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02
10월3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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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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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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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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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혼, 그 뜨거운 감자>
한 집 혹은 두세 집 걸러 이혼가정이 생겨나는 ‘꽤 심각한’ 우리 사회 현실 앞에 ‘죽어도 이혼만큼은 안 된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신자들도 밥 먹듯이 어기는 상황 속에서 구색만 갖춰놓은 교회법처럼 여겨져 씁쓸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왜 끝까지 강경하게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를 고집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까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을 바탕으로 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이혼은 가능하다’는 유다 이혼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혼인 관련 율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입니다.
흐트러진 백성들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바로잡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윤리질서의 회복을 위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쇄신을 위해 단행하신 예수님의 혁신 작업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의 설정이었습니다.
혼인을 통해서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결혼한 두 사람이 갈라선다는 것은 한 육체를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리하고 부자연스런 일임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언제나 흔들리고 유한한 인간이 제정한 것이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파기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불멸의 것입니다. 그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이기에 우리 가톨릭교회는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구체적인 현실, 세태, 상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가정과 혼인’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늘 소년원이나 분류심사원, 교도소를 찾아다니고, 가출 비행 청소년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은연중에 제 머릿속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화되더군요.
부모의 불화, 별거, 이혼=자녀들의 고통, 방황, 일탈행위, 비행...
그래서 제가 쓴 글도 부모의 이혼은 곧 자녀들의 비행과 직결되니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참으라는 식의 내용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얼마 후, 몇몇 분들의 피드백을 받았는데,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억지스런 논리로 상처 입은 분들께 정말 죄송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좁은 안목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이혼했다고 가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혼가정 청소년이 다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혼했지만, 자녀들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더 훌륭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었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누구나 다 판단착오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루어지지 말았어야 할 잘못된 결혼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한 평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인데, 어떻게 한 평생을 참겠습니까?
다양한 케이스들을 접하면서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각 개별인간들이 겪고 있는 말 못한 사정들, 고통들,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 그리스도 신자된 도리로서 목숨을 걸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교회 차원에서의 진지한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겠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회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목적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가정과 구성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서 다시금 빨리 추스르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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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93V3wu9G6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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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 들어갈 길이 없다>
오늘 복음은 혼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한 번 성사된 혼인은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혼인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믿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인은 행복을 위함이라기보다는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코스가 자아의 종말입니다.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기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서도 자기완성을 이루면 안 될까요? 혼자 살아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나를 죽여 피를 내어주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계 안에서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배우면 그 둘은 혼인 관계가 됩니다. 혼인이 아닌 이상 이것을 배울 곳은 없습니다. 사제도 혼인합니다. 신자들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내어주는 법을 배웁니다. 누구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혼인한 사람뿐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을 위해서도 내 피를 완전히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둘의 열매인 자녀가 있음에도 그 능력을 배울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도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다행히 혼인 안에는 자아의 소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혼인이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말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결혼한 아내요, 한 아이의 엄마인 여성분이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가 된 후, 자아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공감 가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러니까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하시면 신앙인이고, ‘그러니까 결혼하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결혼하고 집안일이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밉게만 보이던 우리 엄마가 점점 이해가 된다.
점점 엄마에게 동질감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꾸자꾸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그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엄마는 당연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 엄마는 그랬으면 안 되었던 거였구나.
엄마는 나와 아빠를 미워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남이 먹은 거 치우고 남이 먹을 거 차리고
예전 같았으면 불공평하다고 내가 시다냐고 버럭 했을 일들을
포기가 쌓여 이젠 잘도한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변기가 이렇게 자주 더러워지는지
예전엔 몰랐다.
몇 명이서 쌀을 몇 킬로 사야 한 달을 먹는지
반찬은 뭐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저 빨래는 돌아가다가 언제 끝나는지
밥은 몇 시쯤 차려야 하는지
이런 집안일 계산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뺑글뺑글 돈다.
이걸.... 앞으로 몇십 년을 해야 하나
손목 무릎 아작나도 속으로 눈물 먹으며 한다.
나 말곤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루종일 집안일을 하고 나면 밤엔 쉬고 싶다.
잠자리 갖는 것도 귀찮다.
애 낳고 이제 전업주부로서 일자리도 잃게 되면
나의 자아는 완벽히 끝이 난다.
나는 이제 남편의 성공을 바라는 서포터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돈의 힘은 크다.
집 명의도 남편 쪽...
내 돈은 고작 혼수와 결혼 준비 따위로 다 날려버리고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면..
감히 집안일 반반하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다.
남편도 당당히 퍼질러있기 시작한다.
내가 이 집안을 떠나서 홀로 선다면?
