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국 金元國(1903 - 1928)】 "1925년 정의부 6중대 2소대장"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 출신이다. 이명으로 김창림(金昌林)·김창식(金昌植)을 사용하였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1903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독립운동 당시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현(通化縣)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에 거주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중국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부터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로 참의부(參議部)·신민부(新民府)와 함께 3부로 통칭되었고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의성단(義成團)·광정단(匡正團)·노동친목회·고본계(固本契)·대한독립군단·학우회 등이 망라되어 결성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 이탁(李沰), 총무위원장 김이대(金履大), 군사위원장 지청천(池靑天), 재무위원장 오동진(吳東振), 민사위원장 김호(金虎), 법무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외무감 현익철(玄益哲)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군사조직으로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고, 8개 중대와 민경대(民警隊), 헌병대를 두었다.
1925년부터 의용군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류허현(柳河縣)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나 점차 퉁화현으로까지 활동지역을 넓혀나갔다. 1926년 9월 5일에는 퉁화현 콰이다마오쯔에 거주하며 밀정으로 활동하던 한의사 신한철(申漢哲)의 처단을 주도하였다. 신한철은 독립운동 세력의 동향을 정탐하여 일제 경찰에 밀고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의 체포에 적극 협력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정의부에서는 몇 차례 경고를 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이라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백성의 돈만 빼앗아 간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정의부에 대한 의무 이행을 방해하였으며, 상조계(相助契)라는 친일조직을 만들어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현익철의 지시로 신한철 처단 명령이 내려지자, 동지 서상화(徐尙華) 등와 함께 신한철의 집을 급습하여 가족을 포함하여 총 5명을 처단하고 1명에게 중상을 가하였다.
1926년 9월 14일 대원 서상진(徐尙眞)·김용호(金龍浩)·심영준(沈永俊) 등과 함께 중국 보갑대(保甲隊)에 붙잡혔다. 퉁화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후 펑텐(奉天)일본총영사관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후 다롄지방법원(大連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이유로 사형을 받자 항소하여 다롄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복심법원에서도 역시 사형을 받았다. 1928년 11월 9일 오전 10시 뤼순(旅順)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도 교수대(絞首臺) 위에서 앙천묵도(仰天黙禱)하며 태연스럽게 사망하였다. 절명(絶命) 시각은 9시 13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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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 사형 집행 보도(『동아일보』 1928. 11. 20)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