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커즈와일의『특이점이 온다』는 인류의 미래 진화를 과학기술적 논증을 바탕으로 예측한 책이다. 그의 유토피아, 과학천국에서 인류의 문제는 거의 모두 낙관적으로 해결가능하다. 그러나 거침없이 질주하는 커즈와일의 무한 상상력이 끝내 부닥치게 되는 마지막 수수께끼가 있다. 바로 마음/의식/영혼의 문제다. 필자는『특이점이 온다』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제7장「나는 특이점주의자입니다」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예측하기에, 커즈와일의 다음 탐구주제 혹은 궁극적 탐구대상은 마음/의식/영혼의 수수께끼가 되리라고 본다. 이것은 커즈와일의 탐구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귀결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철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심리학자/신경과학자/물리학자/과학저술가들까지도 인간 최후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주의 궁극적 수수께끼는 바로 마음/의식/영혼의 문제라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커즈와일 또한 제7장「나는 특이점주의자입니다」에서 마음/의식/영혼의 문제를 다루면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즉 물리적/객관적/3인칭적인 과학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확신에 찬 어조로 미래의 해결책과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예측한다. 그러나 관념적/주관적/1인칭적인 마음/의식/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의 역할이 핵심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 궁극적 해명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신비주의적 견해를 내비친다. 이런 사실은 커즈와일의 확고한 과학주의에 비춰볼 때, 사뭇 모순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적 과학의 전도사로 자타의 공인을 받는 커즈와일이 왜 마음/의식/영혼의 문제에서만은 그토록 (얼핏) 모순된 견해를 보이는 것일까? 과연 커즈와일은 정말 마음/의식/영혼의 수수께끼를 과학으로 풀 수 없다고 보는 것일까?
Ray Kurzweil
이 글은 의식의 본질에 대한 간략한 원론적 탐구를 밑바탕에 깔면서 전개할 것이다. 다음에 커즈와일이 내보이는 의식에 대한 견해와 나아가서 그의 마음철학(= 심리철학, philosophy of mind)은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낼 것이다. 그 다음에 원론적인 의식의 본질/속성/존재론 따위와 커즈와일의 생각을 비교분석하여, 커즈와일의 마음철학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평가하고, 그 한계점을 끄집어내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 레이 커즈와일은 "의식의 주관성subjectivity"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 레이 커즈와일은 "개인 동일성(identity,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 레이 커즈와일은 "의식의 문제"와 "지능intelligence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의식 문제의 핵심은 결국 "존재론적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의식의 존재론적 지위를 어떻게 보는가?
◎ 레이 커즈와일의 의식 개념을 분석해, 그가 철학적으로 다소 애매하고 허술한 의식 개념을 구사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의 의식 논의에서 드러나는 개념적 착종은 무엇인가?
◎ 레이 커즈와일은 독특한 패턴pattern 개념을 구사하고 있다. "나는 패턴에 바탕을 둔 철학을 믿는다. 나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영속하는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화하는 패턴이고, 스스로의 패턴 진화 과정에 영향력을 갖는다. 지식 또한 하나의 패턴이다. 정보와는 다르다." (번역서 536쪽)
과연 패턴의 철학적 개념은 무엇인가? 그 과학적 개념은? 커즈와일의 패턴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해, 그것이 커즈와일의 논증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그가 패턴 개념을 마음/의식/영혼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살펴본다. 과연 커즈와일의 패턴 개념은 마음/의식/영혼의 문제에 어떤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일까?
◎ 레이 커즈와일은 "미래의 기계들도 감정적 체험과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 그리곤 세 가지 가능한 답변 혹은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뇌 역분석이 2020년대 말쯤 완성되면, 의식을 지닌 비생물학적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 실제 인간의 패턴을 적절한 비생물학적 사고 기판에 업로드하는 것이다.
㉢ 인간 자신이 생물학적 존재에서 비생물학적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과연 이런 과학소설같은 얘기가 실현가능할 것인가? 위 세 가지의 흥미만만점 논제를 사고실험을 동원해 논증하거나 논박한다.