내가 지금 경단이 몇 년인가...
나 혼자 집을 구하고 내가 먹을 음식을 사고 그럴 수 있을까?
겁이 난다.
갑자기 집이 안락하게 느껴진다.
밖에서 실컷 남편 욕을 하며 풀어지면 다시 집에 와 집안일을 한다.
내 남편 욕만 잘 들어주면 되지 그냥 내 갑갑한 속만 풀어주면 되지
떠날 생각은 없다.
이쯤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이다.
남편 성 매수쯤은 무감각하다.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돈이나 벌어와라...
매일 전쟁 같은 아침...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너도나도 자기 일자리로 출발하면
나는 홀로 텅 빈 집에 남아
슥 삭 슥 삭 뒷정리를 하고 집안일을 한다.
햇빛이 좋아 잠시 창밖 풍경을 본다.
남편이 밤에 먹고 그대로 두고 간 상하기 시작한 컵라면.
단 한 번도 먼저 닦여있지 않은 세면대.
식사 후 남편은 누워서 폰 게임 하러 갈 때...
그걸 내가 치우고 설거지할 때...
남편과 자식이 방과 소파를 차지해
내 자리는 부엌밖에 없을 때
내 자아는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할 새에 점점 좀먹어간다... 흩어진다.
과거의 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헉하고 문득 뒤돌아보면 예전 나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서서히 순응하며 하고 있다.
내 자아는 갈기갈기 조각조각 찢어져
내 남편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가서 붙는다.
그들만을 바라보고 그들의 인생과 목표가 곧 내 성취가 되고 목표가 된다.
결혼 후에 머릿속에선 정말 생경한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초반에 그 자아 상실의 느낌이 갑갑하고 익사하는 것 같아
많이 울고불고 발버둥도 쳐봤으나
쇠창살이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 안을
영원히 탓 탓 탓 달리고 있는 거 같아 포기하게 된다.
이젠 멍한 상태로 그 속에서 미소짓고 있다.
여자가 결혼하면 나는 없어지고 엄마가 된다는 말...
말로는 많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 말을 진짜 이해하지 못했다.
진짜 경험해보면 아, 이게 그 느낌이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한다는 건 그전 내 이름 세글자... 내 인생이 죽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집안과 식구들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나갔던
그 자유.
내 목표, 나의 꿈, 사회에서의 내 위치 모조리 분쇄되고
어머니, 아내만 남아 나는 없다.
나는 죽었다.
결혼은 자아의 종말이다.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야 비로소 깨지는 지독한 환상이다.
사랑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가 깨지는 것입니다. 로맨스 소설을 보며 결혼을 환상적으로 여길 때, 그때 사랑을 안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현실은 그와 반대입니다. 실상 사랑은 로맨스가 깨질 때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로맨스는 상대를 이용하여 내 행복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로맨스가 죽을 때 상대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성부라면 아내는 성자와 같고 둘을 이어주는 힘이 사랑의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가 끝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의 실현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하셔서 내어주는 당신들의 피와 생명이 ‘성령’입니다. 쌍방의 이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만 있다면 분열이요 그냥 둘입니다.
사랑은 나를 죽여서 항상 셋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것을 만들기 위해 둘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서로를 죽이는 이 혼인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면 하느님 삼위일체를 닮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자녀도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삼위일체 혼인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제되지 않은 황금 원석입니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어서 이대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정제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순금으로 태어납니다. 용광로는 고통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용광로가 혼인입니다. 불순한 원석끼리 만나서 황금이 되겠다는 게 로맨스입니다. 그건 환상일 뿐입니다. 이 환상이 깨져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데 그 환상이 깨지는 장소가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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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주변에서 혼인생활에 실패하는 부부들을 많이 본다. 혼인의 실패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다. 이번 주간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원초적이고 보편화된 인간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23절)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한 실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 부르리라”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린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24절),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상: 사랑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모세가 한 것,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이것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a): “내게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 즉 구원계획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 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그러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즉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을 해주신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11-12절).
즉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마태오 복음(19,13-15)에도 그렇고 마르코 복음(10,13-15)에도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즉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이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어린이들)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제2독서: 히브 2,9-11: 예수는 새 아담이시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의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강생을 통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모든 인간적 제약과 고통, 그리고 죽음과 악 앞에서조차 무력한 태도를 취하신다.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불행과 절망을 이해하실 수 있다. 이렇게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당신의 형제들”을 부르기 위해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 우리 자녀들이 우리들을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결심하며, 주님의 은총과 지혜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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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따라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담은 하와를 만나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협력자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한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 하느님 앞에서 하와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앞에서 한 말과 지금 이 말이 같은 사람이 한 것으로 보이나요? 아담의 이 말을 들은 하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아담은 남편이 아니라, 이른바 ‘남의 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인류의 첫 부부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을 지녔습니다.
