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7일
이번회 부터는 우리지역을 지나 대간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멀리가는 번거로움을 들 수 있었다.차에 올라 보니 정답던 모습들이 보이질 않는다. 순간 왜 하면서 걱정이 앞선다. 어디가 아픈가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한 두명이 아닌 집단 결석이여서 생각이 더 해진다. 조대장님께 물어 보았다. 조대장님 대답대신 그냥 웃기만 한다. 벡두대간을 걸어면서 가야할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 할지라도 바람은 나를 늘 설레게 하기 때문에 대간 날이 기다려지곤 했었다. 백두대간 중에서도 이곳만은 우리가 꼭 직접 걸어 봐야할 길이였는데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된 산이기도 하고 특히나 이 산줄기는 천령(天嶺)이라하여 하늘재라 부르며 태백산 정상은 天山 즉 하늘산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숭앙했던 산이기 때문이다.
늘 웃고 서로를 위로해 주던 모습들을 그려보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구룡산으로 향했다.여기서 부터는 태백산의 품이다.태백의 품으로 들어 선 것이다.
나무계단을 오르는 곁으로는 전나무 무성했고 길 옆으로는 지난해 형형 색색으로 꽃 피웠던 야생화들이 모진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 빈 대만 남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얼마쯤 갔을까 앞서 가던 남대장 하늘 끝까지 치 솟아있는 금강송 나무의 밑둥치를 안고 있었다. 한 아름 훨신 넘어 보였다. 금강소나무는 나무에 윤기가 나며 줄기도 곧게 자라며 나이테도 촘촘하고 재질이 단단해 목조 건축 자재로 최고의 품질이다. 이 나무를 춘양목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경복궁을 짓기위해 이 나무를 베어 춘양에 집결시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물위에 뗏목을 띄워 낙동강에 내려보내여 배에 싣고 한강으로 올라가 궁궐을 지었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때 일제가 이 나무를 수탈하여 춘양역에서 반출 하였다하여 춘양목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금강송은 이 나무의 학명이다.
슬픈 역사의 울림이 가슴속에 사라지기전에 커다란 연리목을 만났다.하나인 듯 서로에게 깊이 몸을 박고 있었다.두개의 서로 다른 나무가 서로에게 깊이 몸을 박고 있는 모습 때문에 많은 이들은 연리목을 보며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렸다.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말하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연리목을 볼때마다 때로 사랑에 앞서 아팟다.연리목이란 깊은 상처를 서로 보듬어 안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서로 보듬어 안은 것이 연리목이다.스치가만 해도 쏟아질 것만 같은 오랜 아픔의 상처를 지닌 나무들이 서로 끌어 안은 것이다. 그 깊은 아픔과 상처가 만들어낸 사랑이 바로 연리의 사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마음 아팟다.
구룡산(九龍山)1343m에 올랐다. 강원도 영월군 상로읍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태백산 청옥산 각화산 옥석산과 함꼐 태백산령에서 소백산령이 갈라져 나가는 곳이다. 이 산에서 떨어진 빗물은 남북으로 갈라져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홉마리 용이 승천한 산이라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하는데 이 산에 대한 전설을 보면 어느날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가 용이 승천하는것을 보고 뱀 봐라 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겨 용이 떨어져 이무기가 되어버렸다는 재미 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룡산 아래를 천평이라한다. 태백산정상에 천제단이 있는 곳을 天山이라 하여 그 아래 있는 들을 하늘들이라 하여 天坪이라 하였다 한다.
고직령(高直嶺)에 올랐다.높고 곧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개 북쪽에 사창(社倉)이 있어 고직(庫直)이가 지킨다는 설이 있고 고선자 김정호 대동지지 삼척산천에는 서쪽 일백십리에 고석령(高石嶺)이 매우 험하다고 기록 되어있다.
3차팀 몇회에 걸처 기상악화로 조망없이 산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화창한 초봄의 날씨로 햇빛이 따사로웠다.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시원했다.시야가 확 터여 사방을 조망하며 첩첩한 산줄기 바라 볼수 있었다.지나온 길 바라 보았다. 옥돌봉도 보이고 저 멀리 연화의 세계소백산도 아물거리고 동남쪽으로 문수기맥이 시작하는 문수산도 보였다.북동쪽 가야할길 바라 보았다. 끝없는 산줄기 늘어서 소리없는 몸짓으로 어서 오라고 부르고 있었다.깃대봉,부소봉,태백산도 보였다. 그 뒤로는 수리봉 창옥봉 함백산도 그 모습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산은 첩첩하여 그리움 처럼 끊일줄 몰랐고 내 마음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곰넘이재에 도착하였다.이 재는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였다. 특히 태백산 천재를 지내려가는 관리들이 드나들던 길목이 였다.영가지(永嘉志)에는 웅현(熊峴)이라고 표기되여 있는 것으로보아 순 우리말로 순화하여 곰넘이 재로 부르게 된것으로 추정된다.
곰은 검에서 온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어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하여 곰(검신)님 이라 불렀다. 즉 웅현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라고 부르게 된것은 태고적 부터 곰을 신령시 여겨왔던 우리민족의 신앙심이였던 것 같다.