Raymond Kurzweil at Stanford University in 2006
커즈와일의 마음철학 분석은 당연히 그의 원저와 번역서를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번역서만 가지고 커즈와일의 마음철학을 정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약간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커즈와일은 마음/의식/영혼을 논하면서 마음철학자 존 설John Searle과 데이빗(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의 이론과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고, 마음철학 논쟁에서 통용되는 여러 가지 개념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번역들은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적/대중적 상식의 전달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라도, 엄밀한 철학적 논증을 전개해 나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번역이라면, 그것은 모자라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잘못 소개된 개념이나 왜곡된 이론에 감염된 사실을 모른 채 어떤 철학적 논증을 구축해 나간다면, 그래서 헛논증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면, 그것처럼 허무하고 낭패스러운 일이 어딨겠는가! 따라서 철학적 논증/논쟁을 하든, 번역작업을 하든, 관련 이론과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첫걸음 중의 첫걸음이리라.
이와 같은 까닭으로 먼저 커즈와일의 마음철학을 분석/이해/평가/논박하기에 앞서 번역문의 애매모호함을 걷어내고 잘못을 바로잡아 보기로 한다. 아래에 든 원문과 번역문은 커즈와일의 마음철학의 핵심적 측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글귀다. 동시에 마음철학과 뇌신경과학의 알짜 개념들이 몰려 있어, 그에 대한 번역의 충실도를 가늠하는 데도 안성맞춤이다. (원문과 번역문에서 굵은 글자는 인용자 강조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필자의 번역 분석/비판의 대상이다.)
ⓐ (원서 385쪽 / 번역서 535-536쪽)
When people speak of consciousness they often slip into considerations of behavioral and neurologic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for example, whether or not an entity can be self-reflective). But these are third-person (objective) issues and do not represent what David Chalmers calls the "hard question" of consciousness: how can matter (the brain) lead to something as apprently immaterial as consciousness?
사람들은 의식의 문제를 논하다 말고 의식을 드러내는 행동이나 신경학적 현상 이야기로 새곤 한다(가령 어떤 개체가 자기성찰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 등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3자 시점의(객관적인) 주제다. 데이비드 차머스가 의식의 '고난도 문제'라고 불렀던 것과는 다른 문제다. 진정한 고난도 문제는 이것이다. 어떻게 하찮은 물질(뇌)이 의식처럼 분명히 비물질적인 것을 낳을 수 있는가?
ⓑ (원서 385쪽 / 번역서 536쪽)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an entity is conscious is apparent only to itself. The difference between neurologic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such as intelligent behavior) and the ontological reality of consciousness is the difference between objective and subjective reality. That's why we can't propose an objective consciousness detector without philosophical assumptions built into it.
개체가 의식을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체 자신만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의식을 드러내는 신경학적 현상(가령 지적 행동)과 의식의 존재론적 실체 사이에는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현실이라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그 때문에 아무런 철학적 가정도 깔지 않고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의식을 탐지할 수 있는 탐지기는 만들 수 없다.
① neurological/neurobiologic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번역의 문제
이것은 영미권 마음철학계/신경과학계에서 거의 18년쯤 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이론적/학술적 용어다. 위 개념이 의식의 과학에서 본격적인 논의의 장으로 들어오게 된 때는, 1990년 프랜시스 크릭과 크리스토프 코흐가 함께「신경생물학적 의식 이론을 향하여Towards a neurobiological theory of consciousness」(Seminars in the Neurosciences Vol. 2: 263-275)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의식이라는 유서 깊은 관념(철학)적 주제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서설을 주창하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각종 마음철학/신경과학 문헌에서 단일한 개념으로, 중심적 탐구대상으로 수없이 등장하는 용어다. 바로 "의식의 신경상관자"라는 전문용어다. 그런데 번역자 분들은『특이점이 온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전문용어를 단일한 개념적 용어로 번역하지 않고 상식적 의미로 풀어서 번역하였다. 물론 전문용어를 풀어서 번역하면 안 된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철학적/과학적 논증의 문맥 안에서 핵심 개념어는 단일한 용어로 통일성을 유지하며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욱이 여기서 "의식의 신경상관자(= 신경생물학적 상관자)"의 경우는 커즈와일의 의식 논의에서 하나의 논증 분석항으로 쓰였기 때문에 단일한 개념어로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상식적인 의미로 풀어서 번역할 경우 자칫하면 엄밀성에서 떨어지는 번역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번역자 분들은 "의식의 신경상관자"를 엄밀한 의미에서 약간 빗나가게 잘못 번역하고 있다.
