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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1-8)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2:4-7)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지혜였다. 곧 송사를 듣고 누가 옳은지 분별하여 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또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셨다. 그와 같은 지혜는 그의 전에도 없었고, 그의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왕상 3:12). 그의 지혜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곧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창기 두 여인이 찾아와서 재판을 청했다(왕상 3:16-28).
한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아기를 낳은 지 사흘 후에 이 여자도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자기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서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여인은 이르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하며 쟁론이 벌어졌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하였다. 신하들이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오니, 이르기를 “산 아들을 둘로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어라.”라고 판결하였다. 그러자 산 아들의 어미가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기를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하였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산 아들을 저 여인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라고 하였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판결을 듣고 왕을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한 솔로몬의 지혜가 어떠했는가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급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3000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1005이며, 그가 또 …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하였다”(왕상 4:29-33).
1.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대결하는 모습이 고난주간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네 번 심문을 받았다. 그것은 곧 지혜의 대결이었다.
1) 첫째는 권세 논쟁이었다. 곧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상대로 한 논쟁(마 21:23-27)이다.
고난 주간의 첫날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제일 먼저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하셨다. 이 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대단히 불쾌해 하고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이튿날에는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셨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묻기를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물었다. 그들의 이 질문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곧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고 대답하면,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정죄하고 대적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죄를 물어 정죄할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고 반문하셨다. 그러자 저희가 서로 의논하기를 “만일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하여,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하였다. 이에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하시므로 그들의 간계를 가볍게 벗어나 오히려 반격하셨다.
2) 둘째는 세금 논쟁이다. 곧 예수님과 헤롯당의 대결(마 22:15-22)이다.
권위 논쟁에 실패한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가 좋은 꾀를 생각해 냈다. 곧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하면서 추켜올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비수를 뽑아들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 질문에 무서운 함정이 있지 않은가? 만일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면 원수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는 것이니 백성들이 모두 예수님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시면 그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니 꼼짝없이 죄인이 되어 로마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예, 아니오”로 대답하시기 전에 먼저 저희의 악함을 꾸짖으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셋돈을 내게 보여라”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예수님이 물으시기를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하시니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이니이다.”하였다. 이에 예수님이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라고 하셨다. 어려운 질문을 받으시고도 여유만만하게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통쾌하지 않은가!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라고 하였다.
3) 셋째는 부활 논쟁이다. 곧 예수님과 사두개인들과의 대결(마 22:23-33)이다.
이번에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물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그의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의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을까?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두개인들은 이런 기상천외한 질문을 만들어서 예수님께 도전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대답하셨다. 그런데 그 여자가 맏아들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거나 막내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대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무지와 악함을 꾸짖으시는 대답이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무슨 말씀인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아니하는 사두개인들은 근본적으로 무지에 뿌리를 박고 출발한 거짓된 신앙인이라는 것을 폭로하시면서 그들이 먼저 산 자가 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늘의 생명을 가진 산 자가 되지 않으면 사두개인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무지한 자요, 죽은 자들이 될 것이다.
4) 넷째는 계명 논쟁이다. 곧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대결(마 22:35-40)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는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2-33)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고 칭찬하셨다.
사실 이 계명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것이다. 지식적으로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시험할 것이 아니다. 곧 입술로 대답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요, 또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누가 있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겠는가? 오직 예수님만이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고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시지 않았는가?
2.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어떻게 다를까?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지혜에도 좋은 지혜는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대적하는 것으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인간들의 지혜는 간교하다. 거짓말을 참말인 것처럼 한다. 그렇게 함으로 남을 속인다. 일반적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한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인보다 더 간교한 것은 정치가요, 정치가보다도 더 간교한 것은 종교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대적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지혜는 인간 지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본질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까지도 속이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따라서 이것을 가장 미워하셨다.
다니엘 11장에는 말세에 일어날 일 가운데 남방 왕과 북방 왕이 대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27절에 “이 두 왕이 마음에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아 있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곧 왕들이 모여서 평화회담을 한다고 하지만 실은 서로 상대방을 속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 최고의 지혜를 자랑하는 왕들의 회담에 온통 거짓말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도무지 분별하기 어려운 때가 되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부정직을 가장 큰 죄로 여기고 있지만, 국제 문제에 있어서는 남을 잘 속이는 자가 오히려 높임 받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세에 주의해야 할 것을 경계하시면서 그 첫째로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고 하셨다.
