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라는 네트워크
by메피스토
요약하면,
인지언어학의 이론인 개념적 혼성 이론을 토대로
마음은 정신공간들의 네트워크라는 소결론을 끌어
내고,
그렇다면 네트워크를 분석하는 방법들을 적용할 수
있을텐데
체험주의/인지의미론으로부터 그 네트워크가 "척
도 없는 네트워크"라는 것을 논증한 뒤
이러한 결론이 가지는 함의로서
철학적 개념들이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보는
내용입니다.
거창해보이지만 얕은 지식과 몇 안 되는 아이디어들
을 연결해본 것이며,
인용은 많이 했지만 인용한 내용에 대한 이해는 얄팍합니다.
1. 이론적 배경
1.1. 개념적 혼성
질 포코니에와 마크 터너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정신공간들의 연결망, 즉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조)
"르브론 제임스가 마이클 조던의 누적 득점기록을
추월했다"라고 할 때,
일단 "경쟁은 경주", "누적득점은 달린 거리"라는 은
유가 원천영역으로 작용하며
르브론 제임스와 마이클 조던은 같은 트랙을 달리는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는 르브론 제임스와 마이클 조던이라는 각각의 정
신공간이
하나의 혼성공간에 표현된 거라는 거죠
즉, 어떤 의미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우리의 마음은
여러 입력공간들이 혼성공간을 창출하고, 또 혼성공
간이 다시 입력공간이 되어 새로운 혼성공간을 만드
는 의미들의 거대한 연결망, 네트워크입니다.
(참고:https://m.blog.naver.com/PostView.na
ver?isHttpsRedirect=true&blogId=jdyi8589&lo
gNo=70099342572)
이러한 이론는 딥러닝, 커넥톰 등 뇌과학의 연결주의
와도 접점이 있어 보입니다.
특정 뇌세포는 특정 인물에 대해 (적어도 좀더 강한
수준으로)반응한다고 하는데,
특정인물에 반응하는 특정세포가 그 인물에 대한
"정신공간(하나의 입력공간이 될 수 있는)"이 된다
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참고:https://www.sciencetimes.co.kr/new
s/%EC%96%BC%EA%B5%B4-%EC%9D%B8%
EC%8B%9D%ED%95%98%EB%8A%94%EC%
8B%A0%EA%B2%BD%EC%84%B8%ED%8F%
AC-%EB%94%B0%EB%9D%BC%EC%9E%8
8%EB%8B%A4/)
개념적 혼성이란 이 특정세포들간의 연결이고 말이
지죠.
이처럼 개념적 혼성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정신공간들을 노드로 한 거대한 네트워크입
니다.
1.2. 배경이론 2: 인지의미론/체험주의
인지언어학과 체험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텍스트인
『몸의 철학』(레이코프와 존슨) 등에 의하면,
추상적인 개념들은 "신체화 된 은유"에서 비롯되었
습니다.
앞서 예로 든 르브론 제임스와 마이클 조던의 예를
다시 보면,
"경쟁"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경주"라는 신체적 경
험의 은유를 통해 개념화됩니다.
1.3. 개념적 혼성과 개념적 은유의 복합 예시
애니메이션 효과나 예능프로그램에서 쓰이는 cg에
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점차적으로 화가 나는 상태에 대한 표현을
목 아래에서부터 붉은 색이 점점 올라와 머리 끝까
지 도달하면
머리 위로 김을 뿜어내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하고 상당히 정형화 된 표현에서
적어도 세 가지의 개념적 은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마음은 물이다
② 몸은 그릇이다
③ 분노는 열이다
이러한 은유는 그 자체로 원천영역과 목표영역이 하
나로 합쳐지는 혼성공간입니다.
그런데 위 이미지는 이 세 가지 은유가 이미지로 상
호 연결되어 구현될 결과입니다.
분노해서 얼굴이 붉어지다가 김을 뿜게 되는 이미지
는
분노로 인한 심리적 동요가 열이 가해진 물로,
몸은 일종의 그릇이자, 열이 직접 가해지는 주전자
로 이해되며
이를 바탕으로 "분노의 표현"은 "물이 증기가 되어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표현되기에 이릅니다.
