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아시아 서사기행 24 / 카라쿰 사막Karakum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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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쿰 사막의 야생 낙타들
카라쿰 사막 모래의 뚜껑을 연다 모래에는 모래의 말이 있다 거기 내가 사랑하던 기억들이 있다 눈부신 빛이 있고 추락하던 오아시스가 있고 문을 닫아도 스미는 추위가 있다 귀를 기울이면 다음 생을 준비하는 여러 귓속말들이 있다 쑥・아카시아 류의 관목들・가시엉겅퀴 너무 젊은 꿈들은 이미 죽었으나 밤이면 맨발로 깨어나는 카라반 루트의 불빛이 들어 있다 오늘이 아니면 살지 않는 영생이 있다 어디선가 갑자기 바람이 인다 나는 급히 모래의 뚜껑을 닫는다 |
24. 카라쿰 사막Karakum desert
사막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남몰래 눈을 뜨고
바람을 따라 조용히 이동할 뿐
아무 상처도 보여주지 않는다
모래에도 앞뒤가 있다
앞을 보여주며
뒤를 보여주며
바람 속에 끊임없이 몸을 뒤채며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목숨들이 있다
카라쿰 사막이 그렇다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지대로 다시 이동하는 날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경까지는
세 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이동거리
마리의 들판을 지나자마자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 사막 카라쿰
우리는 여기서 아무 꿈도 꾸지 못한다
죽음 같은 침묵과 텅 빈 공간으로의 무한한 이동
아무것도 없음의 광야가 아니라
깨끗한 침묵에서 침묵으로 바뀌는
광활한 관목의 바다
우리는 매양 하루에 한 번쯤은
침묵하는 광야를 이동해야 한다
고독을 견디는 것이 이번 여정의 관건
적막은 도처에 산재해 있어
졸음 조는 순간부터
한없는 따분함 속으로 끝없이 추락한다
사막에는 사막의 소리가 있다
누가 잠드는가
카라쿰 사막 -
‘Karakum’은 ‘검은 모래’라는 뜻
‘검은 모래사막’
그러나 내 눈에 비친 카라쿰은 검지 않다
더위와 추위를 견딘 억센 관목들만이 천지를 뒤덮었다
카라쿰 -
투르크메니스탄 국토의
칠십 퍼센트를 차지하는 거대 면적
아무다리야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은 우즈베키스탄의 키질쿰 사막
서북쪽은 아랄 해
남으로는 코펫닥 산맥kopetdag mountain
코펫닥 산맥 저편은 곧장 이란의 땅
남동쪽은 아프가니스탄
여름날의 지표는 50°
모래온도는 75°
겨울철은 영하 20° 언저리
어느 목숨이 이처럼 치열하게 살아남았을까
저 옛적 호레즘에서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장엄한 카라반 루트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오아시스가 산재해 있었다지만
지금도 실크로드는 죽지 않았다
연간 강우량은 고작 일백 미리 안팎
그러나 줄기는 가늘어도 제법 키 큰 관목과 풀들
지표에는 낙타와 양을 방목하고
사막의 남부에는 카라쿰 운하가 관통하고 있고
지하에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거대자원이 묻혀 있어
생각만큼 목마르지 않다
카라쿰을 관통하는 도로는 열악하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탓일까
낡은 포장길로 사막을 횡단하는 드문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다
이동 중에 우리는
몇 번인가 사막에서 생리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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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쿰 사막의 야생화
키 낮은 관목과 사막에 핀 야생화들의 향기
목숨 걸고 피는 꽃들은 향기도 곱절
대개 억세고 가시가 돋혀 있다
몸집 작은 벌들의 웅웅거림은 흡사
메마른 대지의 조용한 교향곡 같다
저만치 꿀을 채집하는 양봉업자들을 목격한다
이런 척박한 토양에서 구하는 꿀은
어떤 향기와 빛깔을 지녔을까
다른 곳에서는 야생 낙타 몇 마리가
흡사 사막 위를 떠도는 선박처럼 어슬렁거린다
낙타들도 꿀을 훔칠까
인간이 꿀을 훔치는 버릇은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던 솜씨로
인간은 오늘도 야생을 훔친다
오전 열시 사십오 분
갑자기 잔뜩 찌푸린 날씨가 차창에 비를 흩뿌린다
사막에서 비를 만나다니
백 년의 객을 만난 듯 내 가슴이 뛰더니
아니나 다를까
꿈결처럼 잠시 흐득이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친다
이동 중에 국경지대 가까운 식당에서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더위 먹어 나른한 먼 국경을 본다
산 자는 산다
이념을 넘어
궁핍을 넘어
질곡을 넘어
산 자의 목숨은 어디라도 잡초보다 질기다
공식적인 풍요의 지수는 차이가 크지만
투르크멘과 코리아의 한낮은 별반 차이가 없다
가난은 습관처럼 완고한 것
이방의 땅과 나의 땅
풍요와 빈곤이 주는 두 개의 지표
그러나 풍요의 지수는 행복지수에는 그다지 효력이 없다
투르크멘의 표정은 밝고
감자와 옥수수는 아무런 불평을 모른다
오래 여행하는 동안
여행자들에게서 흔히 듣는 소리가 있다
내 나라 코리아만한 곳이 이 세상에 없다고.
그 경우 나는 어디서나 침묵을 선택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말에 그다지 동의할 마음이 없다
고백하거니와
지구, 이 아름다운 행성의 어느 곳이라도
나는 고향으로 삼을 만하다고 느낀다
페루의 가난 속에서도
칠레의 판타날에서도
무너진 잉카와 마야의 폐허에서도
나는 사랑스런 꿈을 꿈꿀 수 있다
대지는 말이 없고 햇살은 어디나 공평하다
이념의 질곡과 종교의 편견과
혈통과 피부의 분별을 내려놓으면
어디라도 낙원이다
코리아의 보리가 익을 때
키르기스스탄의 밀도 잘 익는다
코리아의 자동차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할 때
타지키스탄의 양들은 초원을 떠돈다
한강이 서울을 적실 때
제라브샨Zeravshan 강물은
사마르칸트의 대지를 두루 적신다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