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야구 기자분들 가운데 그나마 해외야구에 대하여 또한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하여 공부도 많이 하시고 조예가 깊으신 스포츠2.0 박동희 기자님이
직접 대만에 가셔서 대만 현지 야구인들을 만나서 인터뷰 하신 기사입니다
읽어보니 흥미도 있고 도움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대만 야구를 아는가
가우슝, 타이페이=박동희 기자 / 2007-10-23
아시아 야구의 맹주는 한국과 일본이다. 일반적인 평가는 그렇다.
이제까지 국내 야구계는 대만을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한국보다 한 수 아래이고 말만 프로지 세미프로에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승부조작과 도박으로 얼룩진 대만야구계의 이미지도 한몫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만야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만에게 이기면 당연한 일이었고 지면 이변이었다.
국제대회가 열릴 때마다 "대만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지면 "야구는 모른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대만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야구 역사가 깊은 나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만프로야구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약물검사를 도입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지도를 펴보자. 대만은 어디에 있는가. 대만은 동경 119도~124도, 북위 21도~25도에 있다. 사전을 펴보자. 대만은 어떤 나라인가. 인구 2천300만 명이 사는 섬나라다. 역사책을 펴보자. 대만과 한국의 관계는 어땠는가. 1948년 8월 두 나라 간 수교가 이뤄진 뒤 혈맹으로 지내다 1992년 8월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외교 관계가 단절됐다.
여기까지다. 대만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이즈음에서 끝이다. 처음 대만 취재를 구상할 때 읽은 자료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만야구에 관한 자료는 거대한 청소기가 훑고 지나간 듯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지도와 사전 그리고 역사책에 나오는 대만은 있어도 대만야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한대만대표부를 비롯해 화교단체에 문의해 가까스로 얻은 대만프로야구 비디오테이프가 전부였다.
대만야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이유는 없었다. 리틀야구부터 프로야구까지 대만과 한국의 야구 교류는 매우 잦다. 국제대회에서도 자주 만난다. 웬만한 선수들은 한 번쯤 대만선수들과 경기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대만야구는 1시간의 시차만큼이나 묘한 거리감이 있다. 비닐 장막이 처진 듯 눈에 보이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어째서일까. 왜 한국에는 대만야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10월 4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대만 가우슝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머릿속은 온통 대만야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한국보다 야구할 곳이 많은 대만
가우슝은 한국으로 치면 부산이다. 항구로 유명한 대만 제2의 도시다. 분위기도 부산과 비슷하다. 드센 듯 정열적이고 급진적이면서도 활기차다. 야구를 대하는 자세도 비슷하다. 가우슝 공항에서 리청칭후구장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을 때는 여러 설명이 필요 없다. 스윙하는 자세만 취하면 그만이다.
얼마쯤 택시를 타고 갔을까. 차창 밖으로 열대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바나나 나무가 없네."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사진기자가 고개를 돌렸다. "바나나?"
"대만선수들이 왜 야구를 잘하는지 아나." 20년 전 한국화장품 출신의 젊은 코치가 중학생 야구부원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아무 대답이 없자 코치가 입을 열었다. "바나나 때문이야. 대만에서 나는 바나나는 특별하거든. 우리는 고기 먹고 힘내지만 대만 사람들은 바나나 먹고 힘낸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대만은 길거리에 바나나가 열려 있어. 야구장 펜스도 바나나 나무로 둘러져 있어서 얼마나 냄새가 좋은지 몰라."
가우슝 리청칭후구장에 도착했을 때 바나나 나무 담장은 고사하고 대나무 펜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대형 야구장이 눈에 들어왔다.
(리 칭칭후 구장)
외벽을 대리석으로 장식한 리청칭후구장은 대만에서 가장 좋은 야구장으로 꼽힌다. 12만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지은 이 구장은 내야 1만 4천679석, 외야 5천210석을 합해 2만 석 규모를 자랑한다. 기자실도 내야에 178석이나 설치돼 있다. 컬러 전광판과 국제 규격에 맞춘 조명도 구장의 자랑이다. 2층에는 야구박물관과 함께 스포츠용품 상점, 레스토랑 등이 있다. 야구장 옆에 호수가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리청칭후구장은 1985년 7월 착공해 1988년 공사를 마쳤다. 1999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어디서 많이 본 구장인데." 사진기자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천 문학구장을 연상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만큼 두 구장은 이미지가 비슷했다.