성경이 전해 주는 부부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맞이한 어려움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견뎌 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혼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때로는 ‘남의 편’ 같고, 때로는 ‘부인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겠지만, 남편 그리고 아내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어 한 몸을 이룬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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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1)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로 만나서 함께 사는 일이 ‘사람의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들 가운데에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일들이 분명히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위기를 겪고 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2) 이미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당사자들 못지않게, 어쩌면 당사자들보다 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 교회는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당 상태에 있더라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면,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이 말씀에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작은 이들’을 상징합니다.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는 “안수해 달라고 하였다.”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사람들을 막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던 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로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쪽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작은 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예수님의 일’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언짢아하시며’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에 통로가 되기는커녕 장벽이 된다면, 그래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적극적으로 어린이들을 나에게 데리고 와라.”입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소극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작은 이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작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앞의 혼인에 관한 일에 이 말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은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가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 즉 힘없는 ‘작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작은 이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래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작은 이’가 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작은 이’였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면 ‘큰 사람’이 됩니다.(마태 18,4) 잘난 체 하는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위선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내가 잘나서, 내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인간 세상에서의 업적이나 경력을 내세워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닙니다. 세속에서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업적’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위인전’에는 왕, 장군, 유명한 학자 같은 사람들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업적을 남긴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던 사람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성인전에는, 남긴 업적이 하나도 없더라도 ‘삶’이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성인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의 ‘삶’ 자체를 업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율법 실천만 잘하면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의 선물이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율법 실천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가 생긴다는 것이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권리 같은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내가 지금 들어갈 테니 문을 열어 놓으시오.”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인들 가운데에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악인들 가운데에는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자기가 겸손한 줄 모르는 ‘겸손한 사람들’만 있고, 지옥에는 자기가 교만한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들’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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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외할머니 댁에 가면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많이 싸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주신 보따리를 가지고 서울로 왔습니다. 장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들의 흑백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서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밥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오면 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이웃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나고 하느님 품으로 가는 날에 많은 분들이 멀리서 왔습니다. 외할머니가 보여주신 덕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닿지 않아서 많이 배우지 못한 외할머니는 손주들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모두들 대학을 나왔고, 직장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의 시대에는 대학을 나오는 것도,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손주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 자랑스러움에 외할머니는 마리아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외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되도록 일을 덜 하려고 쉬운 자리, 편안 자리, 고운 자리만 찾은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시밭길도 기쁜 마음으로 가셨는데, 저는 꽃길만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저의 삶이 주어진 좋은 조건 속에서 누린 삶이라면, 외할머니의 삶은 어려움 속에서 일구어낸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며 사제의 길을 가는 저의 삶은 어느덧 바리사이파의 삶이 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작은 정성을 봉헌한 것처럼 외할머니의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제의와 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저와는 달리 외할머니는 나눔과 희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위대한 것은 ‘그가 어떤 능력과 업적을 만들어 냈는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묵묵히 견디어 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짐을 들어주었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과 40년 전만해도 당연하게 들리던 말들이 있습니다. ‘여필종부, 남존여비, 출가외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여자는 결혼하면 시집의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에도 드러났습니다. 여자 아이를 낳으면 죄송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해야 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상속에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시집을 왔다는 이유로 친정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이 차별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전을 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마녀라는 이유로 가진 것을 빼앗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문화적인 이유로든, 종교적인 이유로든, 신체적인 이유로든 여성이 차별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매년 새로운 차가 출시됩니다. 새로 나오는 차는 예전의 차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소음은 적고, 연비는 높고, 편리한 기능이 있기에 운전이 더 쉽고, 쾌적합니다. 새로 나온 차라고 예전에 나온 차보다 나쁠 수는 없습니다. 새로 나온 차를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도 그렇습니다. 매년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됩니다. 사람들은 큰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기꺼이 새로운 스마트폰을 마련합니다. 이유는 새로운 스마트폰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은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뼈로 창조하셨습니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으로 비유한다면 아담은 구형이고, 하와는 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료라는 측면에서도 흙보다는 뼈가 더 강도가 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적으로 보아도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닮은 존엄성이 무시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그런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천년에 한 번씩 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이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닮아 없어지는 시간이 지나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남을 이룬 것이고, 그런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난 그 소중한 인연인 만큼 아끼고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지금 우리의 만남은 치맛자락으로 1000년에 한 번씩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닮아져 없어지는 그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시작이시고,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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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은형 티모테오 신부님]
<가정은 주님의 작은 교회>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방역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사람 간의 전염을 막기 위해 거리두기는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관계 맺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본성에 배치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자신의 가치를 실현합니다.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태어나고 자라며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관계 맺음은 우리 신앙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은 관계 맺음 속에서 당신의 신비를 밝히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관계 맺음 속에서 체험되는 하느님입니다. 그 관계 맺음의 핵심 원리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고 체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는 바로 ‘가정’입니다. 때문에, 가정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밝히 드러나는 ‘주님의 작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복음 10장 9절)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은 ‘주님의 작은 교회’인 가정을 이루는 거룩한 성사입니다.
