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방어전투, 불굴의 감투정신’ 6사단 용사들 최초의 승리 쟁취
北 2군단장 “25일 오전에 춘천을 점령하라” 자주포 등
배속시켜
춘천 방어 책임지고 있던 6사단, 105㎜ 곡사포로 적의 발
묶어
북한군의 남침 3일간 저지하며 방어 성공… 北 당시 군단장
해임
기사사진과 설명
육군6사단 소속 병사들이 1952년
1월 15일 눈 덮인 들판에서 완전군장 차림으로 M1917 중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
북한군은 주공인 1군단으로 하여금 개성-문산-의정부 축선과 동두천·포천-의정부 축선으로 38선을 돌파한 후 서울로 진입하게 하고,
조공인 2군단에는 춘천과 홍천을 점령하고 가평·이천 방면으로 밀고 내려와 수도권에 있는 국군을 포위, 섬멸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춘천 방면으로 내려온 적 2군단장 김광협 중장은 인민군 7사단을 인제-홍천 축선, 인민군 2사단(사단장 최현
소장)을 춘천-가평 축선에 투입해 춘천 공격에 나섰다. 김광협 중장은 인민군 2사단에 “25일 오전 중에 춘천을 점령하라”고 명하고 자주포 등을
배속시켰다. 춘천 방면으로 진군한 적 2사단장 최현 소장은 소련군 출신으로 소련제 장비를 앞세우고 기세 당당하게 춘천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단 예하 4연대에 정면 공격을 시도하면서 한국군을 견제하고, 6연대는 북한강 하류로 우회 침투해 신속하게 춘천을 점령하라고
명했다.
한국군은 6사단이 춘천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6사단은 사단 본부를 원주에 두고 있었지만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를
춘천 정면에,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를 홍천-인제 간에 각각 배치하고, 19연대(연대장 민병권 대령)는 예비대로 원주에 주둔시킨 가운데
6·25 남침을 맞았다. 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사단장은 춘천 북방에 있는 7연대로 하여금 하천 방어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사전에
소양강 변에 예비진지를 구축하게 했고 예비대인 19연대를 즉시 7연대 지역으로 이동시켜 춘천 방어에 주력했다.
25일 새벽 5시가
되자 북한군은 2사단 6연대를 선두로 화천 남방 북한강 하천 부지를 끼고 공격해 들어왔다. 적이 선택한 침투로는 화천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까닭에 강바닥에 물이 말라 접근하기 편했다. 그러나 강 양편 높은 산에 아군 7연대의 105㎜ 곡사포가 기다리는 줄은
몰랐다. 아군 7연대는 며칠 전 귀순한 북한군 병사에게서 획득한 정보로 남침 징후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방어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처음 공격받은 부대는 아군 7연대 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였다. 적의 화포 공격이 강해 처음에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아군 6사단 포병의 105㎜ 곡사포가 불을 뿜기 시작하면서 적의 공격은 좌절됐다. 우회 공격에 실패하자 적
4연대가 정면 공격을 감행해 왔다. 그러나 철통같이 지키던 6사단의 집중 포화와 기관총 사격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적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수차에 걸쳐 재공격을 시도했지만 6사단의 방어벽을 뚫지 못했으며 결국 병력의 40%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보고
퇴각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6·25전쟁 중 운용된 57㎜
대전차포. |
보병이 혈전을 벌이는 사이 적의 자주포는 도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당시로는 탱크처럼 보이는 자주포를 향해 57㎜ 대전차포
사격이 가해졌다. 포탄이 명중했으나 적의 자주포는 잠시 흔들렸을 뿐 유유히 다시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던 심일 소위는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심
소위는 중대장에게 건의,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산모퉁이에 대기하고 있다가 자주포가 나타나자 수류탄으로 적 병사를 죽인 데 이어 자주포 2대를
폭파하고 산화했다.
그런데 이 같은 심일 소위의 희생적인 무용담은 최근, 당시 이 상황을 지켜본 이대용(전 주베트남 공사) 중대장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증언함으로써 논란이 됐고, 국방부와 육군에서는 사실 규명과 진위 판단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사단 장병들의 불굴의 감투정신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춘천 현지에서 부대를 지휘한 임부택
연대장의 공로는 높이 평가돼야 한다.
한편,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 중장은 2사단이 춘천 공격에 실패하자 26일에는 인제에서 홍천
방면으로 들어오던 북한군 7사단을 춘천 방면으로 이동시켜 춘천을 협공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아군의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27일 새벽을
맞았다. 적의 자주포 등은 힘을 쓰지 못했다. 적의 발을 묶어 둔 6사단의 화기는 105㎜ 곡사포였다. 협곡을 따라 진출하는 북한군과 자주포를
105㎜ 곡사포로 격멸시켰다. 적은 이 전투에서 야포 7문, 76㎜ 자주포 16문, 45㎜ 대전차포 2문, 박격포 다수가
파괴됐다.
그러나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 춘천이 포위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육군본부는 28일 오전 철수를
명했다. 6사단은 춘천에서 철수해 홍천으로 이동했고, 6월 30일 홍천에서 원주를 거쳐 충주로 철수했다. 6사단은 8월 1일 낙동강 전선에
배치될 때까지 한국군 중 유일하게 승리한 부대였다.
6사단이 철수하자 북한은 28일 오전, 전차 9대를 앞세워 춘천 시내로
진입했다. 춘천 공격에 실패한 북한군 2군단장, 2사단장, 7사단장은 해임되고 7사단은 12사단으로 부대 명칭이 바뀌었다.
만일
6사단마저 장병들을 전부 외출·외박 보내고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면 북한군의 남침 속도는 더 빨라졌을 것이고 27일 오전에 서울이 함락됐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