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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속한 사람
로마서 8: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부활주일 후 50일째 되는 날, 바로 오순절 큰 명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이미 예고된 일이었으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성령강림으로 예수님의 부활이후에도 숨어 지내던 제자들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예루살렘 성 내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성령강림은 복음이 다른 차원으로 비약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겨우 120명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전 세계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한 결과 종교지도가 바뀌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다. 성령강림 사건으로 당시 절대적인 유대교 신앙과 억압받고 대립하던 그리스도 신앙이 이젠 세상을 향해 확산되었다.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지극히 영적인 종교이다. 지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저마다 영적인 성품인 ‘영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신령한’, ‘영적 깊이’, ‘영적 능력’이란 낱말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신비함을 드러내는 영적인 속살이다.
도대체 성령은 누구신가?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성령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자주 성령의 충만, 성령의 열매를 말한다.
마틴 루터가 쓴 <소요리문답>에 보면 사도신경에서 고백한 “성령을 믿사오며”에 대해 이렇게 풀어서 가르친다. 여기에서 ‘소’(小)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교리교재란 의미다.
“나는 자신의 이성이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을 수 있거나 그에게 갈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그의 은혜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올바른 믿음 가운데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시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1)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약속의 성취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고별하시면서 약속하셨다.
“내가... 가면 내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평화를 나누시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거듭 다짐하셨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3대 감사절이다.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에는 순례객들로 가득하였다. 요즘 이슬람의 라마단 절기인데, 그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20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들 중 지극히 적은 소수 중의 소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성령강림 직후 모두가 놀라 어안이 벙벙한 그 때에 베드로는 상황을 궁금해 하는 무리를 향해 진실을 전해야 하였다. 베드로는 영적 현상에 대해 이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는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1:17).
그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에서 구원하실 주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란 사실을 설교할 때에, 그 자리에서 듣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자를 죽이는 무서운 범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찍이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 주실 것’(공동번역)이라고 하셨다.
성령강림 사건을 성경의 예언을 풀어서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은 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고, 그들 중에 삼천 명이 회개하였다. 그들은 마음이 찔렸고, 자신을 향해 죄를 선고하였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성령의 임재는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뼈에 못이 박히고 살이 찢겨 비참하게 죽임당한 한 젊은 유대인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눈 뜨게 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120명의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주었고, 이러한 믿음의 대전환을 가져온 것이 바로 성령이었다.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도 같은 성령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또 마틴 루터의 고백처럼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내 지식이나, 상식 때문이 아니다. 내 이성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 때문이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2)
복음 중의 복음인 로마서 8장은 성령의 효과를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
성령강림은 새로운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동안 율법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보다, 그 죄의 엄중함과 심판의 두려움을 알게 했는데, 이제 성령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문제로부터 해결책을 주셨다고 한다. 비로소 예수님이 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선명한 확신이 생겼다. 이러한 믿음을 주신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의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죄 많은 인생들이 새로운 삶을 살 방법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성령은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사건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여기에서 ‘의’는 윤리적 차원에서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차원이 다르다. 로마서에서 ‘의’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구원이란 의미에서 의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의는 회개한 죄인에게 죄 없음을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 은총은 의로운 사람이 아닌 죄인을 위한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조치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에게 사면의 길이 열렸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덕분이다. 마침내 인간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신다.
율법으로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의 ‘통 큰’ 사랑으로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모든 인간은 자기 범죄로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의 조치로 말끔하게 구원의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도록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의인을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다.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예를 든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타락한 인간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에게 적대감을 품고, 하나님의 법을 부정하는 생활을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한 마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과 결합하는 삶, 이것이 영적인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면 그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육신의 생각은 불신앙이다. 그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의 일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때문에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된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늘 민감하게 분별하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면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누리며 산다.
3)
그런데 현대인은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적다. 문명의 혜택을 받을수록 반비례한다. 그 현실과 결과는 어떤가? 내 안에 영성이 약해지면서 점점 물성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물질과 욕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믿음이나 영성마저 상업화된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세상의 힘의 논리, 부의 논리로 신앙의 대상을 찾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방식과 다른 영적인 삶, 물질적 논리가 아닌 비움과 내려놓음이란 다른 차원의 삶에 목말라하여 선택한 것이다. 물론 신앙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세상적 방식을 못 버린 사람도 참 많다.
유혹과 시험, 죄 성과 죄의 법을 이길 방도는 무엇인가? ‘죄의 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법’이다. 사람 속에 여전히 남아 위력을 발휘하는 ‘죄의 법’, 그 것을 이길 수 있는 법은 ‘성령의 법’ 밖에 없다. 성령을 따라 살면 ‘죄의 법’을 이긴다.
영적 건강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과 직결된다. 성령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으로 일하신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성령님을 더 친밀히, 더 충만히 사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모습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적 부흥’을 소망한다. 영적 파워를 갖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말한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니키 킴벌을 말한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결하게 되어, 그 거룩한 삶의 에너지가 사회적 의를 이루며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통로가 됨을 의미한다.”
영적인 건강은 개인 뿐 아니라 사회를 온전하게 한다. 이것인 진정한 내 영적인 삶의 부흥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사모하며,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찾기를 원한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나는 자신의 이성이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을 수 있거나 주님에게 갈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그의 은혜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올바른 믿음 가운데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시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마틴 루터, ‘소요리문답’).
그리스도인으로서 깊고, 지혜롭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일곱 은사’(롬 12:6-8)로 교회 안과 밖에서 사랑의 사역에 참여하며, ‘성령의 아홉 열매’(갈 5:22-23)를 맺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나간다.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회복하라. 늘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라. 성령의 도우심을 빌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성령의 선물을 다른 사람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 세상과 역사 가운데 힘써 드러내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 모두 날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