대만은 전국에 16개 구장이 있다. 대만직업봉구연맹(CPBL)이 프로야구 경기를 해도 된다고 인증한 구장이다. 대부분 1만 석 규모로 외야석이 없는 구장이 많다. 전지훈련을 위해 대만을 찾은 국내 야구인들이 "대만야구장은 코딱지만 하다"고 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야구장 가운데 잠실, 문학, 사직구장을 빼고는 대만야구장과 비교할 만한 구장이 없다. 만약 대만 야구인들이 한국의 광주, 대구구장을 찾았다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보조구장 말고 본구장은 어디요."
직장인야구 또는 학생야구장을 합치면 대만 내 야구장 수는 더 늘어난다. 경상남북도 크기의 대만이 한국보다 야구 인프라가 더 잘 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따뜻한 날씨 덕분에 천연잔디 일색이다. 부상의 위험에서 그 만큼 한국보다 안전하다.
공격야구가 팬을 부른다
리청칭후구장은 입구도 특별했다. 안내 데스크를 호텔 로비처럼 꾸몄다. 로비에 기다리고 있다가 기자를 반긴 사람은 라뉴 베어스 리유젠지 운영팀장이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그라운드였다. 이날 경기를 벌일 라뉴 베어스와 성타이 코브라스 선수들이 일찌감치 구장에 나와 있었다. 라뉴는 수비연습, 성타이는 타격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과 연습방법이 다르지 않았다.
그때 라뉴 훙이충 감독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훙감독은 지난해 11월 도쿄돔에서 열린 코나미컵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훙감독은 "후반기 내내 승률 1위를 해 어느 정도는 안심이지만 비로 연기된 마지막 3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라뉴는 전기리그 26승24패로 3위를 차지했다. 후기리그는 28승16패로 퉁이 라이온스에 이어 반 경기 차로 2위를 달리고 있다. 라뉴가 후기리그 1위로 시즌을 마감하면 플레이오프 없이 대만시리즈에 직행하는 게 가능하다. 시즌 전체 승률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성타이를 앞서기 때문이다.
대만은 팀당 전·후기 각각 50경기씩 총 100경기를 치른다. 포스트시즌 진출 방식이 독특하다. 전·후기 1위 팀 가운데 승률이 높은 팀이 대만시리즈에 직행하고 남은 팀과 전체 승률 1위 팀이 플레이오프에서 대만시리즈 출전권을 다툰다. 전체 승률이 1위라도 전, 후기리그 가운데 반드시 우승을 해야 직행이 가능하다. 전·후기 통합우승팀이 나왔을 때는 전체 승률 2, 3위 팀이 5전3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러 대만시리즈 진출팀을 가린다.
그래서인가. 온화한 훙감독의 얼굴에 비장감이 감돌았다. 훙감독은 대만이 자랑하는 명포수였다. 리틀야구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76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힌 뒤로는 빠지지 않고 대표팀 주전포수로 뛰었다. 프로 시절에도 명성이 자자했다. 1985년 실업팀 쑹디 호텔에서 뛰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90년부터 쑹디 엘리펀트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간 훙감독은 1992, 1994년 베스트나인에 뽑혔고 1993. 1994, 1996년에는 골든글로브를 수상했다. 1993년 대만시리즈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MVP로 뽑혔다. 현역 시절 훙감독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투수 리드가 뛰어나 ‘대만의 후루타’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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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천진펑은 타율 3할8푼2리 홈런 26개, 타점 66개를 기록하며 CPBL 공격 전 부문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사진 한상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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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감독에게 "여전히 공격야구를 지향하느냐"고 물었다. 지난해 코나미컵에서 훙감독과 인터뷰했을 때 그는 줄곧 공격야구를 이야기했다. "팬들은 타격전에 흥분하고 투수전에 침묵한다"는 게 훙감독의 야구관이다. 그러나 막판 치열한 순위싸움을 벌이는 라뉴에게 재미난 야구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공격야구가 나와 우리 팀의 스타일이다." 훙감독의 말투는 단호했다. 홍감독은 "번트는 주자를 다음 베이스로 보내는 걸 전제로 한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감독과 선수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공격을 하다가 실패하면 감독만 책임지면 된다"며 "반대로 성공하면 선수들에게 찬사가 쏟아지므로 가장 프로다운 작전은 강공"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공격야구라도 지면 그만이다. 성적이 좋지 않은 감독은 수명이 짧다. 이 점은 대만도 같다. "윗사람들로부터 팀을 보호하는 게 감독의 할 일 아닌가." 홍감독이 멋쩍게 웃었다. 라뉴의 화끈한 공격야구는 현재 대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홈경기뿐만 아니라 원정경기에도 라뉴의 공격야구를 보려고 팬들이 몰린다.
