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년 강단>
마음을 튜닝하라
창세기 32:26~32
인간은 ‘객관적 현실’과 ‘심리적 현실’이라는 두 개의 현실을 갖고 있습니다. 객관적 현실은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미남(美男) 미인(美人), 좋은 가정… 외부로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객관적 현실로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두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자신이 느끼는 심리적 현실은 다릅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공했고 행복해 보이지만 본인의 심리적 현실은 성공도 별 의미가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은 야곱에게서 객관적 현실과 심리적 현실이 강하게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1. 사방이 위험하다.
20년만에 부자가 되어 돌아오는 야곱. 남들이 보기에 현실은 분명 성공이지만 야곱이 느끼는 마음의 심리는 형을 두려워합니다. 반가워야 할 텐데 왜 두려울까요?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 못했고 불편한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0년이면 용서를 구하고 과거를 정리할 시간이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간관계보다는 업적이나 성공을 목표로 20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금의환향하는 성공자이지만 사실은 자랑할 수 없는 성공입니다. 7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그냥 두렵고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심히! 위기상황에서 무엇에 짓눌린 듯한 고통과 좌절감으로 답답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야곱은 머리를 굴립니다. 돌아가는 길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려는 해결방법이 아니라 형을 속일 생각을 합니다. 참 못 말리는 인간입니다.
㈀ 야곱은 아부꾼의 근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4절 “내 주 에서에게… 주의 종 야곱이…” 5절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그때만 피해보려는 꼼수입니다.
㈁ 야곱은 뒤에서 계략을 짭니다. 7절 모든 소유를 두 떼로 나눕니다. 4절의 고백이 참이라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형의 소관에 맡겨야 합니다. 거기에서 용서가 되고 진실된 형제애가 회복됩니다.
㈂ 야곱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20절, “…야곱이 말하기를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인생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내에게 돈이나 갖다 주고 비싼 목걸이나 사다주면 감정을 푸는 것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 야곱은 은혜를 받은 후에도 가족들에게조차 진실하지 못합니다. 33장에서 밤새도록 기도를 해놓고서도, 실컷 은혜를 받고서도 사기꾼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합니다. 여종의 아들은 전면에 다음에 레아의 아들 라헬의 아들… 끝에 그리고 여차하면 자기 목숨을 위해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그가 변화된 사람이라면 자기가 앞장서야 합니다.
이게 야곱입니다. ‘객관적 현실’은 성공자이지만 ‘심리적 현실’은 두려움과 불행한 처지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의 진면목입니다.
2. 마음을 튜닝하라.
튜닝(tuning)은 주로 악기의 조율을 뜻하는 음악 용어입니다. 야곱에게도 이제 인생을 튜닝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사람입니다. 너무 세속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의 집안은 시기와 분쟁과 반목의 콩가루집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인생을 튜닝할 작정이십니다. 하나님의 튜닝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 밤에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홀로 남았다는 것은 객관적 현실이고 두려움은 심리적 현실입니다. 이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외로운 말로입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 가운데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씨름을 걸었습니다. 씨름은 그냥 힘을 겨루는 시합이 아닙니다. 생사를 건 전투입니다. 씨름하려고 샅바를 딱 잡았을 때 야곱은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최고의 적수구나… 더럭 겁이 났습니다.
밤새도록 싸움을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야곱이 이깁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겨놓고 이겼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형식은 이기는 모양새이지만 야곱은 상대가 자기를 갖고 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씨름을 그만두고 싶은데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12:4에서, 당시의 상황을 야곱이 울며 겨루었다고 합니다. 물면서 제발 그만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만 놓으면 되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샅바를 놓는 날에 야곱은 죽습니다. 야곱은 생명을 걸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기려고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장받으려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밤에 상대방이 개명해 줍니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이름의 뜻은, 내가 하나님을 겨루어 이겼다! 했지만 사실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져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신 이름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이기소서! 내 성품을 이기소서! 내 육신적인 삶을 누르소서! 나를 치소서! 그래서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이기는 생애를 살게 하소서!
그런 고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시며 고백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힘이 없어서 집니까? 뭐가 없어서 집니까? 자식이 성장하라고 져주는 것입니다. 자식이 철이 들라고 져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철이 드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마음을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놓아주셨습니다. (생략) 12월호에서 만나요 강정훈 말씀닷컴에 가시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