혼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이 아니라, 두 남녀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기로 다짐하며 하느님과 맺는 거룩한 계약입니다. 하느님과 맺는 특별한 계약이기에 혼인은 인간 스스로 파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혼인을 통해 가정을 형성하고, 가정 안에서 인간은 노동과 생명이라는 가치를 창출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결된 것은 아닙니다.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재림의 그 날, 창조는 끝을 맺습니다. 지속되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당신 모상대로 만드신 인간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창조사업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노동과 생명의 출산은 거룩한 것입니다.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에 코로나19 팬데믹의 위기까지 덮쳐 관계의 단절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마음의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혼인을 통한 가정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사랑의 나눔을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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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윤식 보니파시오 신부님]
<문자로 기록된 규정과 보이지 않는 근본 정신>
오늘 복음은 율법 규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소개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은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맥락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남녀의 혼인이라는 관점에만 제한하여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율법 규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정신을 찾고 이를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예수님,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더 중요한 것을 보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글로, 문자로 기록된 규정과 원칙은 사람의 눈에 명확히 드러나 보입니다. 여러모로 편리하고 깔끔합니다. 지키는 사람과 어기는 사람, 그래서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을 확연하게 구분 지어 줍니다. 잘 지킨 이에게는 그 대가로 심적 만족감이나 안정감을 주고, 잘지키지 못한 이, 어긴 이에게는 반대로 실망감과 불안함을 가져다줍니다.
반면 규정과 원칙의 근본 정신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불편하고 성가십니다. 누가 그것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실상 잘 사는 사람을 못 사는 사람으로 보이게도 하고, 못 사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도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가슴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기에,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찾기도 쉽지 않지만 설사 찾았다 하여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 진위를 둘러싸고 의견의 분열을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 마디로 골치 아픈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이 근본 정신입니다.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의 규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그 근본 정신을 찾고 헤아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남다름은 바로 이점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눈에는 드러나는 남다름이 있어야 합니다.
혼인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접하며, 나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많은 규정과 원칙보다 그 근본 정신, 참 의미를 찾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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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최승호 메다르도 신부님]
<복음이 상식이 되는 사회>
‘상식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주장입니다. 상식을 갖춘 사람이길 바라고 그래서 담고 있는 내용을 알아야 하는 상식이라 주장하는 책은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당장 사용할 수 있고 경쟁할 수 있는 지식과 문장들을 선호하는 요즈음 상식이라 칭하는 내용들이 과연 바르고 진실한 것인가 보편적이고 윤리적 결함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겠다고 돈벌이만을 쫓아 사는 게 상식으로 여겨진다면 도리어 암울하고 윤리적 결함 가득한 몰상식한 사회가 되고 말 테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리사이들의 위선 너머에 있는 혼인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그러하시듯 생과 사를 위한 결단과 순명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릇된 하느님 상으로 이끄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새롭게 세워집니다.
바리사이들은 혼인과 이혼에 관해 남성에게 허락된 특권이요 보편적 상식의 근거로 신명기 24장에 담긴 모세의 율법을 듭니다. 이혼을 허락하는 율법이 아니라 무질서한 혼인을 금지하고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인데 이 법을 악용해 이혼하고 재혼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로 만들어 버렸고 하느님의 뜻과 혼인의 신성함을 제대로 알고 실천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복음 10장 9절) 하느님과 멀어지면 모진 마음이 싹틉니다.
둘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치 부모에게 묻고 배우는 작고 약한 어린이의 마음같이 예수님에게서 들은 가르침을 배우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며 함께 머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섭취하는 음식에 따라 성장이나 건강이 좌우되는 것처럼 환경이나 습득한 정보의 차이로 사고의 격차가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제한과 금지라는 단어의 잦은 등장에 사람과 소통의 시간은 줄었지만 하느님 나라에 관한 배움과 영적 노력은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마르코 복 10장 14절)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하기 위한 근본적인 자세는 그 마음입니다.