프로야구는 비즈니스
대만에 오기 전 취재 대상으로 라뉴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라뉴가 대만프로야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표하는 팀이기 때문이다. 대만 야구관계자들도 한결같이 "라뉴는 야구가 무엇인지 아는 팀"이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라뉴는 2003년 12월 CPBL에 가입한 신생팀이다. 전신은 중화직업봉구대연맹(TML) 소속의 디이진강이다. 디이진강은 성적과는 거리가 먼 팀이었다. 2003년 20승9무71패로 동네북이었다.
경기 시작에 앞서 만난 라뉴 천지에성 단장은 "약체 디이진강을 인수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구단주의 고향이 바로 디이진강의 연고지였던 가우슝이다." 린단장에 따르면 구단주는 야구에 별 관심이 없다. 그저 피혁사업으로 자수성가한 뒤 고향에 무엇인가 기여할 것을 찾다가 프로야구팀을 골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단주는 기업가답게 야구단도 투자처고 흑자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구와는 관계없던 37살의 나이키타이완 홍보팀 천지에성을 단장으로 영입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천단장이 취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홈구장을 갖는 것이었다. 디이진강을 인수할 당시 라뉴는 홈구장이 없었다. 대만도 한국처럼 구단이 소유한 구장이 없다. 중앙 정부나 시에 임대료를 내고 구장을 사용한다. 가난한 구단은 경기 때만 구장을 사용할 뿐 연습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추가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엄밀히 말해 홈구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천단장은 가우슝시를 설득해 리청칭후구장을 임대했다. 홈경기도 하고 연습도 할 수 있게 됐다. 안정된 홈구장을 확보한 뒤 천단장은 바로 2군을 만들었다. CPBL에서 2군팀을 운용하는 구단은 퉁이, 중신, 라뉴뿐이다.
선수단의 복지 향상에도 힘썼다. 디이진강 시절 선수들은 호텔을 이용할 때 무조건 2인1실이었다. 퉁이와 슝디를 뺀 나머지 구단은 지금도 그렇게 한다. 천단장은 1군은 1인1실, 2군은 2인1실로 선수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했다. 원정경기에는 요리사를 동행하도록 해 선수들의 입맛을 챙겼다. 천단장은 "우리 팀이 먹고 자는 건 최고일 것"이라며 목에 힘을 줬다.
천단장이 이토록 선수들의 복리를 챙기는 건 상품의 질이 좋아야 더 많은 고객을 모을 수 있다는 경제적 원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천단장은 자신의 업무를 경영과 관리라고 설명했다. "경영은 4가지로 나뉜다. 입장수입, 광고수입, 언론을 통한 홍보 효과, 야구 관련 상품 판매 수입이 그것이다." 천단장에게 프로야구단 경영은 오직 수익을 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관리는 어떻게 나뉠까. 언뜻 수익 창출에만 치우쳐 단장 본연의 임무는 관심 밖일 것만 같았다. "프런트, 선수, 감독을 모두 관리한다. 메이저리그 단장들이 하는 일을 여기서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돈도 벌면서 팀을 강력하게 쥐고 흔드는 단장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흔치 않다. 천단장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천단장이 밝힌 라뉴의 1년 운영비는 40억 원 선이다. 대만 프로야구단 가운데 최고의 복리를 내세우는 구단의 예산치고는 많은 돈이 아니다. 한국의 삼성은 지난해 400억 원을 썼다. 2군까지 운영하는 라뉴의 운영비가 예상보다 적은 이유를 물었다. 천단장은 우연히 라뉴와 삼성의 연봉을 비교한 적이 있다고 했다. "두 팀의 연봉차이가 20배였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규모다."
대만 프로야구 1군 선수들의 평균연봉은 4천500만 원 선이다. 2군 선수들은 2천400만 원이다. 라뉴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받는 선수 2억 7천만 원을 받는 천진펑이다. 천진펑이 미국에서 활동한 것을 고려해 메이저리거 최소연봉 30만 달러를 기준해 책정한 것이다. 팀 내 두 번째 고액연봉자 린즈셩은 1억 3천만 원 가량을 받는다. 각종 수당을 모두 합한 금액이다.
이렇듯 저연봉이 가능한 이유를 천단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대만에는 자유계약제도(FA)가 없어 연봉인플레가 빚어지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의 스캇 보라스 같은 에이전트가 중간에 껴 잔꾀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만프로야구를 운영하는 주체가 한국과 크게 다르다고 설명했다.
"한국과 일본은 대기업 중심으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지만 대만은 중소기업이 팀을 소유한다." 실제로 퉁이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5개 구단은 고만고만한 중소기업이다. 라뉴도 그룹 주력상품이 신발, 장난감, 선풍기 등이다.
