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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荒山)은 전라도 남원의 운봉(雲峰)과 인월(引月) 사이에 있는 산이다. 1380년 9월 바래봉의 산줄기와 황산사이의 좁은 지형을 이용하여 이성계 군대가 왜구를 대파시킨 역사적인 곳이다. 필자는 오늘 바래봉에서 북쪽 황산방향으로 뻗은 긴 계곡의 지곡(支谷)을 지나면서 그 깊은 산속에 큰 돌들로된 석축(石築)과 넓은 길같은 흔적들을 발견하고 황산에서의 전투와 관련이 있지않을까 생각했다. 이곳은 이성계 군사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과 가까운 산속이니 당시 이곳에 대규모의 수레(車), 포(砲), 말, 병사들을 숨겨 공격을 준비한 곳으로 짐작된다(私見). 황산에서의 큰 승리를 통해 이성계는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서 고려가 주목하는 장수로 부상했고, 후일 정도전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의 창업(創業)을 이루게 되었다.
▼ 붉은 선이 군사주둔지로 추정되는 곳임. 지도에 표기된 비전(碑殿)과 피바위도 황산전투와 관련이 있음.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신우(辛禑) 6년(1380) 8월,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충청,전라,경상을 말함)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이 태조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3도(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가서 왜적을 정벌하게 하고,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군대가 나가서 장단(長湍)에 이르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이길 징조입니다.”
하였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경산부(京山府.성주)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2원수가 전사(戰死)하니, 사졸(士卒)로서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마침내 함양성(咸陽城)을 도륙(屠戮)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치고서,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조(이성계)가 천리(千里)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잠자고 밥먹지 못하였다. 태조는 안열(安烈)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니 적군과 서로 떨어지기가 1백 20리(里)였다. 극렴(克廉)등이 와서 길에서 태조를 뵙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하룻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荒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정봉)에 올라서 태조가 큰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태조는 말하기를,“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하였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아기발도(阿其拔都)가 태조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것이다.’했습니다.”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島.일본]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가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이 태조의 말 앞[馬前]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하 부분생략)
황산대첩비(荒山大捷之碑)는 그 197년 뒤인 1577년(선조10년)에 세운것으로 김귀영(金貴榮.東園)이 짓고 송인(宋寅.頤菴)이 썼다. 그러나 일제 침탈기간에 조선의 정기를 훼손시킬 목적으로 대첩비는 파괴되었던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동원문집(東園文集卷之三)』에 실린 비문은 다음과 같다.
荒山大捷之碑 幷頌
萬曆三年秋。全羅觀察使朴啓賢馳啓曰。雲峯縣之東十六里有荒山。寔我太祖康獻大王大捷倭寇之地也。年代流易。地名訛舛。行路躊躇指點。有不能辨認。誠恐千百世之後。高者夷。下者湮。益將昧昧而莫知其所。願樹一大石以識之。縣之耆倪。相與愬于官。守土之臣。不敢抑以報。謹上聞。上可其啓。命其道幹其事。仍命臣貴榮文之。臣承命衹慓。謹案。麗季。國步臲卼。島夷乘之。屠城燒邑。殺人盈野。所過波血。千里蕭然。殲咸陽。炎雲峯。屯引月。聲言穀馬北上。中外大震。太祖發南原。踰雲峯抵荒山。登鼎峯之上。相視形便。指授犄角。盡銳奮擊。十倍之賊。不終日而蕩除。爾來二百年間。海不揚波。嶺湖奠安。莫非斯役之所賜。則南民之感戴追慕。思欲封殖而瞻依者。烏得已也。洪惟我聖祖。宏功峻烈。昭載國乘。照人耳目。軒天地耀古今。當與玆山而終始不必區區劉石。爲之形容。然後可以傳示無窮也。雖然。南方之山。巍然高大者。無慮百數。而聖祖大勳之集。適在於玆山。則可與天作高山。美儷竝稱。而崧高維嶽。萬世仰止者矣。於戲。岐陽蒐狩。簡車徒也。而石鼓有勒。淮西削平。定藩鎭也。而群臣請紀。聖武廓淸之功。巍巍蕩蕩。萬民永賴。則鑱之貞珉。閣之龜龍。使居民行旅。瞻望拜稽。有以寄沒世不忘之思焉。不亦韙哉。臣貴榮。謹拜手稽首。獻頌曰。
麗運告窮。奸孼內訌。召彼外戎。島夷隳突。三陲被毒。爲糜爲肉。萬姓暴骨。千里慘目。執遏亂略。聖祖受鉞。師出爲律。震震爚爚。神精上格。白虹貫日。勝兆已卜。天與之惎。地效其利。荒山是界。爰赫一怒。爰奮厥武。我旆我鼓。凶酋揚鷇。欲抗虓虎。自送其脰。頂子應發。兜鍪忽側。已洞利鏃。蜂屯蟻雜。褫氣號笑。萬牛殷谷。策馬先登。四面以崩。莫我敢承。雷奔電激。竹破瓦裂。胔腦狼藉。人神協討。會朝迅掃。三韓再造。革面悔罪。厥篚繹海。垂二百載。南民耕鑿。煦愉事育。莫非爾極。載慕載祝。銘在心腹。愈久如昨。明曆五禩。伐石而紀。于山之趾。不鶱不剝。永世無斁。有如斯石。(譯文없음)
첫댓글 퓨젼사극(fusion 史劇)과 정통사극이 있는데,퓨젼사극은 흥미를 돋우기위해 픽션을 가미하는것이지만 정통사극은 역사적 史實을 토대로 구성한것이다. KBS 드라마 “정도전”이 정통사극으로서 황산대첩을 잘 재현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