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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전통한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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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국치를 되새기며
강우형 추천 0 조회 57 14.05.11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國恥百年] ① 국치를 되새기며…송두리째 뺏긴 땅 잊으면 또 당한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 기념관장
 
꼭 백 년 전인 1910년. 우리는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점철된 그 36년은 우리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겼고, 일부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국치백년을 맞아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일제가 남긴 치욕의 역사를 정리한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지울 수 없는 역사이기에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뜻이다. <편집자 주>

1945년 1월 31일,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장준하와 김준엽을 비롯한 50여명의 20대 젊은이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도착했다. 이들을 맞은 김구 등 노구의 독립운동가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광복군이 되겠다며 일본군을 탈출해 파촉준령의 눈 더미를 헤치고 먼길을 달려온 이들을 보는 순간, 광복도 머지않아 보였다. 서구 제국주의의 끝둥이인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이며 참 오랫동안 견딘 시간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일제침략기 때 일본은 정의요 진리였다. 그들은 무엇이든 옳았다. 철학과 종교, 가치체계를 강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혜택이라고 불렀다. 우리 고유문화는 저급하고 미신이라며 짓밟혔다. 국민은 존재가치조차 무시됐다. 한국은 어떤 식민지보다 철저하고 가혹한 통치를 받았다. 서유럽의 간접통치를 당한 식민지와 달리 바로 이웃의 직접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움츠린 역사는 결코 아니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하게 저항했다. 침략국과 식민지의 국력과 문화 차이가 가장 적었고, 늘 아래로 본 일본에 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식민지해방투쟁사에서 가장 격렬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라를 빼앗길 때, 한국인의 선택은 다양했다.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려고 몸부림친 의병들은 마지막 항전을 펼치며 최후를 맞았다. 문경의 이강년과 구미의 허위는 나라가 무너지기에 앞서 전쟁터에서 붙잡혀 사형당했고, 영덕의 신돌석은 살해당했다. 나라를 잃었다는 소식에 안동 예안의 이만도와 이중언 등 유림은 단식으로 순국했다. 계몽운동을 벌이던 인사들은 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만주로 갔다. 안동 출신 이상룡과 김동삼이 선두에 섰다. 영덕의 박경종, 울진의 주진수와 황만영이 가족들을 이끌고 그 길을 함께했다. 경북 출신 인사들은 압록강 건너편 서간도에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뒷날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바탕에는 이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힘을 모아 나라를 되찾으려 했다.

앞장서서 일제를 끌어들이거나 무너지는 나라를 짓밟는 반역자도 많았다. 나라를 합치면 우리도 대국이 된다며 민족을 능욕하거나 작위와 은사금에 침을 흘린 작자도 있었다. 그보다 앞서 일제 상인들이 상권을 확보하는 길을 터주기 위해, 경기도 양주 출신 박중양은 대구부성을 허물었다. 성곽이 무너지자 성 밖에 터를 잡은 일본 상인들은 너무나 쉽게 대구 상권을 장악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여기에도 있었다.

일제는 많은 것을 바꿨다.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제로 군대식 통치에 나섰다. 전국을 바둑판처럼 나누고 군대를 배치했다. 저항의 싹만 보여도 잘랐다. 나라 안팎으로 연결되는 독립운동 조직망을 철저하게 부쉈다.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1차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땅을 빼앗았다. 백성들은 땅을 빼앗겨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를 잃은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하기 시작했다.

행정구역도 바뀌었다. 기존 틀을 깨야 통치가 쉽기 때문이다. 영해부 밑의 영덕군을 영덕군 영해면으로 바꿨다. 영해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1919년 영해의 독립만세운동이 왜 그토록 치열했는지 헤아릴 수 있는 사연이다. 도로에는 혼마치, 아사히마치라는 일본 이름이 붙고, 대구에는 미나카이라거나 반월당이라는 백화점이 생겼다. 지금의 반월당 지명도 거기에서 비롯됐다. 게다와 기모노가 바람을 일으키고, 하꼬방집이 들어섰다. 철도가 건설되면서 그 철로를 따라 자원들이 실려 갔다.

일제는 은행을 세워 민족자본을 무너뜨렸다. 시장권은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고, 개척농장이라는 이름으로 농토를 장악한 것도 일본인이었다. 또 대한매일신보를 빼앗아 매일신보라는 기관지를 만들어 언론을 철저하게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나아가 가정에서 빚던 가양주를 못 만들게 규제해 술의 유통을 거머쥐었다. 말과 글도 변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퍼지자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역사를 비틀고, 식민지교육을 강화했다. 그러자 친일문인들이 고개를 내밀고 활개쳤다. 이런 형편이니 1940년대에 들면서 나라 밖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의기를 가진 인물이 국내에 없으리라 짐작할 정도였다.

100년 전, 우리는 역사를 통틀어 한 번도 내주지 않았던 강토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 식민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겨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있다. 100년이 흐른 지금, 그때를 되새겨 본다. 치욕을 치욕으로 알기 위해서다. 제대로 부끄러워해야 비로소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시리즈를 이어갈 필진은…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권대웅 대경대 교수

권영배 계성중 교사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김도형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김시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

김익한 명지대 교수

김희곤 안동대 교수

박걸순 충북대 교수

박규태 한양대 교수

박민영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연구부장

박찬승 한양대 교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배영동 안동대 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동순 영남대 교수

이윤갑 계명대 교수

이은주 안동대 교수

이재하 경북대 교수

이호열 부산대 교수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주보돈 경북대 교수

허  종  충남대 교수 <가나다 순>

 

[國恥百年] 1919년 세워진 상해임시정부가 바로 '대한민국'
시민이 주권 '民國' 탄생 이야기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롯한다. 사진은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때의 임시의정원 간부들의 모습.
우리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이다. 나라가 망할 때는 대한제국이었다. 이 국호는 1897년 광무황제가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국가임을 선언하면서 정해졌다. 이를 법으로 규정한 것이 1899년 반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헌법이다. 여기에서 국가 이름이 대한국(大韓國)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뜯어보면, 결국 나라 이름은 한(韓)이다. 여기에 크다는 접두어 대(大)와, 나라를 뜻하는 접미어 국(國)자를 붙였다. 대한국은 황제가 주권을 가진 나라였다. 그래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일컫고, 이를 줄여 한국이라 불렀다. 이는 일본이 나라를 대일본제국이라 부른 것과 마찬가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너뜨리자마자, 한인들 머리에 한국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폈다. 대한제국이라거나 한국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한국총독부가 아니라 조선총독부였다. 한국인이라거나 한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불렀다. ‘조선’과 ‘조선인’이 표준어가 되었다. 모든 단체 이름이 그랬다.

이를 되살려 낸 것이 대한민국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세워진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되살리되, 황제가 주권을 가진 제국이 아니라, 시민이 주인인 민국을 세웠다. 다만 국토를 회복할 때까지 정식정부가 아닌 임시 기구가 국가를 운영한다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그 기구가 바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이었다. 국토를 되찾게 되면, 정부가 되고 국회가 된다고 헌법에 명시했다. 그곳에서 국기도 법으로 정했다. 그때 정한 그대로 오늘 우리가 쓰는 국가 이름과 정부, 국회, 국기,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이름까지 이어 쓰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이 만들었고, 국가 이름도 역시 그들이 만든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바꾼 그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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