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떠날 생각은 언제나 설렌다. 일상적인 매너리즘의 탁류에서 나를 건져내어 새롭게 일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나날이 사고가 굳어져가는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제는 나이가 든다는 표현조차도 왠지 부끄럽기만 한데 <나이 듬>이 풍기는 성숙함이라던가 여유보다는 뭔지 모를 위기감 때문이리라. 그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매사에 방어적인 자세로 나가게 되고 그것은 고집이나 노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더 많은 설렘과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힘이 들수록 좋을 것이다. 일기도 사납고 예정되지 않은 일들이 별안간 나타나 눈을 부릅뜨고 위협을 해도 좋을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다던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론가 공간이동을 한 듯 이사를 갔다던지 문이 닫혀있는 경우는 꼭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이상의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더구나 이번 괴산답사는 늘 접하던 불교문화뿐 아니라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천주교 문화와 조선 후기와 근대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 더욱 그러했다. 괴산이라면 어감부터 괴상하게 들릴뿐더러 한반도에서 비교적 오지라는 것이 내가 가진 지식의 전부였다. 작년, 건축 공부를 하는 큰 아이가 괴산 오지를 다니면서 집 고치기 등을 하는데 괴산 군수님이 오셨더라는 정도가 내가 체감할 수 있는 괴산의 전부였으므로 카페에 올라온 괴산의 답사자료를 읽고 약간의 긴장도 했던 게 사실이다.
긴장은 답사 당일도 계속되었다. 하귀자님이 자리 값이라고 봉투를 건네시고 차를 내리실 정도로 정원 초과를 보이면서 차는 출발하였다. 딴 볼일이 더 중요한데 잘 되었다는 말씀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웃으며 상대에게 부담을 덜어주시는 배려와 여유는 늘 본받아야할 점으로 새겨진다. 새로운 얼굴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마련되고 서울에서, 혹은 가까이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신입으로 들어오거나 하루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는 구름도 적당하고 날씨는 쾌청하다. 4대강 사업을 하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는데 하늘의 구름의 층위가 참으로 다양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4월 스페인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구름을 보았던가. 세상의 구름은 모두 스페인에 모인 것 같았다. 올리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지는 스페인은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나라이므로 더 많은 구름을 보았을 것이다. 구미쯤에서 새로운 얼굴들의 소개는 끝나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날이 더울 것이 예상되므로 버스 안 강의, 현장 확인 식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가끔 백일홍이 붉게 꽃을 피워내고 있을 뿐 천지는 녹색일색이다. 문경새재에서 차를 내려 이화령을 넘고 다시 신풍으로 들어선다. 봉촌 선생님의 강의는 막힘이 없다. 재래신앙이나 근대사나 불교문화나 모든 문화에 막힘이 없다. 다만 천주교 강의는 회장님의 신앙이라 양보를 하신다.
신풍 일대는 온통 옥수수다. 산밭에는 깨가 자라고 콩이 자란다. 대학 옥수수를 파는 곳이 보이고 더러는 이미 따내고 빈 옥수수 대가 누워 있기도 하다. 조령산 휴양림 방향으로 얼마쯤 달려가니 마침내 첫 답사지 2불 병좌상이 나타난다.
2불 병좌상은 흔치 않은 것이다. 경주 다보탑도 기본적으로는 병좌상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탱화로서 그려진 다보탑과 2불 병좌상이 있었다. 도상과 개념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분으로 차를 내려 계단을 오른다. 2불 병좌상은 왕복 2차로의 도로 옆에 높다랗게 위치하고 있었다. 2불 병좌상의 개념은 불법의 전수이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진리의 말씀은 다할 날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화장을 하셨고 명백한 죽음 너머로 사라졌다. 누가 그의 법을 전할 것인가. 따라서 법의 전수라는 설정으로 2불 병좌상이 조성되게 된 것이라고, 봉촌 선생님은 설명하여 주신다. 개인적으로, 이번 답사 중 가장 큰 "깨달음" 이다.
