다. 무슨 향우회로부터 시작하여 무슨 동우회, 무슨 동창회 등, 어느 모임에 소속되지 않으면 유독 불안해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외국에 사는 교포사회에서도 웬 모임이 그리도 많다. 최소한 교회라도 나가야 안심이 되는 것 같다. 소통을 통해 자신을 사회적 관게를 설정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도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소통하는 방편이다.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며 바둑을 두는 것도 바로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유행한 雅集에는 궁극적으로 소통을 통한 관계 설정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이 갈려 있다.
이 모임은 크게 두 구성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강세황과 김홍도의 합주다. 강세황이 거문고를 타고 김홍도가 퉁소를 불고 잇는 음악의 풍류이다. 이를 균와(신광익?)는 안석에 기대어 듣고 있고 심사정은 담배를 피우며 감상하고 있으며, 어린 김덕형은 강세황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다른 하나는 崔北과 秋溪(미상)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다. 허필은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다.

안석에 기대어 음악을 듣고 있는 균와
이 모임의 주인공은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筠窩이다. 균와가 누구인지가 이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인데,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세로 보아 참석자 가운데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균와라는 호를 가진 인물로 申光翼이 있다. 이 무렵 신광익은 제주목사를 마치고 경상도 좌병사로 부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17세?) 그런데 신광익이 강세황을 비롯한 다른 화가들과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는다.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강세황과 곁에 앉은 아이 김덕형
모임의 주인인 筠窩 다음으로 주목을 끄는 인물은 강세황이다. 여기 모인 화가들이 김홍도와 김덕형만 빼고는 모두 강세황보다 나이가 많다. 그렇지만, 이들은 강세황과 다른 이들과의 친분관계나 후에 이루어진 화단에서의 위상으로 보아 실제적인 모임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강세황은 安山에서 조선후기 화단을 주도하는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고, 이들이 결국 정조대에 쟁쟁한 화가로 활동했으며, 강세황은 예림의 총수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있던 해에 강세황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의 둘째 아들 완(俒)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영조가 강세황의 아버지 강현(姜鋧)의 지극한 충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홍봉한(洪鳳漢)이 “강세황이 글을 잘 짓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다.”고 아뢰자, “말세에 인심이 좋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천한 기술을 가졌다 하여 업신여기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다시 하지 말라.”라고 답했다. 강세황이 이 말씀을 듣고 놀라며 땅에 엎드려 울부짖어 사흘 동안 눈물을 흘렸는데, 이 때문에 눈이 부어올랐다. 이때부터 화필을 태워버리고 다시 그리지 않기로 맹세했다. 영조의 서화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강세황 畵歷에 큰 변화를 일으킨 絶筆사건이다. 균와아집은 이와 같은 해에 일어났는데, 절필사건은 모임 뒤의 일일 것이다.
강세황 옆에 바짝 붙어있는 김덕형은 이때 13세 전후의 어린아이다.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강세황 옆에 바짝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강세황이 특별히 아끼는 제자인 듯 싶다. 이 그림으로 보면, 김덕형은 김홍도 다음으로 촉망받는 차기 주자로 보이지만, 실제 전하는 작품이 없고 이후 활약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李德懋의 글 가운데 각리(閣吏) 김덕형(金德亨)의 梅竹圖와 風菊圖에 대한 글 가운데 “玄翁(심사정)은 세상 뜨고 豹翁(강세황)은 늙어가니, 화가 중 인문은 오직 이 사람뿐이로세”라는 구절이 전한다.
