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Jn 6,51-58):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los judíos: «Yo soy el pan vivo, bajado del cielo. Si uno come de este pan, vivirá para siempre; y el pan que yo le voy a dar, es mi carne por la vida del mundo». Discutían entre sí los judíos y decían: «¿Cómo puede éste darnos a comer su carne?». Jesús les dijo: «En verdad, en verdad os digo: si no coméis la carne del Hijo del hombre, y no bebéis su sangre, no tenéis vida en vosotros. El que come mi carne y bebe mi sangre, tiene vida eterna, y yo le resucitaré el último día. Porque mi carne es verdadera comida y mi sangre verdadera bebida. El que come mi carne y bebe mi sangre, permanece en mí, y yo en él. Lo mismo que el Padre, que vive, me ha enviado y yo vivo por el Padre, también el que me coma vivirá por mí. Este es el pan bajado del cielo; no como el que comieron vuestros padres, y murieron; el que coma este pan vivirá para siempre».
«Yo soy el pan vivo, bajado del cielo. Si uno come de este pan, vivirá para siempre»
Rev. D. Antoni CAROL i Hostench
(Sant Cugat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continuamos con la lectura del Discurso del pan de vida que nos ocupa en estos domingos: «Yo soy el pan vivo, bajado del cielo» (Jn 6,51). Tiene una estructura, incluso literaria, muy bien pensada y llena de ricas enseñanzas. ¡Qué bonito sería que los cristianos conociésemos mejor la Sagrada Escritura! Nos encontraríamos con el mismo Misterio de Dios que se nos da como verdadero alimento de nuestras almas, con frecuencia amodorradas y hambrientas de eternidad. Es fantástica esta Palabra Viva, la única Escritura capaz de cambiar los corazones.
Jesucristo, que es Camino, Verdad y Vida, habla de sí mismo diciéndonos que es Pan. Y el pan, como bien sabemos, se hace para comerlo. Y para comer —debemos recordarlo— hay que tener hambre. ¿Cómo podremos entender qué significa, en el fondo, ser cristiano, si hemos perdido el hambre de Dios? Hambre de conocerle, hambre de tratarlo como a un buen Amigo, hambre de darlo a conocer, hambre de compartirlo, como se comparte el pan de la mesa. ¡Qué bella estampa ver al cabeza de familia cortando un buen pan, que antes se ha ganado con el esfuerzo de su trabajo, y lo da a manos llenas a sus hijos! Ahora, pues, es Jesús quien se da como Pan de Vida, y es Él mismo quien da la medida, y quien se da con una generosidad que hace temblar de emoción.
Pan de Vida..., ¿de qué Vida? Está claro que no nos alargará ni un día más nuestra permanencia en esta tierra; en todo caso, nos cambiará la calidad y la hondura de cada instante de nuestros días. Preguntémonos con honestidad: —Y yo, ¿qué vida quiero para mí? Y comparémosla con la orientación real con que vivimos. ¿Es esto lo que querías? ¿No crees que el horizonte puede ser todavía mucho más amplio? Pues mira: mucho más aun que todo lo que podamos imaginar tú y yo juntos... mucho más llena... mucho más hermosa... mucho más... es la Vida de Cristo palpitando en la Eucaristía. Y allí está, esperándonos para ser comido, esperando en la puerta de tu corazón, paciente, ardiente como quien sabe amar. Y después de esto, la Vida eterna: «El que coma este pan vivirá para siempre» (Jn 6,58). —¿Qué más quieres?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이 말씀의 반대말을 생각하면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의 반대말은 “지상에서 사람이 만든”입니다.
“살아 있는”의 반대말은 “죽어 있는”, 또는 “생명이 없는”입니다.
“영원히 살 것이다.”의 반대말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생명을 주는”의 반대말은 “죽음을 주는”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라는 말씀의 반대말은,
“나를 믿지 않는 자들이 먹고 있는 것은,
지상에서 사람이 만든, 생명 없는(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는) 빵이다.”입니다.