Francis Harry Compton Crick
즉 "의식을 드러내는 신경학적 현상"으로 번역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neurobiological correlates는 신경학적 현상이 아니다. 신경상관자로서 물질적/물리적 실체를 가리킨다. (현상과 실체의 차이는 마음철학/신경과학적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뇌신경이 내보이는 어떤 현상이 아니라 뇌 속의 구체적인 신경세포들이나 신경세포의 집합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한 의식 경험을 일으키는(= 실현하는) 특정한 신경세포들 혹은 신경세포의 집합을 의식의 신경상관자neurologic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라고 할 수 있다. (상관자의 수식어로 다음의 어느것을 써도 뜻은 비슷하다. neurological ≒ neurobiological ≒ neuronal ≒ neural ≒ 신경학적인, 신경생물학적인, 신경적인, 신경의.)
의식의 신경상관자에 관해 철학적/신경과학적으로 논하는 논문은 데이빗 차머스의「의식의 신경상관자란 무엇인가?」를 참고하라. [David J. Chalmers (2000). What is a neural correlate of consciousness? In Thomas Metzinger (ed.) 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Empirical and Conceptual Questions. The MIT Press.] 신경상관자의 신경생물학적 개념에 대해선 크리스토프 코흐 (2004) 영문판을 보아라.
Crick with Christof Koch
이것이 한 개념으로서 중요한 까닭 중 하나는 현대의 마음철학자/신경과학자들 가운데 특정한 의식 경험이 특정한 의식의 신경상관자와 같다고 주장하는 이론가(동일론자)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에 그렇게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어떤 번역가들은 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를 "의식의 신경상관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다지 좋은 번역이 아니다. "의식의 신경상관자"가 더 정확하고 더 바람직한 번역이다. 왜냐 하면, 여기서 correlate(s) 자체는 중립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도 관념적인 것도 심리적인 것도 아니랄 수 있다. 예컨대 만약 한 골수hardcore 심신동일론자가 의식상태와 신경상태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면, 의식의 신경상관자뿐만 아니라 신경상태의 의식상관자, 즉 conscious correlate(s) of neural state라는 짝개념이 충분히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의식상관자를 의식상관물로 부르면 대척점 양단에 있는 개념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진다. 따라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해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 (『의식의 탐구』와『뇌와 내부세계』는 neural/neuron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를 의식의 신경 상관물로 번역했다. 그밖에 많은 마음철학/신경과학적인 중요 개념을 부적절하게 번역하고 있다.)
또한 철학뿐만 아니라 신경과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에서도 어떤 기본적 구성요소나 특정한 속성을 지닌 단일대상을 명명할 때 "~~자"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자, 전자, 중성자, 양성자, 소립자, 양자, 분자 따위가 다 그런 예다. 필자 생각에는, 대개 뉴런으로 음역하거나 "신경원" "신경세포"로 번역하는 neuron도 그 어원으로 보나 신경의 기본적 구성요소라는 뜻으로 보나, "신경자"로 번역해 불렀어야 했고 또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 (이런 유형의 전문용어 번역에서 많은 한국의 학자/번역가는 일관성이 거의 없다. 습관적으로 문제 투성이의 옛번역방식/번역어를 아무런 비판없이 뒤따르고 있다.)
요컨대, 어떤 기본적 구성요소나 고유한 단일속성을 지닌 대상을 명명하거나 번역할 때, "~~물"보다는 "~~자"가 그런 것들의 유형화와 자리매김에도 훨씬 좋으며, 요즘처럼 다학제적 연구가 활성화하는 때에 온갖 학문들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중립성/적용성을 확보하는 데도 훨씬 좋다는 얘기다.
