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17(土曜日)) 매일묵상 “사이비似而非”
배철현과 함께 가보는 심연
거울
인생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누구나 어떨 결에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남들이 말하는 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나’가 존재하는가? ‘남들이 말하는 나’가 내 자신이라면, 이런 질문이 불필요하다. 나는 우연히 던져진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환경을 통해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며, 남자이고, 특정한 세계관을 지닌 부모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이 제공해준 교육환경의 혜택을 받아, 한동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나 부모는 나에게 바라는 인간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상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나라는 인간을 통해 투영한 ‘그들의 나’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면 사이비似而非가 된다. 사이비란 자신이 일생동안 일구어 완수해야할 임무를 알지 못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는 거짓이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인데, 내가 너인 척 하거나, 혹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그(녀)인척 하면, 그 인생은 이미 실패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올라, 내가 다른 사람의 배역을 연기演技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사이비들은 자신을 응시하지 않는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에, 남들이 좋아할 만한 허상이 자신이라고 고의적으로 위장하거나 혹은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거울에서 출발한다. 거울이 그것을 응시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다면, 그 응시자는 자신에 대한 엉뚱한 이미지를 소유할 것이다. 청결하지 않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과 세상에 관한 정보가 무식無識이다. 무식은 핸드폰 앞에 있는 정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신봉하고 고착화된 마음의 상태다. 인간은 자신이 평가하는 자신보다는 타인의 견지에서 본 ‘자아自我’ 혹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종교의 교리나 철학적 사상에 의해 거세된 ‘자아’를 ‘진아眞我’라고 착각한다. 그것이 편리하고 불안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칠해져있고 오랜 세월 방치하여 곰팡이가 피어난 거울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고 가정하자. 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무늬와 곰팡이가 피어난 얼굴을 지닌 자로 착각할 것이다.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던져진 환경으로 인간은 그런 무늬를 지니고 태어난다. 남들은 모두 아는데, 자신만 모른다. 그 이유는 그런 자신을 오랫동안 보아왔고 익숙하기 때문에 인식할수 없다. 나의 ‘진아’인 ‘아트만ātman’는 내가 속한 환경에서 획득한 걱정, 근심, 좌절, 판단, 경험 등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의 세계를 구성하는 ‘마음’인 ‘치타’citta와 다르다.
무명無明
<요가수트라>의 저자 파탄잘리는 본연의 자신을 ‘드라스트르’Draṣṭṛ라는 특별한 산스크리트 단어를 사용하였다. <요가수트라> 삼매경 3행에 등장한다. 그는 인도 베다전통의 ‘아트만’이나 요가철학이 속한 학문전통상키아 철학의 용어인 ‘푸루샤’를 사용하지 않았다. 요가수련을 위해 실질적인 산스크리트어 단어인 ‘드라스트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보다; 배우다; 이해하다’란 동사 ‘드르스’dṛś에서 파생된 단어로 ‘심오한 통찰력으로 보는 사람;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자’다. 파탄잘리의 ‘드라스트르’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가 <명상록>에 언급한 ‘헤게모니콘’hegemonikōn이란 그리스 철학개념과 유사하다. ‘헤게모니콘’이란 ‘자신을 장악하고 제어하고 경고하는 자신’이란 뜻이다. 드라스트르와 헤게모니콘은 모두 자기성찰自己省察만이 인간을 무지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 자, 자신을 성찰하더라도 자신이 응시하는 거울을 청결하게 닦지 않는 자는 아둔하다. 이 아둔한 상태가 ‘아비드야Avidyā’다. 자신을 포함한 만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상태인 ‘비드야’Vidya의 반대다. ‘아브드야’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서로 다른 용어로 해석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진아眞我’(아트만)에 대한 부정이나 오해를 지칭하고, 불교에서는 ‘무아無我’(안-아트만)에 대한 부정이나 오해를 지칭한다. ‘아비드야’는 부정접두어 ‘아’a-와 ‘알다; 이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비드’vid-의 합성어다. 산스크리트어 동사 ‘비드’는 원-인도유럽어Proto Indo-European 어근 *weid-에서 파생하였다. *weid-는 ‘눈으로 확인하다; 확신하다; 알다’라는 의미다. 자신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기 때문에, 안다. 이 지식은 타인을 통해 전해들은 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오감을 경험을 통해 획득한 분명한 지식이다. 이 어근에서 영어 단어 wise, wisdom, video, vision 등이 유래하였다. ‘아브드야’는 한자로 ‘무명’無明으로 번역되었다. 무명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주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있는 무지無知와 무식無識뿐만 아니라, 선명한 마음의 거울을 소유하지 못해, 만물에 대한 왜곡, 편견, 혹은 엄폐를 의미한다.
