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며칠 따뜻해서
봄이 오는 줄 알았더니만
눈발이 날리는 것이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아마도 봄이 오는 가보다.
한걸음 나아갔다가
두 걸음 물러가고
다시 두 걸음 나아갔다가
한걸음 물러가고
그렇게 우리들의 봄도 오는 게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학문중의 하나는
“자기바로보기학”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
라는 그 위대한 경구가
수천 년이 지나도 울림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현명하고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겸손한 사람도
자기에 갇혀 사는 틀에서
벗어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남의 삶을 그렇게 잘 분별해 보면서도
자신의 삶을 바로 보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지
우리는 늘 본성적으로
내 듣기 좋은 것에만 마음이 가고
내 기분에 거슬리는 것은 밀어낸다.
그래서 ‘내로남불’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남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성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사라질까?
교회안에는
상처를 준 사람은 없는데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준 사람은 없는데, 받은 사람만 많다니...
문제는 주고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그러하고
자신의 삶이 그러하기에
자신은 늘
언제나 공정하고 바르고 정의롭다고 하지만
나의 정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나의 공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이기심에 병든 사람들이다.
성령의 깨우쳐 주심이 아니면
평생 자기 착각 속에서 살다가
죄를 품고 죽어버리고 말 죄의 노예들이다.
그래서 천년동안이나
심판이 있는지 모르겠다.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내 안에서 시작되며,
참으로 자신을 개혁시킨 사람은
불평, 불만이 별로 없다.
겸손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꾸어가기에도 분주하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늘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지만
단 한번도 ‘가해자’일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기에
인간관계의 골들이 깊어져 가기만 한다.
성경에서 가장 확실한 개혁의 사람,
그는 예후였다.
예후처럼 우상숭배의 씨를 말려버린 사람은 없다.
엘리사가 보낸 소년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10대째 왕이 된다.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왕하 9:6-7)
그는 정말 단호한 개혁자가 되어서, 그렇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아합과 이세벨의 폭주를 멈추어 버리고, 아합의 아들 70명을 죽이다. 게다가 바알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린다.
“[18]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19]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왕하 10:18-19)
그렇게 하여 모이게 하여 바알 숭배자들을 완전히 처단한다.
“[26]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왕하 10:26-27)
누가 보더라도 확실하고, 속시원한 개혁이다.
정말 빈틈없는 철저한 개혁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을 향해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분명하게 개혁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다.
그것이 예후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이다.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28-29)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31)
우리가 바로 선다면,
우리가 말씀위에 바로 선다면,
우리가 진정 사랑과 진리위에,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은혜의 삶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주님 손에 들려진 온전한 선한 능력이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중세교회를 개혁한
개신교회는 또 그들의 만행을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을 개혁하는 자들이
똑 같은 억압과 탄압, 이기심과 교만, 탐욕의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개혁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천수답의 글에서 옮겨본다.
가장 경건해 보이지만 가장 위험한 신앙은 이기심이라는 독극물이 섞인 신앙이다. 이기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무색무취의 독과 같아서 알아차리기 쉽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본인조차도 때론 착각할 정도로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이기심의 독에 중독되면 가장 열심히 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계속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철저히 자신은 숨기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신앙인이 된다.
모든 것을 자신이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하면서 겉으로는 신앙을 내세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참 어렵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다. 저들은 행동으로는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종교적이었고 나아가 신앙적인 것처럼 비췄다. 그렇게 그들은 영적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해서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기심의 독에 중독된 빗나간 신앙인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사랑이라는 원칙보다는 자신이 드러나고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만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으면 팔짱을 끼고 오히려 진행하는 사업이 성공하지 못하길 마음속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이런 이기심의 독은 아주 넓게 그리고 매우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무서운 독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설마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기심은 예수님을 벗어나면 언제든지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의 영혼에 넘실거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족적으로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려왔다. 너도나도 입만 열면 그분이 오실 것이라고 그들의 기대와 소망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정작 저들의 마음과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어서 구주의 참된 성품과 사명 그리고 그분의 본질적인 사역에 대하여는 매우 무지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기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가 왔으나 메시아인지 몰랐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미 저들의 신앙은 이기심이라는 독이 퍼져서 분별력을 상실했고 사탄은 그들이 구주를 거절할 수 있도록 그동안 철저히 준비시켰다. 그들은 인류의 구주가 아닌 자신들의 메시아, 이스라엘의 영웅, 로마로부터 저들의 민족을 구원할 민족의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들은 죄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류의 구원이나 자신들을 그 이기심으로부터 건져 내실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세속적 권력에 집착했다.
그렇다면 이런 이기심에 중독된 신앙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경험일까?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우리가 행동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뭐가 다른가? 저들의 잘못과 실수를 지적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노선을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초림 하실 때 국가적인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분이 다시 오실 시간이 임박한 지금 영적 이스라엘의 상태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탄은 지금 기민하게 움직이며 소위 교회 안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스스로 자만하게 하고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살후 2:10)로 역사하고 있다. 교회 안에 이기심의 독을 풀어서 사람들이 이 맹독에 중독되어 죽어가게 한다. “나, 나, 나” “자기, 자기, 자기” “우리, 우리, 우리”를 외치면서 나에게 좋으면 모두 좋고 나에게 안 좋으면 모두 싫은,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인류의 구주가 아닌 내가 만든 구주를 기다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거절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 아버지!
불쌍한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아픔과 상처만 가득한 우리의 삶을
치유해 주옵소서.
끊없는 미움과 시기, 오해와 아픔이
주님의 십자가로 치유되게 하시고,
진정한 변화와 개혁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도와주옵소서.
주님과 교제하는 신령한 즐거움들이
참된 평화와 기쁨의 노래가
환희와 용서의 화해가
우리안에 물결되어 넘실되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미움의 먹구름이 걷혀지고
오직 사랑과 용서와 이해만이 가득하게 도와주옵소서!
미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사랑과 봉사, 헌신의 봄날이 우리의 삶에
행복과 감사의 꽃들을 피워가게 하여 주옵소서!
https://youtu.be/7Uys0OqmItE
https://youtu.be/a-t2CK6RR6E
https://youtu.be/wG1DWCYCwBw?list=PLIiS6SHbut0o0MLDY-eo3oCfLDygR9E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