"대만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것도 저연봉이 가능한 이유다. 선수들이 먼저 안다. 우리 팀 평균관중이 2천500명으로 가장 많은 축에 든다지만 관중 수입을 기대할 수준이 아니다.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인건비가 증가해 적자가 불어난다면 야구단을 운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천단장은 이런 이유로 대만에서는 구단과 선수가 밀고 당기는 연봉싸움이 없다고 말했다.
연봉을 제외하고 운영비를 아끼는 방법은 많다. 라뉴의 구단버스는 2층버스다. 한국은 대개 선수단을 버스 2대에 나눠 태우고 별도의 차량까지 준비한다. 프런트의 규모도 작았다. 라뉴의 한 홍보팀 직원은 기자를 데리고 구장 여기저기를 안내하다가 경기가 시작되자 재빠르게 1루 응원석으로 올라가 북을 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그는 구단 홍보일과 응원단장역을 겸하고 있었다.
천단장이 원정경기에 요리사를 대동한다고 자랑한 것도 알고보면 운영비 절감을 위해서다. 한국은 경기 중간마다 선수들이 라커룸에 들어가 간단한 식사를 한다. 말이 간단이지 호텔 요리사가 준비한 이동 부페식이다. 라뉴는 따로 요리사를 둬 이 비용을 줄인 것인 것이다. 라뉴를 제외한 다른 팀은 이마저도 없다. 경기 중간에 햄버거나 스낵이 제공될 뿐이다.
천단장은 지난해에 비해 올해 적자폭이 다소 늘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몇억 원 정도를 손해 볼 것 같다." 흑자 전환을 위한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천단장은 지난해 17승을 거둔 에이스 우스요우를 지바 롯데 마린스에 팔았다. 이적료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구단의 적자폭을 단번에 줄일 만한 액수를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선수를 팔 수 있다. 프로야구는 자유경쟁시장이다."
우스요우의 이적으로 트레이드 머니뿐만 아니라 몇 가지 혜택도 받았다. "우스요우를 넘기면서 조건을 달았다. 우리 팀 코치들이 일본으로 가 연수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대만과 일본의 관계는 교류의 역사가 깊은 만큼 긴밀하다. 대만은 자국 선수를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은 자국 내 외국인선수를 대만으로 양도한다. 라뉴는 외국인선수를 잘 데려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협력관계를 맺은 일본팀에서 '이 선수는 일본보다 대만에 잘 맞다'든가 '퇴출할 선수인데 대만에서는 어느 정도 활약이 가능하다'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미국이나 도미니카에 스카우트 관계자를 보내 일일이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고 빠르게 좋은 외국인선수를 영입할 수 있다."
재미난 건 일본에서 대만으로 보낸 외국인선수가 한국으로 건너온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선수가 SK투수 케니 레이번이다. 2005년 시즌이 끝난 뒤 라뉴는 협력관계에 있는 일본 히로시마 카프로부터 레이번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레이번의 맹활약으로 지난해 대만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재계약을 고려했지만 지난해 11월 코나미컵에 출전한 레이번을 유심히 지켜 본 SK 스카우트에게 뺏기고 말았다.
"레이번이 여기서는 보너스와 수당을 합쳐 20만 달러를 받았다. 우리 몰래 한국에서 레이번과 접촉할 때 100만 달러를 제시했다고 들었다. 레이번이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기나 했겠는가." 그러면서도 아쉽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레이번은 더 좋은 조건을 찾아갔다. 조건을 맞춰 주지 못한 건 우리 팀의 책임일 뿐이다."
천단장에게 혹시 한국과 선수 교류를 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린단장은 기다렸다는 듯 칠판에 "프로야구는 비즈니스"라는 한자어를 썼다.
"충분한 돈을 준다면 상관 없다." 그렇다면 팀의 간판스타인 천진펑, 린즈셩도 대상에 포함되는지 궁금했다. 한국에 화교가 많아 이 선수들이 한국에 진출한다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이다. 다시 말하지만 프로야구는 비즈니스다. 조건만 맞으면 긍정적으로 검토할 일이다."
천단장과 이야기를 끝마칠 즈음. 라뉴-성타이전을 알리는 "플레이 볼"소리가 들렸다.
대만리그와 대만야구 수준은 별개
성타이의 선발투수는 트라비스 미니스. 5승2패 방어율 2.92의 외국인투수 치고는 평범한 성적이다.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구사율은 높았지만 구질은 좋지 않았다. 올시즌 5승4패 방어율 4.10를 기록하고 있는 라뉴 선발투수 쉬원슝도 시속 135km을 밑도는 직구와 무딘 슬라이더로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양쪽 타선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투수들이었다.
예상이 맞았다. 라뉴는 2회 6번 장즈충이 2루타를 치고 나가자 8번 류자하오가 좌전 안타를 때려 선취점을 뽑았다. 성타이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라뉴 선발 쉬원슝에게서 3, 4회 연달아 득점을 내며 2-1로 역전에 성공했다.
