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초 아침, 눈에 띄지 않는 마차가 모스크바의 한 차선을 빠져나갔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카라한 외교 인민 위원의 명령을 받은 적군의 무장 병사 4명이 승무원과 동행했습니다. 마부 자리에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았는데, 그는 나중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특별 사절로 밝혀진 박진순이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투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이 준 350kg 무게의 금 상자 7개를 수송하고 있었습니다. 곧 마차는 모스크바 부근을 떠나 몽골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박진순과 그의 파트너 한형권은 백군과의 조우를 피하기 위해 몽골을 통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울란바토르,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를 지나는 노선이 가장 최적의 노선이었습니다. 노보시비르스크와 치타를 통과하는 직선 도로는 백위대 부대, 강도, 일본 첩보원이 그 영토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너무 위험했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의 레닌의 연설
박진순은 상하이와 코민테른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그는 레닌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의 발전과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10월 혁명이 끝날 무렵 레닌은 식민 세력에게 점령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한국, 베트남, 인도, 필리핀의 독립투사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지도자의 성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사진 왼쪽)과 박진순(오른쪽)
레닌과 박진순의 협상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임시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이 얼마인지 물었습니다. 박진순은 혼란스러워 10만 루블의 금액을 불렀습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웃으며 그 정도의 금액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하며 200만 루블의 발행를 명령했습니다. 그런 너그러움에 박진순은 너무 놀라 말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 경제는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어 러시아 루블이 국제 통화로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볼가 강과 돈 강 유역의 농경지에서 기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막대한 금액을 배정하기로 한 결정은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200만 루블은 2억 2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금액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10년 동안 5,000명의 투사들에 대한 재정 지원 문제를 해결하고 극동에서 일본과의 싸움의 상황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금액이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소비에트 정부의 제스처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혁명 투사들을 돕기로 한 코민테른의 결정을 이행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이동휘와 더불어 한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세대, 선구자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죠. 레닌을 직접 대면했던 인물이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