즉 각각이 독자적인 혼성공간인 "은유"들이
또 다시 "하나의 혼성공간"에서 합쳐지고
이를 이미지로 만든 것이 제가 예로 든
"인물이 얼굴을 점점 붉히다 김을 뿜는 애니메이
션"입니다.
2. 정신공간이 네트워크라면
2.1. 정신공간의 네트워크 유형
정신공간이 네트워크라면,
당연히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 방법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일단 정신공간이 어떤 유형의 네트워크인지
를 가늠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의 종류로는
정규네트워크, 무작위 네트워크, 좁은 세상 네트워
크, 척도 없는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종류에 대해서는 강병남, 『복잡계 네
트워크 과학』 참조
좀더 쉬운 글로는 https://blog.daum.net/welblo
g/477 참조)
제 가설이지만,
레이코프와 존슨의 "체화된 인지" 이론을 고려하면
정신공간 네트워크는 허브가 있는 척도 없는 네트워
크일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이 옳다면, 정신공간 네트워크에서
가장 큰 허브는
신체적 경험에서 비롯된 은유들과 영상도식들일 겁
니다.
가령 "그릇 도식", "천칭 도식", "이동" 등이죠.
이런 의미에서 마크 존슨의 "체험주의"는
의미들의 연결망에서 가장 커다란 몇 가지 허브들을
"신체적 경험"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다는 아이디
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경험에서 비롯된 원형적인 은유나 신체도식
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거의 직접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 "전형
적인 은유"들 또한 상당히 거대한 허브가 될 겁니다.
반면 소위 "살아 있는 은유"는 연결이 거의 없어 네
트워크의 변방에 있을 것이고요.
여기까지 마음이 정신공간들로 이루어진 척도 없는
네트워크라는 가설을 세워보았고,
레이코프와 존슨의 연구결과를 통해 그 근거를 나름
대로 제시했고,
그 정신공간 네트워크가 어떤 형태일 지, 네트워크
의 유형은 무엇이고 허브는 무엇일지에 대해 말해보
았습니다.
2.2․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특징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되는
것이
"멱함수 법칙"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멱함수 곡선은 급격한 변화를 동반하는 비대칭성, 임계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그 이유에 대한 수학적 이해까지는 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직관적으로는 그저 어떤 정보가 처음에는 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지만
네트워크에서 몇 단계를 거쳐 허브에 도달할 정도가
되면
허브를 통해 네트워크 전체에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
어 변화가 생긴다는 식으로
이해하고는 있습니다.
이런 비대칭성, 임계현상 때문에
자주 거론되는 "창발", "자기조직화"와 같이 언급되
기도 합니다.
3. 비교 또는 재해석해 볼만 한 철학적 개념들
3.1. 쿤, 패러다임 전환
개념의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
는 것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그러
나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음에도, 쿤의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일상적인 용법과는 좀 다른데요,
쿤의 패러다임 자체가 좀 다의적이기도 하지만 어쨌
든 『과학혁명의 구조』 등을 참조할 때 ①문제풀이
의 전제가 되고 ②패러다임 간에는 공약불가능하다
는 정도로 이해됩니다.
다만 개념적 엄밀성은 제쳐놓고 보면 패러다임 전환
은 일정한 개념들의 네트워크도 변경시킬 것이라 추
정되긴 합니다.
만약 과학논문 등 문헌들의 방대한 "언어적 표현"을
처리할 수 있다면
패러다임 전환의 순간과 임계점을 대략적으로나마
특정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중심은유, 즉 정신공간 네트워크에서 허브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서요.
복잡계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마크 뷰캐넌 또한 복잡
계에서의 자기조직화 현상을 적용할 수 있을만한 분
야로 패러다임 전환을 꼽기도 했습니다.
(『우발과 패턴』 참조)
전형적인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수 있는 뉴턴 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을 보면,
뉴턴식 절대 공간이 네트워크의 허브일 때에는,
공간은 상자" 또는 "공간은 방"이라는 은유를 통해
공간이 이해되었을 것이고
이에 근거한 서술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나
이후 상대성이론의 공간관념을 반영하는 은유적 표
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임계점을 돌파해 중심이 되는 은유가 전환되어 새로
운 허브가 형성될 겁니다.
