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내용
오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배 신부님 1년에 한 번씩 이날이 오면 반복되는 일 같지만 그분의 생일을 한번 또 기억해 보게 됩니다.
폴란드 출신이었던 이 콜베 신부님은 어린 나이에 수도에 입회를 해서 나중에 밝혀진 얘기지만 어린 시절에 환시 체험을 했다고 그래요. 그 환신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에게 2가지 천을 보여주면서 어느 걸 택할 것이냐라고 묻는 그런 장면이었다고 그래요. 하나는 하얀색 하나는 붉은색 근데 어린 이 콜베 신문님은 정모님께 2색을 다 가지고 싶다고 했다. 그래요.
근데 훗날 인제 콜베 신부님이 순교하고 나서 시성되는 그 과정에서 인제 그분의 이야기가 공개가 됐는데 흰색은 수도자의 그런 정결함과 청빈함을 상징하는 수도 생활이었고 붉은 색은 순교의 영광을 얻는 그래서 이 성인이 2가지를 다 영광을 얻으셨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이 막시밀리안 꼴비 신부님에 대한 영화가 제작이 됐는데 2개의 왕관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이 됐더라고요. 인제 기회가 되면 교우분들도 그 영화를 한번 보실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아우슈비츠라고 하는 인류의 가장 큰 상처가 우리 20세기 역사 안에 남겨져 있죠.
물론 수없이 많은 유태인들이 6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잔대미문의 사건이었고 지금 그런 일들이 그 이후에도 민족 말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국가에서 자행된 것도 사실입니다.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일제강점기 시대에 간토 대지진 때 2023년에 그 지진의 책임을 조선인에게 쓸어넣기 위해서 대학살이 일어나서 6천여 명이 집단 학살된 역사도 있고 뭐 르완다나 이런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 종족 제거라는 이름의 미명하에 정말 반인륜적인 범죄들이 일어나고 뭐 지금도 가자지구 이스라엘과 전쟁에서두 민간 지역과 비전투 세력들에 대한 무차별한 폭격이 이루어지고 어 이런 일들은 뭐 인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근데 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이 콜백 신부님은 당신이 그 당시 유태인들이 엄청난 박해를 받고 끌려가니까 그들을 수도원에 숨겨주고 또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애쓰다가 게슈타쿠에 체포가 돼서 결국 강제노역소에 끌려가게 된 거죠. 근데 아시다시피 누군가가 한 사람이 감옥에서 수용소에서 탈출을 하려고 시도하다 붙잡히면 이른바 시범적인 의미에서 10명의 죄수를 무작위로 뽑아서 빚도 안 들어오는 깜깜한 아사방에 넣고 2주 3주를 굶겨 죽이는 그런 벌을 내렸죠 뭐 그 당시에 독일이 했던 어마어마한 참혹한 현실들은 거의 악마적 행위들이었던 거죠.
그때 10명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이 지목됐을 때 울며 자기 이게는 가족과 아내가 있다는 걸로 부둥켜 안으면서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했을 때 뒤에서 그걸 지켜보던 이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님이 자청해서 나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나에겐 가족도 없고 나는 이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아사방에 들어가겠습니다. 해서 결국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하고 이제 홀비 신부님이 남은 9명의 죄수와 함께 이제 아사방에 들어갔다고 하죠. 실제로 그곳에서 2주 3주를 이제 보통 사람들은 캄캄하고 어두운 곳에서 공포에 질려서 오래 견디지 못 하는데 당시 수용소를 관리했던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은 마치 어두운 밤새 어두운 공간 속에 작은 소성당 같았다.