하늘을 찌를 듯 신갈나무 군락과 조릿대 무성한 길을 지나 힘들게 오르니 신선봉이 였다. 신선이 살았다는 봉우리라서 내려가는 길도 가팔랐다. 정상은 조망도 없는 절해고도 적막강산이다.여기에서 신선이 살았나 싶다. 깃대배기 봉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차돌배기 봉을 지나면서 남대장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이 길은 오른만큼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은근히 힘든 구간이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렇다. 우리네 삶도 이와같다.오른 만큼 내려가야 하고 얻은만큼 베풀어야 한다. 정직하지 못한 삶도 있다. 얻기만 하고 베풀지 못한 삶도 있다. 오르기만 하고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 삶이 있다.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을 망칠 뿐만아니라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다.
깃대배기봉에 올랐다.신라시대에 태백산과 부소산 깃대배기봉을 연결하는 대간길을 하늘재라는 뜻에서 천령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성시 했다고 한다.깃대처럼 높은 봉우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배기는 무엇 무엇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이 능선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였다. 어느 나라가 먼저 국기를 꽂아 내걸었던 봉우리로 보여진다.이것을 볼때 이 지역은 국경 분쟁으로 전투가 잦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봉은 솟 뚜껑처럼 생겼다하여 부르는 이름이다.또한 단군의 둘째 아들 부소왕의 이름을 따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환단고기 단군팔가(檀君八加)는 단군의 여덟아들에 관직을 부여한것 관직을보면 부루 호가(虎加)ㅡ 모든가를 통괄하게 하고,신지 마가(馬加)ㅡ생명을 주관하게하고 ,고시 우가(牛加)ㅡ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 웅가(熊加)ㅡ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부소 응가(䧹加)ㅡ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부우 로가(鷺加ㅡ)질병을 주관하게 하고,주인 학가(鶴加)ㅡ선악을 주관하게 하고,여수기 구가(狗加)ㅡ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 하게 하였다.이를 단군 팔가라하고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태백산 천제단 바로 밑 제단에서 조대장 복숭아 통조림을 주어 피로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여기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천제단에 올랐다.테벡신(1576m)은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한밝달을 소리 옮김과 뜻 옮김의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한 밝달은 한백단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를 지내는 산을 밝은 산이라 했다. 밝은 산중에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이다.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 가을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에 신라 초기 혁거세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고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고 기림이사금 3년 3월에 왕이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올렸으니 낙랑과 대방이 항복 하였다고 기록 되여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신라 오악 가운데 북악이라하여 산꼭데기에 신사가 있는데 그 이름은 태백천왕당이라 하여 주위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천제를 올린다고 한 기록이 되여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낼때 신좌앞에 소를 메어 놓고 3일이 지난후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가져가 쓰는데 그 행위를 퇴우제(退牛祭)라 한다.또한 특정 종교인들에 의하여 수난의 시대도 있었다 태백시지에 보면 박종기 태백시장이 신라시대때 부터 민족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려온 천제단의 훼손을 막지 못한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고유제를 지냈다고 한다.태백산 천제단은 (국가 지정 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여 있다.천제단 모형과 면적을 보면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난다는 천원지방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이고 자연석 녹니 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2.4m 좌우폭 7.36m 전후폭 8.26m로 타원형으로된 약 20평 가량의 면적이다. 이와같이 천제단은 우리민족의 역서속에 늘 함께 했던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는 단군신화가 있는곳이기도하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곰으로 부터 사람으로 환생한 여인과 혼인하여 단군을 탄생케한 신화는 우리민족의 뿌리라 할 수 있다.태백산을 오를때 당골 초입에 단군성전이 있다.
장군단을 지나 사길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잔설이 남아 미끄럽기도 하고 눈과 어름이 녹아서 물이 고인곳도 있고 진흙으로 신발이 한짐이나 되고 어렵게 내려와 사길령 매표소와 유일사 매표소 갈림길을 벗어나니 작지만 깔닥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길령에 내려와 단체 사진을 찍고 화방재로 향했다. 사길령은 본래 이름이 새길령이다. 고려시대에 새로 개척한 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길령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보부상들의 상로 역할을 담당 했었다.이 곳은 높고 험하여 맹수와 산적들의 출몰이 잦아 때로 수십명 수백명씩 계수의 인솔하에 넘어 다녔다.산이 이 처럼 험하고 위험하여 고갯길의 무사안녕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제를 올린다 현제 태백산 사길령 산신각계회에 보존 중인 천금록은 200여년전 부터 보부상들이 이곳 태백산령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오늘의 목적지인 화방제에 내려섰다. 화방제는 꽃밭이라는 뜻이다. 봄철이면 진달래 장관을 이룬다.또한 이곳 주민들은 어평재라고 부른다. 어평재란 태백산 산신이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 (禦坪)이라고 해서 어평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두대장님 앞 뒤에서 고생이 많았고 함께한 모든분들 힘든 산행 수고 많았습니다. 태백시장에서 따근한 국밥과 막걸리에 힘들었던 시간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감사합니다.
첫댓글 산행전에 대간교실에서 그날갈길에 대해 요점을 짚어주시고
또 산행후에 이렇게 어느책에서도 볼수없는 내용을 자세히 적어주시니
같이 백두대간을 걷는다는자체가 행복합니다...감사합니다...
집단결석...^^ 죄송합니다. 가지않아도 눈에 선한 대간길이 무척 아쉬워요.
다음엔 집단참석할께요~~
오늘은 눈으로 글을 읽으며 마음으로 대간길을 걸어가봅니다
태고의 신비가 시작된 태백산..선조들의 감사와 정성이 녹아서 후대를 이어가게한 제단...
대간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역사란걸 다시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