※ 이런 생각의 방법론은 『빅데이터 인문학』을 참
조했습니다.
해당 저서는 미국이 하나의 정체성을 구축한 순간을
USA를 주어로 한 문장이 복수형/단수형이 혼재되다가 단수형으로 통합된 순간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던졌죠
(『빅데이터 인문학』 참조)
다만 단언하기는 힘든데요, "공간은 상자" 은유를 이
용해도
"상자의 찌그러짐"이라는 원천영역의 현상을 통해
상대성 이론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킵 손은 『인터스텔라의 과학』에서 '공간이 왜곡되
려면 왜곡될 수 있는 공간, 즉 공간 밖의 공간이 있어
야 한다'라는 식의 서술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공간
은 상자" 은유를 유지하면서 "상자 속의 상자"라는
은유를 통해 상대성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됩
니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엄밀히 말해 "공간은 상자" 또는
"공간은 방" 은유로 구성되는 혼성공간이되, 축이 아
주 튼튼해서 휘어지지 않는 상자의 은유이기 때문입
니다.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은유로서는 "공간은 '철
골구조물로 된 방" 정도 되려나 싶기도 합니다.
이처럼 같은 이론을 채택하더라도, 과학자들이 그 이론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는, 각자가 어떤 은유를 통해 이해하는지에 따라 다를 것이므로, 정신공간 네트워크의 변화를 통해 패러다임 전환을 포착하려면, 구 패러다임의 핵심 은유와 신패러다임의 핵심은유를 정확히 짚어내는 게 중요할 것 같네요.
3.2.. 들뢰즈, 사유의 이미지와 기호의 폭력
관음충 논문 사건으로 악명을 얻었지만, 제게는 여전히 마누엘 데란다의 들뢰즈 해석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데란다는 들뢰즈를 "실재론자"로서 "배치"와 그로 인한 "창발"의 철학자로 보면서 들뢰즈의 세계를 자기 언어로 재구성합니다.
데란다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들
뢰즈 인식론을 "중요성과 상관성"에 배열되는 것으
로 보는 한편, 들뢰즈는 사회관념 등에 종속되지 않
는 "문제들"을 강조한다는 정도로 인식론을 설명하
는 것 같은데요, 존재론에 방점이 찍혀 있어서 그런
지 몰라도 들뢰즈의 인식론에 대한 재구성은 상당히
단촐해 보입니다.
이왕 들뢰즈를 네트워크와 창발의 철학자로 해석하
고 이에 따라 "들뢰즈의 세계"를 재구성한다면, 들뢰
즈의 인식론도 네트워크로 그려질 수 있지 않을까
요. 데란다 스스로도 "중요성과 상관성"이라고 했는
데, 이 자체가 척도 없는 네트워크를 상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정신공
간 네트워크라는 틀은 들뢰즈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 비판하는 "사유의 이미지"란 정신공간 네
트워크의 "디폴트 상태(초기값)"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사유를 강제하는 기호의 폭력이란, 이 정신
공간 전체의 배치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새로운
자기조직화를 유발하는 새로운 연결을 만드는 경험
이 아닐까 합니다.
들뢰즈는 "사유의 이미지 없는 사유"를 말하는 한편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혁신"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 경우 "사유의 이미지 없는 사유"란 새로운 질서
의 자기조직화 이전의 공백 상태에서의 인식, 기존
의 연결망에서 벗어난 새로운 연결망을 창발시키는
인식 또는 그러한 인식을 위한 과정이나 계기라고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3.3. 폴 리쾨르, 살아 있는 은유
살아 있는 은유라는 표현 자체는 니체가 한 것으로
알지만,
폴 리쾨르의 해석학에서 더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지
는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은유라는 제목의 저서도 있고요.