제54회 군인 주일을 맞아 군선교를 위해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군종교구에 파견된 마산교구 사제들 가운데 어느덧 제일 선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군사목을 위해 헌신하신 신부님들께 해가 갈수록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다수가 일정한 공간에서 지내는 군 특성상 부대의 방역지침은 더 강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목 관할에 속하지만 주둔지가 다른 신자들은 미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외부에 위치한 성당에는 더더욱 신자들이 방문할 수 없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교 방식을 새롭게 제시하는 가운데 변화가 필요했고 현재도 노력중입니다. 복음이 상식이 되는 이곳이 될 수 있도록 전역하는 그날까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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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주 2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혼인의 의미를 되새겨 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고, 우리 모두는 그분 한 분에게서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남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혼인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 원칙>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르 10,6)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남자나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서로에게 내어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서로 보완해서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할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임을 드러내줍니다.
<두 번째 원칙>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는 것입니다. 이는 혼인이 단지 서로를 위한 인간적인 “약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성사로서의 서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혹은 서로가 결혼합의를 취소하면 그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뗄레야 뗄 수 없는 결속력을 지닌, 아무리 당사자들이 그 합의를 취소하더라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서약’임을 말해줍니다. 곧 상호신뢰의 인격 관계로 묶어진 평생운명 공동체로의 ‘서약’입니다.
그래서 <혼배성사>에서 혼인서약을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 ~~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이하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 사람의 서약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수도자들의 서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서약임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은 상대를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맞이하여 평생토록 한 몸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드러내줍니다. 곧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와 의무를 함께 지는 시작이요,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아주며 사랑과 존경으로 함께 나아가는 영적동반자요 협력자로서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은 사랑과 존경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녀인 아기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아기는 자녀만이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아기이기도 합니다. 남편이라는 철부지 아기와 아내라는 힘없는 어린아이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서로의 무력함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자녀인 아기를 사랑하기보다도 남편이나 아내 혹은 공동체의 동료라는 아기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를 우러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서로를 존경함이야말로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결혼서약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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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야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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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10,8)
10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이자,
'제54회 군인주일'입니다.
전 후방 각지에서 국토수호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군인들과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군종신부님들을 기억하는 날이고, 군 사목을 위한 '2차 헌금을 하는 날'입니다.
각 본당에서 봉헌해 주신 2차 헌금은 군종교구의 1년 예산으로써 군 사목을 위해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정성을 담아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생활비에서 얼마를 봉헌하려고 합니다.
연중 제27주일에 들려오는 복음은 '혼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혼인한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혼인의 중요성과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혼인성사로 맺어진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이고, '가장 소중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가정교회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혼인은 성사'가 됩니다. 따라서 부부의 '혼인생활은 성사생활'입니다.
'가정의 사랑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두 번째 권고문'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에서 교황은 가정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낳는 부부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참되고 살아 있는 조각품입니다. 열매를 맺는 사랑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을 상징합니다."(11항)
10월은 '전교의 달'이자,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신비) 전체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을 모아 묵주기도를 바치고,
이 기도로 전교의 시작인 가정교회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 세상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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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맺어진 사람>
마르코 10,2-16 (혼인과 이혼,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맺어진 사람>
하느님께서
사람을 맺으시니
사람과 사람이
맺어지고
사람이 사람과
맺어진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맺으시니
사람과 맺어져서
사람이요
사람과 맺어져야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맺으시니
사람아
맺어 있어라
그리하여
사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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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어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너 사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실제로 동네에 개천이 있었고,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다리 밑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워왔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제 위의 형·누나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형, 누나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잘하는 것이 많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 밑에서 정말로 주워 왔나 봐’라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행려자가 놀고 있는 저를 빤히 보더니, “너 나랑 같이 살래?”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저 역시 이분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혹시 저를 다리 밑에 버린 진짜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진짜로 쫓아갈 생각도 했었습니다. 다른 점만을 생각하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제 고향이 다리 밑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 형제들 얼굴이 다 똑같습니다. 눈꼬리가 처진 것, 주름 많은 것 등등 같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같은 점을 보지 못하면 함께 할 수 없지만, 같은 점을 생각하면 함께 할 이유가 너무 많아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에 대해 다시 물으시고,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즉,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의 말은 바리사이들이 신명 24,1.3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혼인을 제정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이혼의 허락은 상대의 ‘추한 것’이 드러날 때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추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추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를 이루는 같은 점을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어린이를 축복해달라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언짢게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내를 버리는 모습이나, 어린이를 쫓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차이점을 찾으며 갈라내는 모습은 ‘하나’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십니다. 그만큼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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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원하는 것만을 팔 수 있다>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분이 면담하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분께서는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이 가지고 온 스타킹을 사달라고 합니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제에게 스타킹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음은 그분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신부에게 스타킹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사모님께 선물로 드리면 되잖아요.”