접전은 이어졌다. 5회 라뉴가 3번 라울 곤살레스의 투런홈런으로 3-2로 역전에 성공하자 6회에는 성타이가 쉬원슝의 폭투에 힘입어 3-3 동점을 만들었다. 결국 승부는 9회 라뉴 단즈웨이가 우전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끝을 맺었다.
흔히 대만야구를 '기본기가 부족한 야구'라고 한다. 이는 사실이다. 이날 경기에서도 기록된 실책은 두팀을 합쳐 2개였지만 기록되지 않은 실책은 그보다 3배는 많았다. CPBL 기록원들이 관대하지 않았다면 전광판에는 두 팀의 안타수보다 실책수가 더 많이 기록될 터였다. 수비위치를 잘못 잡아 있는 타구를 놓친 경우도 눈에 띄었고 외야수끼리 콜 플레이가 되지 않아 다 잡은 공을 놓치기도 했다. 내야수들은 강습타구에 약했다.
타자들도 장단점이 확연했다. 가운데로 몰리는 직구는 사정없이 후려쳤지만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슬라이더는 그런대로 대처했지만 그 정도 슬라이더는 프로라면 쳐야할 공이었다. 투수들은 습관이 쉽게 드러났다. 이날 경기를 녹화해 다시 돌려봤을 때 라뉴 선발투수 쉬원슝은 변화구와 직구를 던질 때 글러브가 꿈틀대는 방향이 서로 달랐다. 마음속으로 공을 예상하면 10개 가운데 8개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2004년 삼성에서 뛰다가 대만 중신 웨일즈에서 투수로 뛴 경험이 있는 이준 씨는 "한국 투수들이 대개 시속 140km 이상을 기본으로 던진다면 대만에서 그 정도 스피드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대만야구의 수준을 "한국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설명한 이 씨는 "대만야구는 아직 기술적인 면에서 세밀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대만야구는 아마추어나 프로나 할 것 없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CPBL에서 활동하고 있는 코칭스태프 가운데 90% 이상이 일본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식 야구 특유의 정교한 플레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힘을 바탕으로 한 메이저리그식 야구스타일이 주류를 이루는 듯했다.
이씨는 이에 대해 "한국야구가 일본야구를 받아들일 때 느낀 난감한 상황을 기억하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밀하게 파고들다 지쳤다는 뜻이다. 대만의 리틀야구가 세계 최강 수준이지만 선수들이 성장할수록 발전 속도가 더딘 건 고비를 넘으려는 끈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일본의 야구를 억지로 대만에 적용하려 했던 게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아열대기후의 대만은 야수소년들이 야구선수로 자라는데 좋은 환경이 아니다. 리청칭후구장에서 만난 리덩푸는 고교때까지 촉망받는 야구선수였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어깨를 다쳐 지금은 평범한 야구팬이 됐다. 리는 "리틀야구시절 일본에 야구연수를 간 적이 있었는데 훈련을 무척 많이 시켰다. 대만에서 그렇게 연습을 했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일본이나 한국에서 대만 야구선수들을 게으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만에서 태어났다면 '우린 우리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야구계는 그동안 대만야구를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무시했다. 대만야구의 수준이 우리보다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한 나라의 야구수준을 최근 국제대회의 결과로만 본다면 이 말은 수정돼야 한다.
메이저리거와 프로선수들로 구성된 '드림팀'이 등장한 1998년 이후 한국과 대만의 전적은 6승3패다. 그러나 역시 프로선수들이 출전한 1998,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 전적을 더하게 되면 6승5패다. 여기다 지난해 코나미컵에서 삼성이 라뉴에게 진것을 합친다면 6승6패 동률이다. 6승 가운데 3승도 1점차 승리에다가 홈에서 이긴 경기였다.
지난해 도하아시아경기대회에서 대만에 2-4로 졌을 때 김재박 대표팀 감독은 "해외파 선수들이 합류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대만에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빈말이 아니다. 현재 미국야구에서 뛰고 있는 아시아 선수 가운데 대만출신이 가장 많다.
이준 씨는 라뉴의 샛별 린즈셩을 잘 알고 있었다. 청소년대표팀에서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야구를 잘 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대만에 가서 보니까 꽤 유명해졌고 실력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린즈셩의 성장이 "팀 동료 천진펑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야구스타인 천진펑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선수다.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박찬호에게 홈런을 뽑아내며 국내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천진펑은 이후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에 큰 기대를 모았다. 비록 부상에 따른 부진으로 지난해 대만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정통 메이저리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대만 내 유일한 타자다.