첫 인상은 코밖에 없다. 바라보는 좌측의 상은 과장되게 튀어나오고 우측의 상은 함몰되어 있다. 우측의 상은 별개의 석재로 만들어 끼운 듯이 보였는데 그게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마손이 심했고 특히 아랫부분은 더 심했다. 옷주름이 서로 대칭되게 표현되어 있었고 장방형의 얼굴 고려시대 특유의 두툼한 눈 등, 거칠고 질박하여 서민적인 느낌이었다. 하기는 고려시대 뛰어난 장인들은 모두 개경으로 모여들었을 것이고 이곳은 변방이었을 것이다. 무슨 용도였는지 작은 구멍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화불이 눈에 띄었다. 불상의 좌, 우에 화불이라고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상들이 있었는데 신장인지 협시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을 뵙고 돌아서니 천지가 푸르다. 7월은 어디를 가나 햇살은 밝고 천지는 푸르다. 겨울을 견딘 상록수나 봄에 잎을 틔운 낙엽수나 다 같이 푸르다. 풀도 푸르고 나무도 푸르다. 발아래 벌레 한 마리도 살아서 꿈틀거리고 나도 살아서 저 부처님을 보고 있다. “하늘은 햇살을 고루 내려주고 비는 땅을 고루 적셔준다” 는 말이 진리로 다가온다. 마음의 벽이 모두 허물어진다. 모처럼 부처님의 무설의 설법을 들은 것 같다. 빈부와 높고 낮음과 천하고 고귀한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하루 바람이 분다고, 하루 흐리다고 불평을 했지만 막상 밝고 포근한 날의 은혜는 몰랐던 것이다.
다시 연풍성지를 향해 길을 달린다. 괴정마을, 느티나무 정자란 뜻일 게다. 과연 성지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답사 자료에서 느티나무와 회나무를 혼동하였지만 괴산에서는 더 이상 회나무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이고 학명은 Zelkova serrata이다. 회화나무는 장미목 콩과에 속하는 나무로 학명이 Sophora japonica이다. 한반도와 중국이 원산지인데도 일본이 재빨리 손을 써서 학명에 자포니카가 붙었다. Chinese Scholar Tree라고 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학자수로 불리는 나무이다. 단지 한문을 같이 쓸 뿐이다. 한문을 같이 쓴다는 것은 어떤 관념이나 사상의 뿌리가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물은 다르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槐가 <홰나무 괴>로 나오지만 대부분 옛 자전의 음은 "회" 이다.
연풍성지는 카톨릭 성지가 거의 없는 경상도에 인접해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강하지만 그만큼 두려움도 강한 것일까. 두려움이 강한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과 탄압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하다. 초기 카톨릭 박해의 역사 역시 많은 피 흘림을 요구하였다. 그만큼 조선의 역사가 열등했다는 이야기다. 신라는 박이차돈 하나의 피 흘림으로 끝났지만, 그리고 그의 피는 신앙이 아닌 정치이긴 하였지만, 그리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자발적인 피 흘림이 있었기로 신라의 역사는 천년을 이어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괴정마을이란 마을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여기저기 느티나무다. 박해의 터에도 그 옛날 참혹한 역사는 다 덮어두겠다는 듯 느티나무는 박애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김혜경 회장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카톨릭은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자발적인 신앙이라 한다. 그리고 폐쇄적인 당시 조선사회에서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 접근하게 된다. 어쨌거나 부패한 양반중심 사회에서 높은 신분의 벽에 갇힌 민초들에게 그것은 복음이었다. 황석두 루가는 자신이 모시던 주교님이 관에 의해 체포되자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어쩌면, 체포에 의한 것보다 더욱 값진 순교의 길을 택하신 분이시다. 조선 순교사를 모두 알지 못하고 다만 입문하는 기회로 만족해야 했다. 나 자신 불교도이긴 하지만 앞으로 더 자주 이런 기회가 있어야 하리라. 모름지기 문화인이라면 보여지는 나에 대한 성찰도 게을리 말아야 한다.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우러러보고 있는 십자가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십자가는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점이 안타까웠다. 시멘트는 삼십 년을 굳고 삼십 년을 핀다고 하지 않던가. 모딜리아니처럼 길게 표현된 파티마 성지 박물관의 십자가와 비교가 되며 특이한 것은 흔히 광배라 부르는 빛 무리가 표현되어 있는 점이었다. 그것이 성자에게서 볼 수 있는 아우라인지, 태양신을 숭배한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인지는 강의가 끝난 뒤 난상토론으로도 얻지 못하였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우라라고 하고 싶다. 문화의 흐름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순교자의 피가 너무도 붉지 않은가!