“신부는 결혼하지 않아서 아내가 없습니다.”
“성직자가 어려운 사람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건 팔러 오신 것입니까? 도움을 청하러 오신 것입니까? 물건 팔러 오셨으면 저는 필요 없으니 안 살 거고, 도움을 원하시면 사회복지회로 가시길 바랍니다.”
이분은 욕을 하면서 나가셨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분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무조건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거절되자 그렇게 화를 냈던 것입니다.
장사 잘하는 사람은 소비자의 욕구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소비자의 욕구는 전혀 헤아리지 않으면서 사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이 장사를 잘할 수 없음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헤아리고 있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셔야 한다면서 화를 내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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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길 바랍니다. (군인주일을 맞아 기도와 더불어 물질적 후원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것 아니냐?”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아껴줄 것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가만히 보면 쟤가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하고 아담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애를 사랑할 거 아니냐?”
하느님께서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남자만으로도 그리고 여자만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각각 나름대로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이 있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줘야 할 동반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니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 받아야 할 고유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서로 나를 위한 맹한 것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7)라고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의 요건을 보면 먼저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 의지 않고 자기 짝을 만나 독립된 자기 생활을 위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다 큰 자식이 자기 생활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손을 벌인다든지 얹혀사는 것은 불효이며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식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 비관하는 어르신도 계신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혼인 서약을 보면 “나 000은 당신을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계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괴로울 때, 아플 때가 그렇습니다. 그때 참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계약의 충실성이 드러납니다. 계약의 충실성 안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두 사람이 가꾸어가야 할 과제이며 의무입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줌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배우자를 “거들 짝”(창세2,1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둘 짝을 만나는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살아온 삶의 양식이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는 기분이 남자는 1.책임감이 앞선다(27%). 2.자랑스럽다(18.9%). 3.어른이 된 느낌(16.2%) 4. 기타 (37.9%)의 순입니다. 그에 비해 여자는 1.섭섭하다(41.9%) 2.어른이 된 느낌(16.1%) 3.책임감이 앞선다(12.9%) 4.기타29.1%)로 조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고려하는 사항을 보면 남자는 1.성격(27.3%) 2.외모(22.8%). 3.가정환경(21.4%) 4.사회적지위(16.5%) 5. 종교(12%). 그리고 여자는 1.사회적 지위(25.6%) 2.성격(24.2) 3.가정환경(19.3%). 4.외모15.7%) 5.종교(15.2%)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 “여자는 결혼할 때가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지 못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강요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서로 ‘너와 나는 이것이 틀리다’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었으면 죽기까지 그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 준 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혼인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시집가면 그 집의 귀신이 되라.” 이 말씀은 혼인을 했으면 절대로 갈라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 이라고 하는 데 인연은 우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만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한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통해서 나도 구원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신의와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해서도 안 되며 하더라도 원인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엮어진 이상 사랑을 더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에페 5,22.33) 결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여 행복한 날 이루시길 빕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하고 일상 안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 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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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일치의 여정 공동체>
-중심, 일치, 개방, 인내-
"주님은 한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리라."(시편 128,5)
화답송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만 30년전, 1991년 10월 6일 바로 나해 오늘 연중 제27주일 미사 강론후 당시 마르틴 아빠스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이때 강론 결론 부분에서 인용했던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시집에서 나오는 ‘결혼에 대하여’라는 시는 언제 읽어도 공감이요 감동입니다. 비단 부부가정공동체뿐아니라 수도가정공동체에도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참 보물같은 시입니다. 30년전에는 맨 끝에 인용했지만 30년 후인 오늘은 맨처음에 인용합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 놓을 때에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신의 고요한 기억속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그대들 영혼의 나라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으로
마시지 마라
서로의 음식을 주되 한쪽의 음식에 치우치지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때로는 홀로 있기도 하라
비록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 속에 묶어 두지는 마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처럼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부부사이 이보다 더 좋은 잠언성 시를 발견한적이 없습니다. 부부공동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가정공동체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보여주는 황금같은 시입니다. 한마디로 주님 안에서 주님을 중심으로 성인공동체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마침 24년전 ‘사랑’이란 제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참 가장 큰 기적이, 정말 힘든 일이 남남의 남자 여자가 하나가 되어 사는 부부생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잘 살고 못살고에 상관없이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성인이요 구원이라 주저없이 말합니다. 또 부부는 혼자 천국 입장 못하고 단체입장이다. 둘 합한 점수 둘로 나눠 평균 60점 넘어야 구원이라 합니다. 혼자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졸혼이라는 말도 회자됩니다. 결혼의 졸업! 이혼이 아닌 졸혼, 궁여지책이지만 노녀부부의 결혼 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 이혼율이 거의 50%에 육박합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 혼자의 삶이라면 이 또한 판단할 일이 아니겠습니다. 부부결혼생활에 실패가 인생 실패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공동체 안에서 다시 시작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예전 신학교 시절 교회법 교수신부님에게 들은 로마 유학시절 마지막 혼인법 교수님의 결론이랍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하여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아마 예수님의 입장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칼의 노래’ 김훈작가와의 인터뷰 기사중 한 대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거장의 책을 만들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많아요. 김훈 작가님이 저에게 ‘아버지는 뭐 하시느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놀라셨어요. 엄마는 고아였고, 우리 집엔 항상 엄마, 언지, 저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엄마가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면서 딸 둘을 무사히 대학까지 졸업시킨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김훈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엄마가 진정 성인이시구나, 엄마한테 잘해드려, 책만든다고 깝죽거리지 말고, 네가 뭐나 되는 것처럼 어깨에 주지 말고, 무조건 엄마한테 잘 하라’는 말씀이 너무나 뭉클했어요.”
