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작성 40년 소고
손 원
20대에 공직에들어서 40여 년간 봉직했다. 그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일이라면 공문서 처리라고 하겠다. 다른 이의 공문서를 받아 처리하기도 하고 직접 공문서를 작성하여 시행하기도 했다. 공문서는 기관의 의사를 표현하는 공적인 문서이자 얼굴이다. 공문서는 작성자, 검토자, 협조자, 결제자 등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여 작성, 관계자가 서명하여 책임을 지는 실명제다.
70년대 공직을 시작했을 당시는 물론 공문서 작성이 어려웠다. 공직을 마감할 때까지 공문서 작성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대부분의 공문서는 한 페이지 정도이고 추가 자료는 붙임으로 한다. 그 한 쪽짜리 공문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거기에는 업무의 취지, 목적, 협조 사항, 홍보 효과 등 광범위한 내용을 축약하되 확실한 의사 표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공문서는 기관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직 초기부터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심혈을 기울여 공문서를 작성했다. 당시 공문서 작성은 거의 수기였다. 타자기가 귀해서 공용으로 사용했고, 타자에 익숙지 않아 타자수를 두기도 했다. 내부 문서는 수기로 하고, 외부로 보낼 문서는 타자수가 작성했기에 타자기 옆에는 공문이 수북이 쌓이기도 했다. 수기 작성은 직접 하여야 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글씨가 개발새발이었으니 윗분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듯이 글씨를 보고 내용을 검토하면 짜증을 내기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런 일이 매번 반복되니 공직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다음은 더 나은 문서를 만들어 윗분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하지만 공문서 작성은 상당한 숙련과 노하우를 필요로 했고, 사람마다 스타일도 달라 징찬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공무원 초임기에는 공문서 한 장 작성하는데 하루가 걸렸을 정도다. 대면하여 몇 단계 검토와 결제를 득하다 보면 수정을 하게 되고 간단한 수정이 곤란할 경우는 재작성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80년대 중반에 전동타자기가 보급되고부터 문서 작성이 다소 수월해졌다. 졸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서 작성을 하다가 수정을 할때도 글자를 지우는 기능이 있어서 지워진 위치에 타자하면 되기에 정말 편리했다. 중요한 보고서는 필경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소위 병풍 보고서다. 두꺼운 모조지에 한자 위주의 붓글씨로 품격을 더했다. 도청 내에 필경사가 십여 명은 되었다. 붓글씨를 의뢰하려면 먼저 16절지 두세 장 분량을 기획하여 필경사에게 내밀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한 건의 병풍 보고서를 쓰는 것만 해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들도 밀려드는 붓글씨 의뢰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였다. 그렇게 어렵게 작성한 병풍 보고서지만 중요한 보고서기에 결제단계에서 수정이 몇 번 있기 마련이고 다시 필경사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90년도 들어서 문서작성용 컴퓨터인 워드프로세서가 나왔다. 문서작성의 일대 혁명이었다. 필경사의 역할이 줄어들고 타자수 역할이 늘어났다. 작성된 문서의 수정과 재작성이 용이하여 능률적이었지만 타자수에 의존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자적 문서가 아니었기에 출력하여 활용하고 완성된 문서는 편철하여 보관했다. 개인별로 문서보관용 철제 캐비넷이 있었다. 캐비넷이 가득 차면 문서고로 이관하여 보관하였다. 연초가 되면 지난해 생산한 문서를 문서고로 이관하기도 했다. 오늘날 전자문서와 다른 점이었다. 전자문서가 일반화되고 부터는 캐비넷과 문서고도 불필요해졌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전자정부 기치를 내걸고 종이 없는 공문작성이 가능해졌다. 퍼스널 컴퓨터가 개인별로 보급되어 진정한 혁신이 일어났다. 기관 내 모든 컴퓨터가 연결되어 결제라인을 비롯하여 지정하는 사람과 전자적 소통을 하는 것이다. 결재 대에 문서를 넣어 복도를 오가는 시대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비대면 결제인 것이다. 비대면 결제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다. 먼저 편리함과 신속성이다. 종전 수기로 작성한 문서는 관계자를 찾아다니며 결재를 득해야 했고, 문구 수정이라도 있으면 지저분해져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전자결제는 비대면 결제이기에 전자문서를 보내면 수시로 실시간 올라온 문서를 보고 서명하면 된다. 대면결제에 비하여 검토할 시간이 많아 충분한 검토를 할 수 있고, 문구 수정도 가능하다. 문서가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수정 이력도 남겨지기에 책임성 있게 품격 있는 문서로 다듬어진다. 다만 비대면이기에 담당자의 의견을 충분히 들을 수가 없는 것이 단점이다. 그럴 때는 가끔 담당자를 호출하여 의견을 직접 들어 보기도 한다.
전자결제, 프리젠테이션 등 행정환경이 수기 시대에 비해 상전벽해로 변했다. 수기에서 아날로그 이제는 디지털 시대의 행정이다. 공문서 한 장 생산에 꼬박 하루가 걸려 완성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순식간에 이뤄진다. 담당자가 초안을 작성하여 결제를 올리면 동시에 관계자의 PC에 나타나서 클릭 한 번으로 처리된다. 물론 검토를 해야하고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한다. 업무에 대한 정보취득도 쉬워 단시간에 최적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에 단시간에 최적의 의사결정 문인 공문이 완성되어 시행된다. 정부 문서인 경우 공무원의 수고를 덜 수가 있고 신속한 대국인 서비스로 이어진다. 은행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동화 기기로 입출금하기에 창구직원의 수고가 줄어들고 직원 수도 현격히 줄었다.
사무의 자동화와 온라인 처리가 사회 전반에 걸쳐 일반화되어 일손이 줄어들어 보다 대면 서비스의 여력이 많이 생긴샘이다. 하지만 절약한 인력에 비해 서비스 질이 개선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해마다 공무원 수가 늘어나도 행정서비스 개선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업무가 다양해지고 세분화 되어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는 있지만 고객서비스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아쉽다. (2023. 2. 5.)
첫댓글 구구절절이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거의 동시대에 직장은 달랐지만 40여년간 공직을 거친 입장이라 다큐멘타리 영상을 보는 듯한 감동을 주네요. 필경사, 차드사, 타자수 등, 참 많이 듣고, 부르고, 신세를 져온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결제자의 어떤 질문에도 조리있고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해 내용의 완벽한 숙지와,. 결제판을 들고 기관장실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그 때 그 시절의 모습이 눈으로 보는 듯 합니다. 잘 읽고 감상했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 공무원들은 문서작성에 있어서 참으로 변화무쌍 하였습니다. 타자기부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습니다. 병무담당을 하면서 상고출신 여직원에게 4벌식 타자를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기성 세대에게는 평범한 추억이겠지만, 요즘 세대들에게는 전설이 될 듯해서 적어 봤습니다. 공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