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쉬운 성경 시편 26편 1 - 12절
1 여호와여, 나에게 죄가 없음을 밝혀 주소서. 나는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굳게 믿었으며, 한 번도 두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2 여호와여, 나를 이리저리 시험해 보시고, 내 마음과 생각을 깊이 살펴보소서.
3 주의 사랑이 항상 나를 감싸고 있기에 내가 변함없이 주의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4 나는 거짓말쟁이들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5 악인들의 모임에 나가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고, 나쁜 사람들과는 함께 앉지 않습니다.
6 여호와여, 결백한 마음으로 손을 씻고 주님의 제단에 나아갑니다.
7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모두 전파합니다.
8 여호와여, 주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 주님이 계시는 집을 사랑합니다.
9 죄 있는 자들과 함께 내 목숨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게 내 생명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
10 그들은 악한 음모를 꾸미며,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이 가득합니다.
11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12 내가 안전한 곳에 서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내가 여호와를 높이 찬양하겠습니다.
<묵 상>
1. 본문은 어떤 상황이나 배경 속에서 지어졌는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갈 때에 다윗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았고, 그런 자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나에게 죄가 없음을 밝혀 주소서. 나는 깨끗하게 살아왔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굳게 믿었으며, 한 번도 두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완전하게 행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죄가 없고,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살아왔다’로 번역된 단어는 ‘흠이 없음’과 ‘온전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짐승이 병들거나 상처를 입은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는 사람들이 아주 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에 노아에 대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완전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노아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르고 온전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자신도 함께 죽어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아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라”(왕상 9: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이 온전하였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다윗이 스스로 완전함에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바른 마음과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기를 몸부림 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판단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함의 표현이 아니라 간절한 호소의 표현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시험해 보시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깊이 살펴달라고 합니다(2절). 여기서 '시험하다', ‘살피다’, '단련하다'는 모두 제련소에서 금속을 단련하기 위하여 불순물을 걸러낼 때에 사용하던 말입니다. 살피는 것은 광산에서 캐온 철광석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것은 그 품질을 확인하는 것이고, 단련하는 것은 금속을 풀무(용광로)에 녹여서 그 안에 있던 불순물을 걷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세 동사의 공통점은 겉만을 확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속을 분석하고 확인하여서 그 본질을 알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금속이나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단련해 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중심을 살펴봐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사랑이 항상 자신을 감싼다고 합니다(3절). 여기서 주님의 사랑은 선행적인 사랑과 은혜를 말합니다. 다윗이 16편에서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늘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이 선행적으로 자기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시는 대로만 우리를 대우하셨다면 우리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행적으로, 그것도 일방적으로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무리 바른 삶을 살아도 자랑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주님의 선행적 사랑하심이 자기 앞에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변함없이 주의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나는 거짓말쟁이들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악인들의 모임에 나가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고, 나쁜 사람들과는 함께 앉지 않습니다."(3b-5절)
3. 주님의 함께하심을 아는 사람은 진리 가운데 행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처럼,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허망한 사람과 악한 사람과는 같은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처럼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과 동행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미워합니다. ‘것짓말쟁이’는 ‘망령되다’는 의미입니다. 십계명의 3번째 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사람과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들'은 '간사하다’, ‘숨기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진리를 행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과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목적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6-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결백한 마음으로 손을 씻고 주님의 제단에 나아갑니다.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모두 전파합니다." 손을 씻는 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정결례를 행할 때에 하던 행동입니다. 제단에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런 사람들에게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윗은 주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 주님이 계시는 집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8절). 다윗은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여호와를 높이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9절).
<오늘의 기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항상 감싸시는 아버지 하나님! 정직한 마음과 정결한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주님께서 계시는 곳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내가 안전히 살고, 평안히 눕기도 하는 이유와 근거는 바로 주님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