라뉴 훙이충 감독도 "린즈셩을 비롯해 많은 대만 선수가 천진펑의 연습 방법을 따라한다"며 "천진펑은 걸어다니는 야구교습서"라고 칭찬했다. 천진펑은 지난해 코나미컵을 계기로 일본행이 유력했다. 그 전에도 오라는 일본구단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라뉴에 잔류했다. 천진펑은 "돈때문에 포기했다는 소문이 많은데 그게 핵심이 아니었다"며 "미국에 있으면서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가능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해외진출을 피한 것"뿐이라고 속내를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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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리청칭후구장에서 열린 라뉴-성타이전에 출전한 천진펑. 그는 대만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선수다.
사진 한상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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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가우슝에서 타이페이로 이동하는 고속전철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대만이 자랑한다는 고속전철은 속도를 냈다가 정지했다를 반복했다. 차창 밖으로 굵은 빗줄기와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그것이 태풍의 영향 때문인지는 타이페이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예정보다 2시간 늦게 타이페이역에 도착했을 때 타이페이시는 영화에나 나오는 재난의 현장이었다.
최고 시속 120km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 ‘크로사’는 가로수를 꺾었고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1km 밖으로 날려버렸다. 건물에서 떨어진 양철 간판이 거리를 나뒹구는 등 위험한 상황이었다. 억지로 CPBL 사무국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렵게 CPBL 관계자 리처드 왕과 통화를 시도했다. 대만은 태풍이 불면 휴교령이 내리고 상점은 문을 닫는다. 직장도 쉬는 곳이 많다. 약속도 덩달아 취소되게 마련이다. 왕과 만남도 저녁시간대로 바뀌었고 베이징올림픽 대만대표팀 궈타이위안 감독과의 약속은 다음날로 연기됐다.
"자연재해 때문이니 이해해 달라." 늦은 오후에 만난 왕은 미안한 듯 선물을 내밀었다. 왕은 한숨을 내쉬며 "2005년까지 CPBL 관중수가 많았는데 2년 새 줄어들고 있다"며 "태풍 말고 흥행 돌풍이 일어나야 한다"는 농담을 했다.
왕은 CPBL의 국제담당이다. 보스톤에서 건축을 공부한 엘리트다. 대만으로 돌아온 뒤에도 건축 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나 야구가 좋아 CPBL에 입사했다. 대만야구계에는 이런 사람이 꽤 많다.
식사를 주문하려는데 왕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현대는 어떻게 됐나." 그는 이어 "대만도 싱농과 성타이가 모기업의 경영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싱농은 기업사정이 좋지 않아도 구단주가 야구를 워낙 좋아해 팀을 팔지는 않을 테지만 성타이는 지난해부터 60~70억 원에 내놨는데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없다“고 말했다.
왕이 현대 사정을 궁금해 할 만도 했다. 그러나 왕이 성타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가 현대를 보는 것과 달랐다. 왕은 "성타이는 선수를 방출해서라도 재정을 탄탄히 해야 한다. 돈을 벌지 못하고 적자가 쌓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성타이를 인수하지 않겠다는 건 대만 경제사정이 좋지 않고 성타이가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올시즌 현대가 재정압박 속에서도 주전선수를 팔지 않는 것을 가리켜 국내에서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켰다"는 말이 많았다. 현대의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반도체가 현대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한국야구발전을 위해 기업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그러나 프로야구팀은 불우이웃이 아니고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KBO나 현대 구성원 그리고 현대를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 인수대상 기업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는 대신 구단을 인수한 뒤 예상되는 수입과 미래 가치 등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있는가. 아니나 다를까. 왕의 입에서 가슴이 뜨끔한 질문이 나왔다.
"한국프로야구는 돈을 버나."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않자 왕은 "대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인기구단 슝디는 3년 전까지 TV 광고를 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 게다가 대만 구단의 적자폭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
올시즌 한국은 400만 관중을 넘어섰다. 대만은 목표인 100만 관중 돌파에 실패하고 90만 명 선에 그쳤다. 관중수로만 따지만 차이가 크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에서 관중과 입장 수입은 별개다. 공짜표와 액면가보다 싸게 볼 수 있는 입장권이 나도는 한국프로야구에서 400만 관중이 들어왔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대만구단의 적자폭이 작고 흑자까지 내는 구단이 있는 건 대만프로야구가 철저하게 시장 중심의 사고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라뉴가 좋은 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재주를 부리는 곰이 돈도 챙기는 시스템이 갖춰진 까닭이다.
