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59/1002]‘이럴 수가?’시리즈는 계속된다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누렇게 익어가는 고향 들판의 농로農路를 달린다. 아, 육십 평생을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마음이 달뜬다. 이렇게 충만하게 좋은 기분 처음이다. 말 그대로 킹왕짱! 한량없이 드높은 가을하늘까지도 날아오를 것 같다. 20km쯤 되는 남원까지 한번 달려볼 거나. 생각지도 않은 자전거 선물로 올 가을은 온통 행복하다. 행복이 이렇게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을. 요임금시절 불렸다는 '격양가擊壤歌'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선물 받은 멋진 안전모까도 쓰고 차가운 가을 새벽바람을 맞으며 , 겨울 눈길도 달려볼 작정이다. 몇 년 전 구순의 아버지가 낡은 전동자전거를 타고 황금들판을 가로지르며 가수 김성환의 ‘인생’을 부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인생극장’에 나온 몇 컷을 마침 가수 김성환이 봤다던가. 곧장 제작팀으로 아버지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 “고맙다”며 전화를 했다던가. 며칠 후 그 김성환에게 전화를 해 “거시기형님, 형님이 전화한 그 양반이 바로 우리 아부지랑개”라고 하며 깜짝 놀래킨 적이 있었다. 임실 사선대축제때 ‘팬 대 팬’으로 두 분이 만나 얼싸안으며, 내 얘기를 했다던가. 흐흐. 나도 역시 두 분의 팬이므로, 우리는 모두 팬인 것이다.
아내와 둘이 차례상을 차린 것은 순전히 “마지막이 될지, 올해는 더 기분이 요상하다”는 아버지 뜻을 존중해서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100퍼’ 차리지 않았을 것이다. 왕년 어머니 계신 대가족시절엔 차례상이 요란했다. 30여가지는 올랐으리라. 이젠 무엇이든 ‘간소하고 조촐하게’가 모토다. ‘사진책 병풍’에 다섯 분의 신위를 붙였다. 메(밥)와 갱(국)을 각각 올리고 기정떡, 나물무침, 보리굴비, 과일(사과, 배, 포도)로 차린 차례상, 한산 소곡주로 3잔을 올렸다. 당신이 손수 쓰신 축문을 낭송한다. “추석을 맞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당신 영전에 약소한 제물을 차렸으니, 강림하시와 흠향하소서”그렇게 차례茶禮를 끝내고 아버지와 나는 음복飮福을 했다.
정말 재밌는 것은, 제수祭需들을 보니, 친구들이 선물한 것이 절반을 넘는다는 것이다. 보리굴비를, 기정떡을, 포도를, 소곡주를 보내온 네 명 친구들의 그 마음씨가 고맙고 가상하여 불쑥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하하. 우연의 일치라고 하지만, 이것 참 솔찬히 ‘거시기’하다. 아내는 그 전날 소고기를 사다가 떡살을 넣어 국을 끓이고, 열무김치를 담그고, 동태전과 계란전 등을 부치며, 최대한(최소한) 성의를 표시하느라 애썼다. 아내의 수고로움이 고맙다. 왜 아니겠는가. 모르면 사람도, 남편도 아닌 것을. 그러나 하루 전 물에 담가 불린 고사리와 취나물은 내가 뜯어 삶아 말린 것이다. 나도 단단히 일조一助를 한 것이다. 이왕이면 아버지와 내가 심어 수확한 땅콩 한 움큼도 올려드릴 것을.
추석 차례상, 성묘省墓, 벌초伐草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500여년 내려온 유교문화儒敎文化의 잔재이고 유물인가? 아니면 우리가 계승하고 이어내려가야 할 유산遺産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우리가 어디에서 왔다’는 근본 뿌랑구(뿌리)를 잊지 않고, 추모하고, 고마워하는 것만큼은 미풍양속美風良俗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하지만 ‘성인聖人도 여세출與世出’이라고, 아무리 성인이래도 세상(세상의 시류) 따라 살 수 밖에 없는지라, 아버지 세대가 거去하시면, 이런 것들이 싸그리 허례허식虛禮虛飾으로 치부되어 자취를 감추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가 마지막일 거다”는 아버지의 한숨 섞인 푸념이 지독히 듣기 싫으면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을 어떻게 하랴.
“올해 차례상은 내 친구들이 차려줬네”라는 나의 말에 부자父子가 웃었지만, 아내와 친구들의 노력과 배려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소박하고 아담한 차례상을 차릴 수 있었을까? 하여, 오늘의 일기 제목은 ‘럴수, 럴수, 이럴 수가’이다. ‘이럴 수가 시리즈’는 계속된다. 헐∼이다.
첫댓글 친구부부의 자전거타고 꼬불꼬불 시골길 달리는 모습을 그리며 넋두리합니다.
우리엄마 한때는 일년에 제사만 아홉번 거기에 명절두번을 지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꼬?
애꿋은 막내인 나는 제사차림 심부름을 죽자했으니 지금까지도 제사상차림은 잘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둘 정리하여 아버지제사까지 큰형님댁으로 모셔가니 허전 시원 섭섭하다
어머니는 제사에 한이 맺히셨는지 돌아가시기전 유언을 하셨다 나 죽으면 방안제사는 하지말고 나 죽은날 산에나 다녀가거라.
그래서 해마다 음력 4.13일 엄마가 좋아하시던 단팥빵.감자갈아만든 부침개를 싸들고 소풍겸 무주부남 산소를 찾는다.
엇그제 미리 성묘를 아들 손주앞세워 다녀오니 반가워하실 엄마 모습이 훤히 떠올라 그리움이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