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 스님 漢巖(1876 ~ 1951)】
「한국 불교의 청정한 계율을 지킨 조계종 초대 종정, 대표적 고승」
한암스님(1876~1951)은 한국 근현대 불교의 기틀을 다지고 청정한 계율을 지켜낸 대한불교조계종의 초대 종정이자 대표적인 고승이다. 경허스님의 제자이자 탄허스님의 스승으로,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승려의 본분을 지키며 평생을 수행에만 전념하여 오늘날까지도 ‘스님들의 사표(스승)’로 추앙받고 있다.
▣ 주요 생애와 수행 가풍
1. 출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 1897년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했다.
2. 선풍 중흥: 한국 근대 선불교의 거장인 경허스님 밑에서 참선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만공·수월스님 등과 함께 근세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3. 선교겸수(禪敎兼修): 참선(선)뿐만 아니라 경전 공부(교)와 계율을 모두 중시하는 엄격한 수
행으로 가풍을 이끌었다. 그의 문하에서는 효봉, 청담, 탄허 등 조계종을 이끈 수많은 거장들이
배출되었다.
▣ 27년간의 동구불출 (東口不出)
한암스님은 1926년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간 이후, 1951년 열반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번도
산문(절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거나
종무 관료들의 요청이 있을 때에도, 오직 오대산에만 머무르며 수행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여
권력과 명예를 멀리하는 청빈한 삶을 몸소 보여주었다.
▣ 일제강점기 총독과의 일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총독부는 조선불교를 왜곡하기 위해 스님들에게 고기를 먹고 결혼을
장려하는 왜색불교(대처육식)를 강요했다. 한암스님은 이를 철저히 거부, 청정한 계율을
수호했다.
미나미 지로 총독 등이 만남을 요청하거나 불렀을 때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겠다는 서원을
이유로 당당히 거절했으며, 정무총감에게 바른 마음을 가지라는 뜻의 ‘정심(正心)’을 써주어
일제 관료들조차 감복하게 만들었다.
▣ 목숨으로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 (한국전쟁)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51년 1·4 후퇴 당시 일어났다. 국군은 작전상 오대산의 사찰들이 적의
보급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절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이 상원사를 불태
우려 들이닥치자, 한암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정갈하게 수하고 법당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장교에게 말했다.
"절을 태우려거든 나와 함께 태우시오. 나는 부처님의 제자이니 절과 함께 가겠소."
스님의 서릿발 같은 기개와 목숨을 건 다짐에 감동한 군 장교는 결국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태우는 것으로 작전을 대신했다. 이 덕분에 국보인 상원사 동종을 비롯한 수많은
소중한 문화재가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 좌탈입망 (坐脫立亡)
상원사를 지켜낸 직후인 1951년 1월, 한암스님은 아침 공양을 마친 뒤 가부좌를 튼 채로 고요
히 앉아서 열반(사망)에 들었다. 15일 동안 단식좌선을 한 뒤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떠난
스님의 마지막 수행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봄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
노라."
서울 봉은사 조실 자리를 내려놓고 오대산 상원사로 향하며 남긴 말입니다. 겉치레와 말만 앞서
는 불교를 경계하고, 깊은 산중에서 묵묵히 참된 수행에 정진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있다.
"소유가 간소할수록 생활과 망상이 간단해져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누릴 수 있다."
평생 옷 한 벌, 발우 하나만을 소유하며 검소함을 실천했던 스님의 무소유 철학이 담긴 말씀이다.
첫댓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봄 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_한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