CPBL은 중계권을 독점판매한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복수의 방송국이 중계하는 법이 없다. 올시즌 CPBL 독점중계권은 대만의 유명한 방송국 <웨이라이>가 샀다. <웨이라이>는 하루 종일 야구만 틀어주는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왕은 "중계권료로 101억 4천800만 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라뉴의 경우 한 해 40억 원의 운영비를 쓴다고 볼 때 중계권료로 받는 17억 원은 많은 돈이다. 성타이, 싱농 등 구단 사정이 어려운 구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CPBL 운영비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세븐일레븐(퉁이)이 메인스폰서다. 올스타전이나 대만시리즈에서 광고비 등을 벌기도 한다." 여기서 벌어들인 돈도 CPBL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CPBL의 예산은 6개 구단에서 나온다. CPBL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 예산을 짜 구단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왕은 "어느 면에서는 대만야구가 뛰어난 점도 있지만 여러 가지로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고 말했다.
대만야구가 넘어야 할 산
CPBL의 가장 큰 고민은 승부조작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구도박 문제다. 대만야구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진 것도 폭력단과 선수들이 연계해 승부조작을 일삼은 탓이 크다.
10월 4, 5일 봤던 라뉴와 성타이, 퉁이 선수들의 유니폼에 부착된 검은 리본도 승부조작과 관련된 것이었다. 8월께 승부조작사건이 벌어져 선수들이 반성의 의미로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다.
왕은 "1997년 승부 조작 사건에 23명의 선수가 개입돼 전부 제명된 사례가 있다"며 "이후로도 근절되지 않고 해마다 승부조작 사건이 일어난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만프로야구에서 승부조작이 빈번한 이유는 두 가지다. 돈의 유혹과 위협이다.
저연봉에 시달리는 선수들은 도박을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폭력단의 유혹에 넘어가기 일쑤다. 만약 거부하면 폭력단의 위협이 뒤따른다.
CPBL은 승부조작 근절을 위해 2004년 안전조를 창설했다. 퇴역경찰로 구성된 안전조는 전국의 경찰조직과 연결돼 선수들을 감시하고 승부조작을 사전에 방지한다. 선수와 심판에게는 엄격한 규제를 했다. 다음날 경기가 있을 경우 자정이 넘으면 선수단과 심판은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통제를 어기고 외출하면 벌금을 매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게 3년간 안전조를 운영해 본 CPBL의 결론이다.
CPBL이 준비하고 있는 승부조작 방지안은 연봉하한선 설정과 연금 신설이다. 왕은 "선수들에게 최소한의 급여와 연금을 보장해 폭력단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며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승부조작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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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라뉴 첸지에성 단장. (오른쪽) CPBL 국제담당 리처드 왕은 한국, 대만, 일본 3개국의 야구교류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사진 한상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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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주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도 CPBL의 고민이다. 왕젠민의 성공 이후 어지간한 수준의 선수들은 해외 진출에 목을 매고 있다. 1990년대 한국에 박찬호 열풍이 불 때와 비슷하다. 이에 따라 CPBL은 내년부터 9년 동안 자국 리그에서 활동하면 누구라도 FA 자격을 줄 방침이다.
당근과 함께 채찍도 휘두를 계획이다. 해외파가 국내에 복귀할 때 2년 유예 기간을 두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이다. "FA제도와 해외파 유예규정은 KBO의 조언을 들었다." 왕이 묘하게 웃었다.
병역문제도 CPBL이 풀어야 할 숙제다. 대만야구선수들은 대졸자가 많다. 다른 나라처럼 고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프로에 입단하는 사례가 없다. 군대 때문이다. 대만은 대학 입학이 아니면 먼저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유능한 선수들이 보다 일찍 해외나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CPBL은 병역면제를 받을 수 있는 국제대회의 수(지금까지는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유니버시아드)를 늘리고 한국의 상무처럼 입대해서도 운동을 할 수 있는 체육부대 창설 문제를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외국인선수 문제다. CPBL과 대만직업봉구대연맹(TML)이 무한 경쟁을 하던 시절 두 리그는 모자란 선수를 보충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외국인선수를 수입했다. 이에 따라 자국 리그가 외국인 리그로 돌변하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올시즌 CPBL은 외국인선수의 보유는 최대 4명, 등록은 3명, 출전은 2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선수 숫자가 문제가 아니다.
대만은 한국과 달리 연봉이 아닌 월봉 단위로 외국인선수와 계약하고 있다. 조금만 부진해도 다른 외국인선수로 교체한다. 따라서 외국인선수들은 오랜 기간 뛰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곤 한다. 대만은 프로리그가 있는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인 1995년 약물검사를 실시했다. 1번 적발되면 8경기 출장 정지, 2번 적발 시는 16경기 출장정지, 3번째는 영구추방이다. 외국인선수들은 입단할 때 반드시 약물검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아 뒤탈도 많다.