20년 이상 만나며 고백성사와 미사를 자주 봉헌하는 결혼 40년쯤의 어느 자매일화도 생각납니다. ‘죄지으며 사는 것보다 이혼하여 죄 안짓고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에 ‘죄를 짓더라도 함께 살아야 구원이라’고 단호히 충고한 자매인데, 또 남편이 가출한채 몇 개월 지난 후 추석을 앞두고 여러번 전화와 문자로 연락하여 집에 들어왔다는 말에 칭찬과 격려의 말을 전송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자매님, 사랑과 인내의 승리입니다. 형제님 탓하지 말고 친절히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신부님,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 도와 주셔서 제가 호흡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순교적 삶을 사는 부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함께 살아도 무관하게 살아가는 부부도 많을 것이나 함께 살든 혼자 살든 주님 안에서, 주님의 교회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며 품위있게 살면 누구나 성인이요 구원이라 믿습니다. 부부가정공동생활이나 수도가정공동생활, 또는 어떤 형태의 공동생활이든 다음처럼 살면 구원입니다.
첫째, 주님 ‘중심’의 삶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야 삽니다. 바로 사랑의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모두가 중심인 주님을 바라봐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전에서 공동시편기도와 미사전례를 바치는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이렇게 아담에 협력자 하와를 마련해준 분이 하느님이시니 하느님 중심을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해 존재합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영도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영원히 현존하시는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멘토요, 평생 바라봐야 할 중심입니다.
둘째, 주님 안에서 ‘일치’의 삶입니다.
혼자는 환상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가 지옥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주님은 오늘 창세기 말씀을 다시 새롭게 확인하며 부부일치의 원리를 밝히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주님 안에서 둘이자 하나요, 하나이자 둘인 부부들입니다. 법조문이기보다는 주님의 간곡한 소망이 담긴 말씀이자 끝까지 부부일치를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연애는 황홀한 착각이요, 결혼은 참혹한 이해’라는 말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말해 줍니다. 바로 여기서 부각되는 주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주님과의 일치와 다양성의 일치는 함께 갑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아가페 사랑도 깊어갑니다. 사실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구별될 수는 있을지언정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다양성은 부요함의 원천이다. 결코 배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런 공동체 형제들의 다양성의 일치 역시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서로 끊임없이 사랑하고 알아가면서 다양성의 일치도 깊어질 것이며 서로간에도 참으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셋째, 주님 안에서 '개방'의 삶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없고 열려 있습니다. 무력하여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어린이들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처럼 편견없이 활짝 열린 가슴으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어린이와 같은 예수님이셨음을 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는 언제나 활짝 열린 하느님 나라의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바로 예수님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안아주라 있는 가슴입니다. 무조건 마음의 가슴을 활짝 열고 어린이를 안듯이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축복하는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마다 마음 깊이에는 참나의 어린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이들을 예수님처럼 마음의 가슴에 무조건 안아들이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안아주고 축복하라!’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넷째, 주님 안에서 '인내'의 삶입니다.
특히 인내의 침묵과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인내의 기다림인 겨울, 봄, 여름이 있었기에 가을의 풍성한 수확입니다. 분투의 노력과 더불어 인내의 기다림중에 익어가는 신망애 은총의 열매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여 견뎌내는 자가, 버텨내는 자가 구원의 승리입니다.