그러나 번역이 안 된 거 같네요. 제가 못 찾았을 수
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간접적으로만 접한 바에 의하면,
리쾨르는 "살아 있는 은유"를 "전형적인 은유"의 반
대 개념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살아 있는 은유에 이는 창조적 상상력이 있다
고 강조했다는 듯하네요.
리쾨르가 살아 있는 은유가 가진 역량에 대해 어떻
게 논증했는진 모르겠지만,
"은유"가 정신공간을 형성하고 또는 정신공간을 연
결시키기도 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때문에 전형적이지 않은 "새로운 은유", "살아 있는
은유"는 새로운 연결을 만들 수 있고, 새로운 연결은
처음에는 전체 네트워크의 변방에서 일어나지만 경
우에 따라서는 전체 네트워크를 재구성하게 만드는
연결로서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3.4. 이중사고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모순된 신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상태를 말했던 것
같은데요,
읽은 지가 좀 된 책이라 기억이 선명하진 않네요.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어 말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알게 된 사업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선택의 자유는 얼마든지 열려 있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개인의 몫이라는 신념
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케팅을 통해
서 소비자들을 좌우할 수 있으며, 소비자들은 결국
상황이나 마케팅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
을 함께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자유로
운 선택"과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행동"이란 게 충
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두
가지를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에 넣고 있는 듯이 스스로는 전혀 그 충돌지점을 인식하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두 가지는 양립가능할 수도 있죠. 그 가능성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충돌의 여지가 있음에도 애초에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건 흥미로운 상태
고, 아예 충돌의 여지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굳이 양
립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거나 정당화 할 필요성도
못 느끼시는 걸로 보였습니다.
정신공간 네트워크를 통해 설명한다면, 이 분의 "정
신공간 네트워크"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신념을 구성하는 의미들의 연결망과
"인간은 마케팅 등 상황에 따라 특정 방향의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관념을 구성하
는 의미들의 연결망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분석해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설명한 "기호의 폭력"이나 "살아
있는 은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두 가지를 연결하
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지만, 총총 모순된 걸로 보이
는 신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감정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두 가지 상반된 믿음을 동시에 갖는,『1984』에 나오는 이중사고 비슷한 경우가 없진 않으실 겁니다. 제 가설을 적용하면, 정신공간 네트워크에서 각각의 의미를 구성하는 부분 네트워크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3.5. 돈오점수
동양철학이나 불교철학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이 "단번에" 찾아
오니 일단 깨닫고 점차 수행한다는 의미의 "돈오점
수"라는 말 정도는 귀동냥으로나마 들어서 알고 있
습니다.
주로 명상 등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뭐 깨닫게 되는 계기는 여러 가지라고 하더군요. 명
상에도 여러 방법이 있던데 생각을 이어나가는 방법
도 있고, 생각을 중단하는 방법도 있고요.
아무튼 명상이 생각을 통해서든, 생각을 통하지 않고서든 정신공간을 재배치하여 창발된 네트워크를 새로운 디폴트로 유지할 수 있다면 "일거에 깨닫는다"라는 것이 설명이 되긴 합니다. 오랜 명상수련자들은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서 차이를 보이고 한다던데,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공간 네트워크는 뇌세포의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접점
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4. 맺음말
언급한 이론의 함의나, 과학이론, 철학 텍스트의 진
의에 대해서 전적으로 이해하고 쓴 것은 아니며 그
저 생각의 재료로 활용한 수준이니 당연히 한계가 있는 글입니다만, 논문이 아니라 단상 정도는 될 거 같아 올려봅니다.
더불어 틈틈이 쓴 글이고 별로 고친 게 없어서 약간
결론이 생뚱맞거나 흐지부지한 경우도 있을 텐데, 양해해주세요
5. 참고해볼 만 한 자료
조지 레이코프&마크존슨, 『몸의 철학』 삶으로
서의 은유』
질 포코니에&마크 터너,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
가』질 포코니에, 「정신공간]
강병남,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사고의 본질』
마크 뷰캐넌, 『우발과 패턴』(=『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킵 손, 『인터스텔라의 과학』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마누엘 데란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
에레즈 에이든&장바디스트 미셀, 『빅데이터 인문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