한창 외국인선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왕이 "틸슨 브리또를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왕은 "브리또가 한국에서 상대팀 더그아웃에 들어가 난리를 친 적이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한번은 브리또가 나에게 '그때는 참 어리석었다'고 말했다"며 "저렇게 성실하고 착한 선수가 과연 그랬나 싶었다"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은 헤어질 무렵 “2011년이나 2012년에 대만에서 코나미컵을 개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도 돔구장에서.
왕에 따르면 타이페이시에 건설될 4만 5천 석 규모의 돔구장 지반 정지 작업이 내년 초 시작될 전망이다. 정부가 토지를 대고 원흥이 건설비용을 대는 방식으로 만들어질 예정인데 물론 준공 뒤 모든 권리는 원흥이 갖는다. 돔구장 주변에는 호텔과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다.
대만이 돔구장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국제대회 유치다. 국제사회의 미아인 대만이 올림픽이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처럼 큰 대회를 유치할 수는 없다. 그럼 어느 대회의 유치를 겨냥한 것일까.
“코나미컵이다.” 왕의 말이다. “코나미컵같은 국제대회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돔구장이 있어야 한다. 비라도 오면 축제가 엉망이 되지 않나.”
국내에서 코나미컵은 비중이 크지 않다. 지난해 한국대표로 출전한 삼성은 시종일관 무성의한 경기를 펼쳤다.
코나미컵과 삼성을 생각하면 대만도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지난해 대만대표로 출전한 라뉴는 각국 선수단에게 선물을 돌렸다. 싸워야 할 팀 이전에 친구라는 생각에서 나온 친절이었다. 니혼햄 파이터스 더그아웃에 선물을 들고 가자 트레이 힐먼 감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대표팀도 감사해 하며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삼성 더그아웃은 달랐다.
선동열 감독이 “우리는 오늘 상대해야 할 적군인데 이런 선물을 주고받는 게 말이 되느냐”며 대만 관계자를 박대했다. 남다른 각오로 상대팀을 적군 다루듯 한 선감독은 그날 라뉴에게 지자 “이런 대회에 왜 참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선수들의 피곤이 겹쳐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변명하기에 바빴다.
차이를 인정할 때 아시아 야구의 교류는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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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라뉴-퉁이전을 보기 위해 리청칭후구장을 잡은 대만 야구팬들. 31번은 라뉴의 5번 타자 린즈셩의 등번호다.
사진 한상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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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무렵 왕은 "대만, 한국, 일본 사이에 야구교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국야구는 물론 아시아 야구의 발전도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류의 사전적 의미는 "근원이 다른 물줄기가 서로 섞여 흐르는 것'을 말한다.
한국, 대만, 일본야구는 야구의 역사뿐만 아니라 야구가 발전해온 과정, 환경, 규모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한국은 자국리그에 견줘 대만야구를 평가했다. 진정한 교류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한국은 대만야구를 우리 기준에 맞춰 평가했다. 교류의 전제인 대등한 관계는 없었다.
규모에 따른 내실을 따진다면 대만은 한일 야구를 앞선다. 야구 열기면에서도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야구수준을 국제대회의 결과로 평가한다면 우수선수들이 해외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만이 아시아 어떤 나라보다 우위에 있다.
정작 한국이 대만야구를 외면하고 낮춰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한 야구해설가는 그 이유를 "두려움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야구는 우리보다 한 수 위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일단 인정하고 나면 한국이 일본보다 야구 인프라가 뒤지고 국제대회에서 져도 합리화가 된다. 하지만 대만은 다르다. 설령 대만에 돔구장이 10개가 생기고 WBC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우리의 시선이 달라질 것 같은가. 한국과 일본을 아시아 야구의 양대산맥이라고 믿는 한국야구계가 대만야구를 인정하는 건 무한한 책임 소재가 따르는 두려운 일이다."
대만야구의 강점과 가능성에 주목하고 그들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대만야구는 바나나 담장으로 둘러싼 리그로만 기억될 것이다.
SPORTS2.0 제 73호(발행일 10월 15일) 기사
첫댓글 종철님 말씀이 맞습니다 나라크기도 남한의 절반정도 인구도 남한의 절반이 되지않기때문에 결국 나라 역량도 한국보다 적은것 같습니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야구 경기를 하면 절대로 한국야구가 질수 없는 상대이지만 나태해 지면 상당 힘든 상대입니다 야구 말고도 핸드폰 기술이나 반도체 기술을 빼내려는 대만 기업들 이야기가 종종 들리는데 역시 한국보다는 한수정도 접고 들어갈 나라임에는 분명한것 같습니다 ...마이너 야구문화인 대만야구를 이렇게 글으로나마 소개해준 박동희 기자님의 센스에 고마울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