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이승만 평전/[10장] 6ㆍ25전쟁기의 권력강화 독재ㆍ독선 2012/04/20 08:00 김삼웅
이승만이 재집권을 위한 정치파동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6월의 피난수도 부산은 날이 갈수록 어수선해지기만 했다. 전란기인 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장기집권욕은 법과 질서보다 조작된 민의와 폭력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연장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나 일반 상식조차 보이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가는가 하면, 자신을 저격하려는 군인을 정당방위로 사살한 서민호 의원이 국회에 석방결의로 석방되었는데도 이에 항의하는 관제 데모가 계속되고, 재야원로 60여 명이 <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던 중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여러 사람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피난 수도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 이승만의 정치적 술수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다.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거행된 6 25기념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정계는 한층 더 심상치 않은 먹구름에 가리게 되었다.
이날 유시태(당시 62세)는 민국당 출신 김시현 의원의 양복을 빌어입고 김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유유히 기념행사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여 한참 기념사를 읽을 때 2미터쯤 떨어진 뒤에서 독일제 모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는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격발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듭 방아쇠를 당겼으나 탄환은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섰던 경호헌병이 권총을 든 유시태의 팔을 탁 치고, 동시에 뒤에서는 치안국장 윤우경이 유시태를 끌어앉혔다.
이승만 암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범인 유시태는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곧 육군특무대로 이송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시태에 이어 연루자로서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로 민국당의 김시현 의원이 체포되고, 뒤이어 민국당의 백남훈ㆍ서상일ㆍ정용환ㆍ노기용 의원과 인천형무소장 최양옥, 서울고법원장 김익진, 안동약국 주인 김성규 등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민국당의 고위층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할 기미를 보였으나 뚜렷한 혐의사실이 드러나지 않자 더 이상 확대하지는 않았다.
국가원수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유시태ㆍ김시현에게는 선고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김성규ㆍ서상일ㆍ백남훈 의원에게는 징역 7년, 6년, 3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최양욱ㆍ김약진ㆍ노기용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1953년 4월 6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제2심에서도 유시태ㆍ김시현에게 사형이, 서상일ㆍ백남훈에게는 징역 6개월, 1년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사람은 대법원에서 각각 무기로 감형되어 복역하던 중 4ㆍ19혁명을 맞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감했다.
유시태는 법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권총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고 진술, 살해의사가 없었음을 주장하여 이 사건의 배경을 두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불발탄으로 저격미수에 그치고만 대통령 암살사건은 결과적으로 이승만 세력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권연장을 기도하는 데 하나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승만의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더욱 심해진 관제 데모는 6월 28일에는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반민족국회를 해산하라”고 아우성쳤다. 관제 데모의 시류를 타고 자유당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서 배은희ㆍ이갑성ㆍ박영출 의원이 주동이 되어 국회의 자진해산결의안을 본회의에 제출했다. 이 같은 사태의 연발은 이승만이 더욱 강경책을 쓸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는 빌미가 되고, 이승만은 국회해산을 단행하겠다는 위협을 해가면서 발췌개헌으로 권력연장을 감행했다.
이승만을 물리적으로 제거해서라도 헌정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하면서 거사에 나섰던 유시태와 김시현은 같은 경북 안동 풍산면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의열단원으로 상해를 비롯, 해외 각처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10여년 동안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들이다.
김시현은 1924년 사이토 총독과 총독부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상해에서 동양 최초로 제조한 시한폭탄과 권총을 반입하여 거사 착수 중에 발각되어 10여 년을 복역하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안동 갑구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된 현역의원이었다. 그는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지들에게 누를 끼칠까 보아 민국당을 탈당하기도 했다.
유시태는 4월혁명 뒤 석방되면서 “그때 내 권총알이 나가기만 하였으면 이번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목메이는 출감소감을 밝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주석 12)
주석
12> 김삼웅,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74~78쪽, 가람기획,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