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는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고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 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재(四宣齋)에 앉아 시(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시를 읽다 울컥한 것이 얼마만인가. 온세상이 봄꽃으로 가득할 무렵, 사춘기 시절 가슴 설�던 첫사랑 계집애가 올해는 일찍 벚꽃이 피었다며
보러 오라고 걸어온 전화. 일찍 핀 벚꽃처럼 일찍 혼자된 그녀의 씩씩한 목소리, 하지만 끝내 둘 다 울먹이고 있을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만인가 싶어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나눠줬더니 그들도 눈물난단다. 정일근의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당그래). 1985년 새해
아침,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 발표에서 그는 특히 빛났다. 그 시절 숱한 젊은이로 하여금 신춘문예의 꿈을 접게 했던 이 시.
나의 20대는 이런 시 속에 숨어 있었던가. '학연아'하고 큰 아들 이름을 부르는 정약용의 목소리에 코끝이 찡하더니 '약전 형님의 안부'에
이르자 눈물이 났다. 암울했던 시절, 이런 시인과 시들이 있어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언제 그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던 시인은 지금은 울산 어디에서 은둔하듯 살고 있다고 한다. 집 앞 야트막한 동산 가득 피어나는
연보랏빛 오동꽃. 이제 봄도 다 간 이 새벽, 무등산 자락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을 들으며 춘설차를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