② reality 번역의 문제
제7장에서 reality의 정확한 번역은 매우 중요하다. 대체로 reality는 그 문맥에 따라, 실체(성)―실재(성)―실제(성)―현실(성) 따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제7장에서 커즈와일이 reality를 쓰는 문맥은 거의 의식의 존재론적 지위 혹은 실체적 지위를 다루는 철학적 문맥이다. 여기서 이런 존재론적 의미를 놓치거나 애매하게 처리하는 번역은『특이점이 온다』에서 커즈와일의 의식 논의가 지닌 철학적 중요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번역자 분들의 reality 독해와 번역은 정말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대중 독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그까짓 것"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뜻은 어느 정도 통하니까. 그러나 원전을 확인하지 않는 상태에서 번역본의 내용만 가지고는 의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커즈와일이 내세우는 견해에 대해 철학적으로 일관적이면서도 매우 정치한 논의/논박을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 하면 논의의 핵심이자 논증의 분석항을 이루는 동일한 중요 개념을 여기서 이렇게 저기서 저렇게 어긋 번역하게 되면 전체적인 맥락과 충돌을 일으켜 원저자의 진술 내용의 일관성을 흩뜨리고, 반론을 준비하던 독자에게 엉뚱한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원저자가 핵심적으로 구사하는 개념들의 정확한 철학적 정체성(!)은 이럴 때 지켜줘야 하리라. 다음을 보자.
The difference between neurologic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such as intelligent behavior) and the ontological reality of consciousness is the difference between objective and subjective reality.
René Descartes (1596-1650)
위 문장은 데카르트의 마음몸이원론(= 심신이원론 = mind-body dualism)을 현대적 용어로 재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여기서 reality는 데카르트의 (심신) 실체substance 개념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앞엣것도 뒤엣것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통일해서 "실체"라고 번역해야 한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거칠게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연장실체res extensa ≒ 신경상관자neurological correlates ≒ 객관적 실체objective reality가 성립하고, 데카르트의 사유실체res cogitans ≒ 의식의 존재론적 실체ontological reality of consciousness ≒ 주관적 실체subjective reality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동일한 개념 reality를 각각 실체와 현실로 달리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철학적 엄밀성이 사라진다. 게다가 엉뚱한 의미로 오해할 여지가 있는 모자라는 번역이다. (이 책은 초중고생도 많이 읽을 터인데, 철학적 훈련이 덜된 그들이 헤맬 생각을 한번 해보라. 따라서 옮긴이주가 필요하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 단락과 ⓑ 단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괄호의 위치는 잘못됐다. 잘못된 괄호 위치 때문에 초중고생뿐만 아니라 일부 성인 독자들까지도 독해하는 데 헤맬 가능성이 크다.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화살표 문장이 고친 문장이다.)
사람들은 의식의 문제를 논하다 말고 의식을 드러내는 행동이나 신경학적 현상 이야기로 새곤 한다(가령 어떤 개체가 자기성찰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 등이다).
→ 사람들은 의식의 문제를 논하다 말고(가령 어떤 개체가 자기반성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논하다 말고) 그 의식의 행동상관자나 신경상관자 이야기로 새곤 한다.