성지를 나와 단원이 현감으로 있던 풍낙헌으로 향하면서 순교란 무엇일까 골똘해진다. 순교란 어둠속에서 횃불을 들고 앞 서 가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이들이 횃불을 따라 올 것이다. 그러나 횃불을 든 자신도 발아래를 알 수 없다. 한 걸음 앞이 천 길 낭떠러지인지 지옥의 아가리인지. 그러니 가장 먼저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냥 어둠속에서 엉키어 몰려다니면 최소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란 기본적으로 이타의 DNA를 지닌 이들이다. 나 같으면 죽어도 못할 것이라고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은 금강경에서 그토록이나 경계하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이다. 머리로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아상이 깊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에 가까울수록 길은 혼미해질 것이다.
각연사를 향하여 다시 길을 달린다. 깨밭과 고추밭을 지난다. 고구마밭도 있고 추자나무도 보인다, 이름 모를 노란 꽃도 보이고 존재가치를 지나치기 쉬운 개망초는 지천이다. 군데군데 백일홍이 붉은 꽃빛을 토해내고 있다. 꽃이 귀한 시절에 피고지고피고지고 하여 백날을 붉은 꽃을 매달고 있다하여 귀하게 여기는 배롱나무이다. 양반가에 반드시 심을 세 가지 나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향나무와 회화나무와 배롱나무. 이 배롱나무는 자랄수록 줄기의 껍질을 벗기 때문에 청렴한 관리의 상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눈에 부시지 않는 저 꽃빛, 혈관에 스며들어 기어이 슬픈 전설 하나 만들고 말 것 같은 백일홍.
백날을 붉은 마음 있을까요.
붉고 붉어 더 붉어질 수 없으면,
언약의 단애를 불어오는 바람에 하얗게 바랜 채,
꽃이 지듯 문득 몸을 날려 다음 생에서도,
다시 부여잡고 싶은 인연 있을까요.
이런 시를 써서 보내던 시절이 잠시 생각났다. 그렇다. 나이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요만큼이라도 나이를 먹으니 저런 시절도 있었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시를 쓰는 것도 그렇지만 인연이라는 것, 그것이 절대자를 향한 헌신이든, 범속한 인간에 닿기 위한 사랑이든 저토록 간절한 인연이 있기도 할까......역설적으로 그런 인연이 없음으로 더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요즘 경주도 어디 없이 온통 백일홍일 터인데 백일홍 이야기가 지금도 읽혀지는 걸 보면 우리네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는 걸 알 수 있겠다.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길을 달려 각연사로 향한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정만영 기사님은 수십 년 지기 같다. 고맙다는 인사조차 잊어먹게 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어느 기사가 차 옆구리에 긴 긁힘 자국을 남겨가며 불평 한마디 없을 수 있을까. 우스갯 소리로 아내보다도 차를 끔찍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지 않는가. 각연사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보니 좁은 길을 지나오느라 바디에 길게 그어진 흠집이 있었다. 왁스로 닦으면 되잖아요,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장 왁스가 있었다면 닦고 싶었다.
답사를 마치고 그나마도 잊어먹지 않으면 내릴 때 짧은 인사말을 건네지만 이 기회에 정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기사님이 이글을 보고 있다면, "따랑해요!" ^^ (저 혀가 조금 짧아요. ㅋㅋㅋ)
첫댓글 ㅋㅋㅋ 난 순채씨! "따랑해요!"^*~ "고마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거 솔바람님 시입니까? 신춘문예감이에요...ㅎㅎㅎ지가 뭐압니까만은 너무 좋다는 표현입니다.
두 분 감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