모든 죄수들이 함께 성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목소리로 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랬다고 그러죠 그리고 다 아사를 하고 나서 그 신부님과 남은 2 죄수가 마지막으로, 3주 가까이 살아있는 것을 보구 패널 독주사를 놓고 이제 마지막 생을 마치셨는데 그 이후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꼴비 신부님에 의해서 목숨을 얻은 그 한 폴란드 병사가 그 사실을 증언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90 몇 세가 될 때까지 살면서 그 꼴벨 신부님의 업적을 계속 사람들에게 선포하면서 다녔고 그것이 결국 이 분의 성덕을 기리는 놀라운 업적으로 이어져서 또 이분을 대상으로 기도해서 2명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는 일을 겪고 1982년에 폴란드 출신의 교황이신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에서 성인 품에 추대되었죠. 실제로 저도 독일에서 유학할 때 그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을 때 그 콜비 신모님이 갇혀 있었던 아사방에 가서 그 공간을 문 눈으로 보았는데 그 벽에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벽에 이 벽을 긁어 갖고 손으로 긁어서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 거기 있는 죄수들과 함께 기도하며 오히려 천국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인류 역사에서 무자비한 폭력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우리는 많이 느낍니다. 오늘 에제키의 예언서에 보면 하느님의 그 거룩한 분노가 유대인들에게 내릴 때 그 폭력과 불의에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새기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악인들을 징벌할 때 그들을 살려주는 이야기가 나오죠. 우리도 세상에 불이나 폭력 앞에 서면 가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런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공포에 젖은 이들을 오히려 악의 화신처럼 그들을 유린하고 그들을 통해서 자신적 악마성을 드러내죠 그러나 오늘 꿀비 심은 님이 보여준 이 놀라운 성덕의 힘은 교회 하나의 표징이기도 해요. 오늘 예수님 보급 말씀에 너희 가운데 2이나 3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와 함께 있겠다는 데도 함께 있겠다는 이 약속은 교회가 무엇인가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될 때 거기서 나오는 놀라운 능력을 우리 교회는 경험해 온 거예요.
박해 속에서도 또 엄청난 불의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정의로움과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는 거예요. 그들의 총과 칼과 위협에도 담담하게 맞설 수 있는 건 하느님의 정의가 살아있다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그들의 회유나 협박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죽음을 넘어서 증언할 수 있는 이 복음의 힘을 간직한 사람에게는 진정한 교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오해와 편견 때문에 싸우고 부딪치고 갈등과 상처를 주고받지만 교회는 그런 세속적인 분쟁이나 아픔이 생겼을 때 세속적 방식이 아니라 교회적 방식으로 풀어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단둘이 만나서 솔직하게 대화하고 서로의 속내를 얘기할 수 있는 진실성에 대한 그리고 거기에서 풀린다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시작되는 거죠. 만약에 그게 풀리지 않는다면 그를 설득할 수 있는 2~3사람이 함께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내가 편견은 아닐까 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라는 거예요.
교회가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어떤 고집과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몫을 우리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때 하느님께 맡기라는 거죠. 남을 판단하지 말라 오늘 보금에서마처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대하라는 얘기는 그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그의 불의는 하느님의 공정함에 맡기고 교회와 교회를 잘 지키라는 거예요. 그 사람 때문에 교회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거예요. 가끔 이제 우리 교인들도 단체 활동을 하거나 하다 보면 어느 단체 구성원 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잖아요. 그러면 그 한 사람의 상처가 그 단체 전체에 대한 상처가 되고 우리 교회 전체에 상처가 돼서 교회를 떠나요? 그 교회를 떠나면 괜찮은데 떠나고 나서 욕을 하죠.
그리고 음해하고 그런 악한 영향들이 자꾸만 교회를 이렇게 어렵게 만들면 우리 교회 전체가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는 끊임없이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기 때문에 잘못을 용서해 주기도 하고 끌어안아 줄 수 있는 그런 넓은 자비의 마음도 가지고 인내를 가지고 상처받은 그런 우리 교육 구성원들을 잘 위로해주고 들어주고 그가 다시 치유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제 1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몫인 거예요. 그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그냥 하느님께 맡겨라 그 얘기는 미워하거나 뒷담화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사람에 대해서 그냥 그가 잘못 판단한 것을 언젠간 깨달을 날이 올 거라는 믿음 안에서 그냥 우리는 성실하게 사는 그런 것이 이게 교회 정신이고 또 그런 마음을 불의안 한복판에서 보여준 막 시뮬레아 꼴비 신부님의 이런 성덕이 20세기 지금 우리의 이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성덕의 표징이 된 거 같애요. 그래서 우리도 매일매일이 사는 삶이 막 덥고 짜증나고 뭐가 안 풀리고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이런 불만족의 시대에서 서로 서로를 채워줄 수 있는 작은 희생들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게 서로의 관계에 하나의 힘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내가 죽어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은 굴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복음자 메세지를 우리 한번 주님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송용민 신부
첫댓글 신부님 강론 말씀을 글로 함께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강론 들을때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메모장에 타이핑 하면서 듣거나 다른 곳에 시선을 두기도 했거든요.
이렇게 글로 표현되니 글을 읽으면서 듣게 되어 시각 청각이 함께 작용하여 집중이 더 잘 되고 좋습니다.
꼴베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