의식을 드러내는 신경학적 현상(가령 지적 행동)
→ 의식의(가령 지적 행동의) 신경상관자
③ hard question(=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 번역의 문제
번역자 분들은 이것을 의식의 "고난도 문제"라고 번역했다. 뭐 문제 없다. 그러나, 하지만, 문제 있다. 왜 굳이 "고난도"라는 한자어를 써야 하는가? 그냥 "어려운 문제"라고 쉬운 말로 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평범한 번역 문제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이 개념은 아시겠지만, easy questions(= easy problems, 복수임에 주의하라), 즉 "쉬운 문제"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호주의 철학자 데이빗 차머스가 처음으로 의식의 수수께끼와 관련하여 정식화한 개념들이다. 이에 대한 내용을 필자가 쓴 다른 글에서 토 따위만 바꾸고 그대로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The Hidden Mind
영미권의 마음철학자(= 심리철학자philosophers of mind), 인지과학자, 신경과학자 사이에 통용되는 의식의 개념에는 크게 현상적 의식phenomenal consciousness과 정보접근 의식access consciousness이라는 두 가지 하위 개념이 있다. (차머스는 정보접근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 심리학적 의식psychological consciousness을 대신 사용한다). 현상적 의식은 의식의 질적qualitative 측면을 가리킨다. 예컨대, 우리가 붉은 장미꽃을 볼 때 느끼는 장미꽃의 그 붉은 느낌이 의식의 질적/현상적/경험적인 측면이다. 정보접근 의식은 의식의 심리학적 측면을 가리킨다. 예컨대 기억, 학습, 판단, 의사결정, 계획 따위와 관련된 개념으로서, 한 유기체(인간이나 다른 동물, 혹은 외계 생물체)가 각종 환경적 자극과 내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그 감각정보들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쓸 때 발휘하는 기능적 측면의 의식을 말한다. 호주의 철학자 데이빗 차머스David J. Chalmers에 따르면, 의식의 문제에는 쉬운 문제easy problems와 어려운 문제hard problem가 있는데, 의식의 심리학적/기능적 측면을 해명하는 것이 쉬운 문제이고, 의식의 현상적/경험적 측면을 해명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의식의 쉬운 문제는 뇌신경과학, 인지과학, 물리학 따위의 경험과학을 동원하여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반면에,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경험과학으로는 풀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의식의 수수께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쉬운 문제라고 해서 결코 진짜 쉽다는 뜻은 아니고 어려운 문제에 견줘 상대적으로 쉽다는 뜻이다.
[참고: 의식의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선 다음을 보라. David J. Chalmers (1995). The puzzle of conscious experience. Scientific American (December 1995): 62-68, David J. Chalmers (1996). The Conscious Mind: In Search of a Fundamental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그리고 현상적 의식과 정보접근 의식에 대한 개념적 분석과 그 두 개념에 대한 혼동 비판은 다음을 보라. Ned Block (1995). On a confusion about a function of consciousness. Th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8(2): 227-247. There is a more up to date version of this paper in Ned Block, Owen Flanagan, Güven Güzeldere eds. (1997). The Nature of Consciousness: Philosophical Debates. The MIT Press. Also, this paper will be included in his now-in-press book called: Consciousness, Function, and Representation: Collected Papers, Volume 1. The MIT Press.]
David John Chalmers
그런데 이 쉬운/어려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엮여 있는, 글자 그대로 "더 어려운 문제harder problem of consciousness라는 개념이 따로 또 있다. 이것은 마음철학계의 일급철학자 가운데 하나인 네드 블락Ned Block이 제기한 개념이다. [Ned Block (2002). The harder problem of consciousness. The Journal of Philosophy 99(8): 1-35. Also the slightly expanded and revised verson of this paper forthcoming in his now-in-press book, Consciousness, Function, and Representation. The MIT Press.]
Ned Joel Block
그렇다면, 번역자 분들은 이 harder problem of consciousnes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앞의 의식의 "고난도 문제"와 짝짜꿍이 되려면 "고고난도 문제" 혹은 "초고난도 문제"라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easy problems는 고난도 문제와 짝짜꿍이 되려면 "저난도 문제"쯤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한문투로 통일해야 하니까)? 허나, 저난도니 고난도니 고고난도니 초고난도니 말짱 다 필요없다. 그 영어말에 딱 들어맞는 우리말이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글자 그대로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 "더 어려운 문제"로 짝을 맞추면 문제 끝이다. 우리도 철학용어나 전문학술용어를 바로 우리 곁의 쉽고 흔한 낱말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 쉽고 친숙한 철학용어의 깊이와 넓이는 철학을 직접 하면서 천착하고 확장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쉽고 친숙한 낱말로 된 철학 개념 속에도 웅숭깊고 드넓은 의미가 깃드리라. 철학용어를 쉽고 흔해 빠진 낱말로 만든다고 해서 철학이 철학다움을 잃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미권을 비롯한 서구 철학자들은 아주 쉬운 일상용어로 (어려운) 철학적 개념어를 만드는 예가 매우 흔하다. 그걸 들여와 번역했던 많은 한국의 옛번역가는 현학스럽게시리 난해한 한문투로 한껏 베베 꼬아 심오하디 심오한 "고난도" 철학 번역어를 양산하고 남발했다. 독일이나 영국이나 미국 학자들은 아주 쉬운 일상 용어로 철학을 하는데, 한국의 학자들은 그걸 들여와 비틀어서 "초고난도 고담준론"을 설파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우리 번역계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학풍 번역, 괜히 무게잡는 번역, "구태의연"한 번역, 학문 독점 욕망이 은근히 스민 어려운 한문투 일색 번역 따위를 언젠가 한번 신랄하게 비판할 생각이다.)