이 말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는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는커녕 그 생명을 얻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
즉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탐욕, 이기심, 집착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다면,
또는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아 먹는다면,
그 사람이 먹는 밥 자체가 악한 것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살기 위해서 애쓰는 일 자체도 선한 일이지만,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애쓴다면,
또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당연히 악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의 반대말은,
“이 빵을 먹지 않으면, 아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이 말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예수님은 먼지로 돌아갈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먼지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면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에게 생명을 주려고 내가 주는 빵은 나 자신이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의 반대말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닌 빵은 모두 ‘썩어 없어질 양식’이고,
그것은 너희에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줄 뿐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여기서 ‘십장생(十長生)’이 생각납니다.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은
죽지 않고 오래 산다고 해서 십장생이라고 부르는데,
이 가운데에서 해, 산, 물, 돌, 구름은 생명체가 아니니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고,
소나무, 거북, 학, 사슴은 오래 살기는 해도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불로초는 상상 속의 식물이니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은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과 제대로 알아들은 것도 아니면서
알아들은 척 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예수님 말씀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어도 먼저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안 믿으려고 하면, 영영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시지는 않고, 먼저 믿으라고 요구하셨다는 점입니다.
(안 믿으면, 말씀의 뜻을 이해한다고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이 말씀의 뜻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입니다(요한 6,40.47).
뜻은 간단한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듣기 거북한’(요한 6,60)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또 예수님을 ‘믿는 일’과 ‘먹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셨다고 해석합니다(요한 6,56).
여기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말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말씀이고,
이 말씀은 또,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되어 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으로 그치면,
‘그분’과 ‘나’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떨어져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믿고, 온 삶으로 믿음을 온전히 실천하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 안에서 살면,
우리는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되어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곧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생각으로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삶 자체’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입니다(요한 6,55).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은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니라면 세상의 그 무엇도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될 수 없습니다.
(세속의 양식과 음료는 먹어도 금방 허기지고, 마셔도 금방 갈증이 생깁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올림픽이 끝난 다음 해인 1989년,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은혜롭게도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당시 교황요한 바오로 2세께서 몸소 성체 대회를 주관하셨습니다.
세계 성체 대회를 준비하고 지내면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인 토양 위에서 성체성사를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토대로 성체성사의 의미를 살아가려는 신앙인들의 강력한 몸짓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실존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이들은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성사에 초대받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듣게 되는‘생명’이나‘머물다’또는‘다시 살리다’라는 용어는 우리가 향유하게 될 구원의 유익을 설명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체성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몸소 내어주시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은총의 순간이요, 기쁨의 장소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눔의 심오한 신비가 극명하게 표출되는 성체성사 안에서 신앙인들은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참 하느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만남을 이루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믿는 이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을 만남으로써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신앙인은 그리스도로부터 살과 피로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임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과연 자신을 온전히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고 있는지요? 믿는 이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어떤 식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나눔의 실천적인 삶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살아가는데서 구현됩니다. 자기의 배 속만을 채우려 하지 말고 오히려 밥이 되어주는 삶을 살라 하신 추기경님의 말씀이 이렇게 강하게 귓전을 울리는 것이 과연 저 혼자만의 느낌일까요?.
[말씀자료 : -안병철신부- / 편집 : 원 근식 요아킴]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어떻게 성체를 모셨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선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략되었기에, 당연한 듯 모시는 성체가 되었습니다.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힘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부터 성체 신심에는 정성이 실렸습니다. 교회가 ‘공복재’를 규정한 것도 지성으로 모시라는 의도입니다. 지금의 공복재는 성체 모시기 전 ‘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지나친 신심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성체께 정성을 드리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성체를 자주 모시면 ‘그분의 힘’은 강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안과 허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천상의 힘’입니다. 누구라도 온몸으로 성체를 모시며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성으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이승과 저승’에서도 결코 헤매지 않게 됩니다.
안병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