부부가정공동체든, 수도가정공동체든 우정의 성장과 성숙에 인내의 기다림은 필수입니다. 요셉 수도원에서 초창기 초대 원장과의 대화중 잊지 못하는 대목도 바로 인내입니다. 제가 ‘사랑’을 말하자 당시의 초대 원장이었던 선배 사제는 ‘인내’를 꼽았습니다.
공동생활의 네 기본적 원리를 살펴 봤습니다. 결론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심, 사랑의 일치, 사랑의 개방, 사랑의 인내입니다. 주님의 다른 이름도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공동생활의 일치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평생 배워야 할 공부가 사랑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어린이와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르10,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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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관계의 관점에서 다가오십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혼을 주제로 물음을 던집니다. 여성들을 존중하고 약자들에 대하는 예수님의 시선과 배려가 당시 관습의 어떤 부분을 민감히 건드린다고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버리다"는 '헤어지다'라는 표현에 비해 이미 힘의 균형이 깨진 단어지요. '버림받다'라는 표현은 대개 약자의 것으로, 강자 측의 일말의 배려나 존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처지가 그랬고 그런 문화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
예수님은 타인은 물론 누군가를 마음대로 버릴 권리가 있는 당사자도 이 관계를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십니다. 혼인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욕정이 아닌 사랑으로, 이용이 아닌 존중으로 소중히 이 관계를 돌보며 함께 조율해 나가야 합니다.
제1독서는 인류 첫 사람들의 혼인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아담은 주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짝지워주신 "알맞은 협력자"를 보고 부르짖습니다. 이 외침 안에는 기쁨과 탄성, 감사와 행복이 가득합니다.
상대가 내 뼈에서 나온 뼈이고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인식하는 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듯 돌보고 아끼지요. 그가 바로 자신이고 서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마르 10,14)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6)
복음 대목의 뒷 부분에는 어린이들이 등장하지요. 오늘의 말씀이 혼인 논쟁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모든 관계의 문제로 확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태도나 배우자에 대한 태도는 상대가 누구이건 본질은 크게 결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막아섰고, 예수님은 끌어안으셨습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태도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 관계에서는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일관되게 표출되는 태도들일 겁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를 명시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히브 2,11)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그분에게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하시기에 우리를 형제로 받아들이십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예수님께 우리는 한 아버지께 속한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데, 도토리 키재기도 안 되는 우리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고 약자를경시하며 착취하고 버리는 일은 혼인 관계에서건 고용 관계에서건 보통의 인간 관계에서건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건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말씀께서 이렇게 제시해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결과론적으로 이혼의 허용 여부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혼인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 관계 안에서 얼마나 사람을 연민하고 존중하며 섬기느냐의 문제로 보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늘이 열린 것(개천)을 경축하는 오늘, 우리의 지상 순례길에 동행자로 허락하신 이들을 보면서 아담처럼 환호하고, 기쁨과 감사와 연민으로 서로를 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지향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끌어안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랍니다. 주님의 형제인, 그래서 저의 형제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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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ORLE8uYb3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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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 8)
결혼 행진곡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온갖 종류의
결혼 생활이
펼쳐진다.
둘이
하나되는
혼인은
사고 파는
거래가
결코 아니다.
인격의 결합이며
혹독한 존중의
배움이다.
아픔 없는
성장은 없다.
고통 없이
혼인은
깊어질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온
여정이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기대어
살아가는
혼인의 여정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은
하나이다.
받아들이는
사랑이며
덮어주는
사랑이다.
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약함과
약속 사이에
혼인이 있다.
서약은
하나이다.
맺어주신
하느님을
향한다.
사랑은
서약이다.
혼인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혼인을 유지하고
혼인을
성장시키려는
기도와 소통이
있을 뿐이다.
결혼은
의지이며
동의이며
생활이다.
생활을 향하여
생활을 통하여
나아가고 있는
혼인의 여정이다.
혼인의
건너편에는
가장 아름다운
성숙이 기다리고
있다.
맺어주신
하느님께서
끝까지
도와주시는
혼인의 은총이다.
사연 많은
모든 혼인을
위하여
기도드린다.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
(2)
혼인의 여정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혼인은
풋과일이
익어가듯
세월을 통해
영글어갑니다.
아픔 없이
사랑할 수 없듯
서로의 아픔을
껴안으며 혼인은
더욱 깊어갑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입니다.
혼인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알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내어줌과
받아줌으로
동일체가 되고
공동체가 됩니다.
혼인의 약속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약속입니다.
혼인의 약속은
먼저 하느님을 함께
바라보는 것에서
혼인의 질서는
서로를 건져내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혼인의 여정이
삶의 의미가 되고
삶의 축복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서로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랑과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 따뜻한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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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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