④ 제7장에서 identity를 꼭 "정체성"이라고 번역해야 하는가?
제7장의 주제는 마음과 의식이다. 커즈와일은 마음/의식을 논하면서, 존 설John Searle이나 데이빗 차머스(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의 마음철학 이론을 끌어들인다. 따라서 커즈와일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것이다. 혹은 철학적 논의에 과학적 논의를, 혹은 과학적 논의에 철학적 논의를 겹친 것이랄 수 있다. 그리고 영문판 원전을 보건대, 제7장에 나오는 identity는 마음철학에서 논하는 마음몸동일론(= 심신동일론mind-body identity theory)이나 개인 동일성personal identity 논제와 직결된 개념이다. 따라서 커즈와일의 문맥에서도 정체성보다 동일성이 그 원개념의 의미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identity를 국내 인문학자들이 습관적으로/무반성적으로/추종적으로 아무데서나 "정체성"이라고 번역하여, 원래의 "동일성"을 밀어내고 그 원개념을 변질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정신분석학 분야에서는 그런 대로 어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미권은 물론 유럽의 마음철학자/신경과학자들 중 상당수가 프로이트류 정신분석학에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이다. 이같은 마음철학/신경과학/인지과학적 문맥의 identity를 습관화한 느낌 때문에 아무데서나 무조건 정체성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철학 = 심리철학 = philosophy of mind. 이것을 마음의 철학이라 하지 않고 마음철학이라고 하나의 복합어로 붙여 써서 번역어를 확정하는 까닭은 그 개념의 이론적 단일성과 그 학문분과의 독자성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대개의 경우, 복합적 학술용어는 우리 한국어에서 통일성/단일성/유형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가독성/판독성 따위를 높이기 위해 붙여 쓰는 게 일일이 띄어 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서 마음몸동일론/심신동일론/마음몸이원론/심신이원론/신경상관자 따위와 다른 많은 용어를 붙여서 썼다.)
⑤ first-/third-person 번역의 문제
이 용어도 철학적 문맥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전문용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시종일관 통일성을 지켜 번역해야 한다. 번역자 분들은 곳곳에서 아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물론 그 기본 의미는 대체로 유지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데없는 의미의 편차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 알다시피 "일인칭"과 "삼인칭"이라는 널리 공인된 번역어를 쓰면 아무 문제가 없다. 뭐하러 최선을 버리고 차선을 택하는가? 더군다나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번역자 분들이 "일인칭/삼인칭"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한 사례들은 원래의 문맥에서 약간씩 빗나가는 번역이다. 다음을 보라.
ⓒ (원서 379쪽 / 번역서 527쪽)
As I mentioned in chapter 1, we are dealing with the difference between third-person "objective" experience, which is the basis of science, and first-person "subjective" experience, which is a synonym for consciousness.
제3자의 '객관적' 체험이란 과학의 기반이고, 나 자신의 '주관적' 체험이란 의식의 다른 말인데, 둘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 (원서 385쪽 / 번역서 535쪽)
It is not a third-person question.
이것은 제3자의 질문이 될 수 없다.