무명은 사물의 진면목을 억압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편견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런 의미에서 산스크리트어 ‘마야Māyā’와 유사하다. 아브드야는 ‘진아眞我’(아트만)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이며, ‘마야’는 삼라만상의 원천인 우주적 자아 ‘브라흐만’Brahman에 대한 허상이다. 무명은 주체와 객체사이의 간극이며 구별이다. 인간이 진아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무명 속에서 안주하기 마련이다. 자시의 본연의 모습을 모른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자신이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진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깨달음은 자신 안에 ‘진아’가 있다는 인식이며, 이 인식을 유지하려는 수고다.
왜곡歪曲
<찬도그야 우파니샤드>Chādogya Upanisad VIII.812에 왜곡에 관한 분명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천상의 주인인 인드라와 하계의 주인인 비로차나는 ‘아트만’을 정복하는 자가 우주의 주인이 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둘은 현자 파탄잘리를 찾아와 ‘진아’를 찾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말한다. 파탄잘리는 이들의 세속적인 욕심을 간파하고, 그들을 시험한다. 파탄잘리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물을 관찰하면, ‘진아’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드라와 비로차나는 물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트만’이라고 생각한다. 비로치나는 수면에 출렁이며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진아’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 비초차나의 깨달음이 바로 지옥이다. 그러나 인드라는 시시각각 미동에도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진아’일 수가 없다고 확신한다. 그는 파탄잘리에게 다시 돌아가 묻는다. “물에 비친 나의 모습은 무가치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혼은 내가 죽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파탄잘리는 인드라에서 ‘진아’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를 위해 마음훈련을 시작하였다.
호숫가에 비친 달은 아무리 저 하늘 위에 있는 달과 유사하더라도 진짜가 아니다. 진짜 달은 저 하늘위에 유일하게 둥실 떠있다. 지상의 모든 물에 반영된 수 많은 달들은 달이 아니라 달에 대한 반영이며 허상이다.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만든 조잡한 세숫대야에 비친 달을 ‘진짜 달’이라고 우긴다. 그에게는 진짜 달이지만, 남들에게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 내 세숫대야의 달을 가만히 응시하면, 한 순간도 조용하지 않다. 미동에도 흔들린다. 일그러진 달의 모습은 저 높이 떠있는 달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숫대야를 들고 있는 내 손의 움직임으로 흔들리는 물의 떨림에서 온다. 인간의 오감은 세숫대야의 물결이며, 끊임없이 펄럭이는 촛불과 같다.
‘사이비’似而非
<요가수트라>는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불처럼 인간의 시야를 왜곡하는 방해꾼을 ‘브리티’ 즉 ‘소용돌이’라고 말한다. 호수 표면에서 끝없이 출렁이는 ‘물결’이나 ‘소용돌이’는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자신의 본모습인 ‘드라스트르’의 관찰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킨다.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 소용돌이를 소멸시켜야한다. 인간이 소용돌이를 소멸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사이비’似而非다. 파탄잘리는 이것을 ‘사루프야’sārūpya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산스크리트어 ‘사’sa-접두어는 ‘유사한’이란 의미이며 ‘루파’rūpa는 ‘본연의 모습’이란 뜻이다. ‘사루프야’는 사이비似而非다. ‘사이비’의 축자적인 의미는 ‘유사하나 같지 않는 것’이다. ‘사이비’는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사람의 별칭이다. 그는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서도 자신의 배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위를 장악하는 고유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은 핑계이며, 그의 행위는 흉내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 I.3에서 “요가의 목적인 소용돌이 소멸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련하는 자는 스스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그것에 안주해야한다”라고 정의하고 4행에서는 자신이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지 못한 경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4) vr̥tti sārūpyam-itaratra
브리티 사루프얌-이타라트라
이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4)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지 못한다면),
인생이라는 물결이 나를 사이비로 만들 것이다.”
오늘 하루는 물결이다. 내가 스스로 자신을 심오하게 관찰하지 않는다면, 본연의 자신에 깊이 안주하지 않는다면, 나의 오감으로 감지하는 세계는 큰 파도처럼 나를 덮쳐, 자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당길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 등장하는 신명인 ‘나는 나다’eheyh asher ehyeh 혹은 <브리아다란야카 우파니샤드 1.4.10의 ‘아함 바라흐마스미’aham brahmāsmi를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사이비로 전락할 것이다. 사이비似而非는 진짜인 척하지마 진짜가 아닌 것, 착한 척하지만 착하지 않는 것, 오리지날인척 하지만 가짜인 것이다. 세상에 사비비가 넘쳐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심오하게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훈련을 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허상을 만들어 존경한다. 그 허상을 아이돌 혹은 성공이라고 부른다. 자신 존경을 수련한 사람이 타인을 존경할 수 있다.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매 순간 추구해야할 나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였는가? 그것을 내 삶속에서 완성하기 위해 지금 수련하고 있는가? 혹은 나는 ‘사이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