① 전도서 7:29에서 솔로몬은 “내가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그 꾀가 곧 인간의 지혜 아닌가?
②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속도록 되어 있다. 욥기 5:13에는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였고, 시편 5:10에서는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또한 시편 10:2에도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속임수를 쓰는 자는 결국 자기에게 속아서 망하게 된다.
③ 북한이 뒤로는 핵무기를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평화회담을 했다.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약속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신론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전혀 죄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근본적으로 거짓말에서 출발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북한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만들어서 위협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 핵무기로 인해 자기가 망할 줄은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타락한 인간은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가 준 지혜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하시고는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또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① 첫째, 마귀는 욕심쟁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② 둘째, 마귀는 살인자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다.
② 셋째, 마귀는 거짓말쟁이다. 따라서 인간 지혜도 거짓말을 하기 위한 것이다.
④ 인간의 지혜를 야고보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약 3:15-16)고 말씀한다.
3) 그러므로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어울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미련한 것이라고 비웃고 배척한다(고전 1:18). 따라서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며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①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눅 10:21)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주신다. 우리가 더욱 어린이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② 또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2:8).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살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면서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탐하여 얄팍한 지혜만을 찾으려고 하니까 더욱 어두워지고 미궁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귀는 그런 사람들에게 혼미한 영을 주어서(롬 11:8)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기 때문(고후 4:4)이다.
③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다(잠 9:10; 욥 28:28; 시 111:10). 따라서 이 지혜가 커지면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커질수록 자기를 자랑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만든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다.
1)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에 듣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지혜와 능력에 놀라고 또 놀랐다(마 7:28-29; 13:54).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지혜가 있었다. 오늘날 설교를 잘 한다는 사람들은 예화를 많이 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화에는 거짓말도 많고 지어낸 말도 많다. 그러나 비유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자연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오묘한 지혜가 있다. 우리가 이런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
① 그런 지혜가 어디에서 왔을까? 성령, 곧 “지혜와 총명의 신”(사 11:2)이 충만하시니, 그런 놀라운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② 한걸음 더 나아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 1:24). 예수님이 곧 지혜 그 자체였다는 말씀이다.
③ 이것을 구약에서는 잠언 8장에서 보여준다. 잠언 8장은 지혜를 예찬한 장이다. 여기에서 지혜는 창조자요, 그리스도시다. 22-3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지혜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 곧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 이미 지혜가 세움을 입었고,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지혜가 거기 있었고, 하나님이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이 지혜가 하나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였다.”고 하였다.
2) 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났다. 이 지혜의 특징을 살펴보자.
① 고린도전서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고, 1:23에서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라고 하였다.
② 이사야 55:8-9에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였다.
③ 그런데 이 지혜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배척한다. 그러나 우리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신다.
3) 이 지혜는 성령의 은사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① 은사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첫째 은사로 나타나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고, 둘째는 ‘지식의 말씀’이다. 성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은 성령의 은사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②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7-20)라고 하셨다.
③ 또한 말세에 일어날 일을 가르치실 때에도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라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참 지혜를 가져야 한다.
① 하나님은 심판 날에 지혜롭고 충성된 종을 찾으신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라고 물으셨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힘든 기근의 때다(암 8:11). 세상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② 주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짓고(마 7:24-25),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고전 3:10-15) 지혜로운 건축자를 찾으신다. 지혜로운 여인은 그의 집을 세우지만,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의 손으로 집을 헐어낸다고 하셨다(잠 14:1). 신앙의 집, 영적 성전을 잘 지어야 한다.
③ 지혜로운 처녀가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한다. 당신의 등에는 기름이 충만한가? 신앙의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껍데기 신자는 아닌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려진 자니라.”(고후 13:5)라고 말씀하신다. 늘 자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의 등불은 밝은가? 혹시 불이 꺼지지는 않았나? 우리는 모두 마지막 때에 세상을 밝힐 빛들이 아닌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라고 말씀하신다. 어둠이 땅에 가득하다. 만민이 어두워 방황한다. 진리의 빛, 성령의 빛을 만방에 비추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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