ⓒ에서 제3자의 '객관적' 체험과 나 자신의 '주관적' 체험이라는 번역은 엄밀한 의미에서 원뜻을 조금 벗어나는 일관성 없는 번역이다. 첫째 호응관계를 이루지 않아 좋은 번역이 되지 못한다. 둘째 제3자의 객관적 체험이란 과학의 기반이다라는 주장(과 번역)은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옳지 않은 얘기다. 본래의 뜻은 제3자의 체험이 아니라,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경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experience를 체험이라고 옮기는 것은 여기서 조금 부적절하다. 커즈와일의 문맥에서 그리고 마음철학/신경과학적 문맥에서 experience는 심적/감각적/신체적 경험을 모두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 embodied experience를 대개 체화된 경험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때는 체험이라는 개념이 딱 들어맞는다. 그밖에는 가장 일반적인이고 포괄적인 번역어인 경험이라는 번역어를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셋째, 첫째와 둘째 이유가 아니더라도, 뭐하러 최선책이 있는데 굳이 차선책을 택하는가? 그냥 원뜻 그대로 1인칭/3인칭 시점이라고 번역하면 아무 문제 없다. 그리고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As I mentioned in chapter 1은 번역에서 빼먹어도 되는가?
ⓓ의 번역은 옳지 않다. 원저의 문맥 속에서는 번역과는 다르게 제3자의 질문이 충분히 될 수 있다. 단지 3인칭 시점의 질문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⑥ 그밖의 사소한 오역들 혹은 미흡한 번역들 (제7장)
◎ (원서 378쪽 / 번역서 524쪽)
you can only measure correlates of it, such as behavior
물론 주관적 체험을 드러내는 어떤 것, 가령 행동을 측정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 앞에서 자세히 분석했듯이, 이 경우도 풀어서 번역하는 것보다 원래의 단일 개념어로 옮기는 것이 훨씬 좋다. 체험도 경험으로 바꿔야 더 알맞다.
◎ (원서 380쪽 / 번역서 527쪽)
some of the neurological correlates of emotion and other aspects of experience
신경학적으로 유발된 정서 등 다른 체험적 요소
→ 완전한 오역이다. "감정과 기타 여러 경험의 신경상관자"쯤으로 번역해야 한다. 참고로, 마음철학 문맥에서 경험experience은 그 단독으로도 의식 경험conscious experience이나 현상적 경험phenomenal exper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 의미의 체험하고는 많이 다르다.
◎ (원서 380쪽 / 번역서 528 쪽)
conscious experience 의식적 체험, subjective experience 주관적 체험
→ 앞에서 말했듯이 "의식(적) 경험", "주관적 경험"이 더 적절한 번역이다. 체험과 경험은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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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레이 커즈와일 / 김명남, 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 (2005/2007).『특이점이 온다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김영사.
마크 솜즈, 올리버 턴불 / 김종주 옮김 (2002/2005).『뇌와 내부세계 ― 신경 정신분석학 입문』. 하나의학사.
크리스토프 코흐 / 김미선 옮김 (2004/2006).『의식의 탐구 ― 신경생물학적 접근』. 시그마프레스.
Block, Ned J. (2002). The harder problem of consciousness. The Journal of Philosophy 99(8): 1-35. Also the slightly expanded and revised verson of this paper forthcoming in his now-in-press book, Consciousness, Function, and Representation. The MIT Press.
Block, Ned J. (1995). On a confusion about a function of consciousness. The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8(2): 227-247. Also, this paper will be included in his now-in-press book called: Consciousness, Function, and Representation: Collected Papers, Volume 1. The MIT Press.
Block, Ned J., Owen Flanagan, Güven Güzeldere eds. (1997). The Nature of Consciousness: Philosophical Debates. The MIT Press.
Chalmers, David J. (2000). What is a neural correlate of consciousness? In Thomas Metzinger (ed.) 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Empirical and Conceptual Questions. The MIT Press.
Chalmers, David J. (1996). The Conscious Mind: In Search of a Fundamental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Chalmers, David J. (1995). The puzzle of conscious experience. Scientific American (December 1995): 62-68.
Crick, Francis, Christof Koch (1990). Towards a neurobiological theory of consciousness. Seminars in the Neurosciences Vol. 2: 263-275.
Koch, Christof (2004). The Quest for Consciousness: A Neurobiological Approach. Roberts & Company Publishers.
Kurzweil, Ray (2005). The Singulariy is Near: When Humans Transcend Biology. Viking.
Scientific American (ed.) (2002). Scientific American Explores the Hidden Mind: A Collector's Edition.
Solms, Mark, Oliver Turnbull (2002). The Brain and the Inner World: An Introduction to the Neuroscience of Subjective Experience. Other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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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계속 증보할 예정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