<靑莊館全書> 제12권 ‘雅亭遺稿’ 四, 詩 4
閣吏 金德亨의 梅竹圖와 風菊圖 두 폭의 畫題
乾聲暗馥筆尖盈 마른 댓잎 소리 그윽한 매화 향기 붓끝에 가득한데
个字飜飜女字橫 个字形으로 나부끼고 女字形으로 비꼈네
安得呀光千尺絹 연마된 천 척 비단 어이 얻어서
鮒魚橋畔訪金生 부어교 가에 김생 찾아갈 건가
烏桕蕭蕭寫意新 오구나무 쓸쓸하여 그린 뜻 새로운데
又添疏菊頓精神 성긴 국화 피어나니 정신이 쇄락하네
豹翁衰晩玄翁去 현옹은 세상 뜨고 표옹은 늙어가니
畫派人間祇此人 화가의 인물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로세

담뱃대를 물고 있는 심사정
얼굴과 상체가 많이 탈락되었지만, 간신히 남아 있는 형상의 자세로 보아 이 모임에서 최고의 연장자이거나 淡窩(洪啓禧?, 1703-1771)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인다. 원래 謙齋 鄭敾의 제자로서 老論 쪽의 인맥이었지만, 안산의 南人 쪽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다. 그것은 조부 심익창(沈益昌)이 延仍君(이후 英祖)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집안이 대역죄인의 자손으로 전락한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沈師正은 이 그림의 근경과 원경의 산수배경을 그렸다. 절벽과 작은 폭포 앞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춤을 추듯 쌍을 이루고 있고, 화면 아래에는 바위들이 적절하게 막아 서 있다. 남종화의 대가다운 진솔한 화풍은 이 모임의 격조를 높이는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퉁소를 부는 김홍도
허필의 발문에 弘道라고 표기될 만큼 어린 김홍도는 열아홉 살로 이 모임에 참석하여 퉁소를 불고 이 그림의 인물을 맡아 그릴 만큼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스승인 강세황의 특별한 배려로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1763년에 강세황은 안산에 머물렀던 시기다. 김홍도가 21세 때인 1765년 영조가 경현당에 수작했던 행사를 그린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를 그렸으니, 화원이 되기 이전 안산에서 강세황 밑에서 그림공부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김홍도는 젊은 시절 경험한 아집과 풍류를 통해 평생 참가하고 그림으로 표현한 아집도의 바탕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모임은 김홍도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김덕형의 얼굴모습과 비슷한 어린아이 얼굴들. 김홍도 <씨름>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가 그린 인물표현을 보면, 강약의 리듬이 크지 않은 비교적 가는 선으로 옷의 구김과 주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얼굴 부분은 많이 손상되어 파악하기 힘들지만, 갓과 상투를 비롯한 머리의 표현을 보면 세밀한 묘사로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김덕형의 얼굴, 그 가운데 둥근 코의 얼굴을 보면 김홍도 풍속화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아집도의 인물표현이 이후 풍속화의 근간이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홍도, <자화상> 종이에 채색, 27.5×43.0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그동안 김홍도의 진작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 있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自畵像’이다. 자화상이란 이름은 유홍준 교수가 1997년 조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작품에 대한 오주석은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균와아집도’에서 김홍도가 옷을 그린 묘법을 보면, 충분히 김홍도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가늘과 단단한 필선에 약간 각이 지게 표현하고 옷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서 19세에 그린 ‘균와아집도’와 유사한 필치를 엿볼 수 있다. 유홍준 교수는 이 그림이 김홍도의 30대 후반의 모습이라 했는데, 描法이나 얼굴 보습으로 보아 김홍도의 20대 모습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담뱃대를 물고 바둑을 두는 최북, 마주앉아 바둗 두는 추계, 훈수를 두는 허필
바둑판에 담뱃대를 물고 있는 최북이 눈에 띈다. 최북은 강세황을 비롯하여 申光洙, 申光河 등 남인 사람들과 交遊했다. 신광하는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이었다네만, 술 석 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다네”라고 읊은 바 있다. 최북이 외눈이 된 사연은 유명하다. 귀인에게서 그림 요청을 받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진척이 되지 않았다. 이에 주문자가 위협을 가하려고 하자 분기탱천한 그는 남이 나를 저버림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며 자신의 한 눈을 찔러 멀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그림에서 최북은 뒷모습을 그렸고, 왼쪽 눈은 멀쩡하다. 그의 앞에서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는 이는 秋溪인데 추계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제 남은 이는 바둑판에 훈수를 두는 허필이다. 방건을 쓴 허필은 왼쪽 무릎을 올리고 앉아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몰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1761년으로 알려졌는데, 이 그림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763년에 그려졌고 허필이 제발까지 썼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허필의 몰년이 1763년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담배 피우기를 워낙 좋아해서 호를 담배 피는 나그네란 뜻의 煙客이라고 불렀다. 이 그림에서는 허필이 아니라 최북이 담뱃대를 물고 있다.
이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안산이란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곳은 실학자인 성호 이익을 필두로 조선 후기에는 남인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다. 영조시대(1724~1776) 노론이 세상을 휘두르는 정국에 그들은 지금의 야당과 같은 존재로 한성에 가까운 안산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황에 대한 아픔을 나누고 재기를 노려야 했다. 정조시대(1776~1800)가 되면서 이들은 드디어 조정에서 자신들의 뜻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채제공, 안정복, 강세황 등 안산과 인연이 있는 남인들이 대거 등용된 것이다. 김홍도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는 화원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균와아집에 참여했던 화가들은 강세황을 중심으로 정조시대 화단을 주도한 차기의 인물들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정조가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지만, 김홍도, 강세황, 김덕형은 정조시대에 맹활약을 했다. 그런 점에서 균와아집은 단순한 화가들의 친목모임이 아니라 영조시대를 마무리하고 정조시대를 대비하는, 화가들의 결집을 위한 풍류모임으로 해석된다.
(정병모, 경주대학교 교수, 한국회화사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