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주의 노예
🌳🌺🌲🙏파나이 섬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생 강요한 선교사와 함께 50여명의 선교사를 대접할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을 대형 버스에 모시고 나는 승용차로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버스에서 나오는 매연이 무척 심해 나는 강요한 선교사 운전기사인 현지인에게 버스를 추월, 앞장서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 강선교사가 뒤따라오라고 하였다면서 결코 앞장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인의 형이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주인이 말한 대로 뒤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차가 멈추었을 때 동생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자 동생은 웃으면서 이 기사는 자기 말 외에는 누구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화단에 물을 주라고 하였더니 비가 오는 날에도 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만 고지식하게 들었던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명령대로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강문호-
한국 최초 감리교 선교사ᆢ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는 북감리회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입국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17년간 한국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1884년 뉴저지 드류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엘라 닷지와 결혼하고 한국선교의 길로 나섰다. 그가 한국 선교사로 온 동기는 3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신학교 재학 시절 전국신학교 연합집회에서 한국선교의 사명을 깨달았고, 둘째는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조선>이란 책을 읽고 결심했고, 셋째는 미국 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기사를 보고 한국선교의 결심을 굳혔다.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할 때 갑신정변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웠고 임신한 여성이 생활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했고, 아펜젤러는 포크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짐은 그대로 두고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20일 재입국하였다. 입국 후 아펜젤러 부인은 1885년 11월 9일에 딸 앨리스를 서울에서 순산했다. 이 아기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로 알려져 있다. 한국 선교회 창립부터 총무로 봉사하며 서울 주재 외국인 연합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처음에 그는 교육 사역을 시작하여 배재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 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1985년 8월 3일, 정동 사택에서 이겸리와 고영필, 두 학생과 함께 학교를 시작했고, 1886년 6월 8일, 배재학당(고종이 지어준 이름,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한국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14년간 교장으로 헌신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지청천 등 독립운동가와 목회자를 육성한 것이다. 그리고 1887년 10월, 4명의 성도와 함께 정동제일교회를 시작하였고, 10년 만에 붉은 벽돌의 벧엘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지역 전도 활동을 전개하여 1891년에는 인천지역 성도들을 위해 인천 중구 내동에 내리교회와 제물포교회를 설립하였다.
1888년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한국 최초로 삼문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 중, 영 3개 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 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고, 기독교 소책자 및 그리스도 신문 발간에 참여하였으며 독립운동도 적극 지원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도중 구마가와마루호(400톤 규모의 선박)와 인천으로 가는 기소가와마루호가 충남 서천 어청도 앞바다에서 충돌하여 침몰하면서 순교했다.
사고 당시 그는 1층 1등실에 타고 있어 탈출이 가능하였으나 지하 3층에 있던 정신여고 학생과 조한규를 구하려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다른 사람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그의 나이 44세에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양화진에 비문만 세워졌다.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서천과 군산에 아펜젤러 기념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서천 아펜젤러 기념관은 아펜젤러가 탄 배가 침몰한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가 서천 지방이라서 거기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는 여성 및 가난한 자를 사랑했다. 그의 일화로서 콜레라 유행 시절, 죽어가는 여자아이를 집에 들여 죽을 때까지 살피고 장례를 치러준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의 후손으로 아펜젤러의 아들 내외 및 딸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후 양화진 묘역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다. 딸 엘리스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 후 이화여대 학장으로 재직했고, 1950년 이화여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고, 아들 헨리 D. 아펜젤러는 20년간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그가 처음 제물포에 도착하여 드린 기도문이 적혀 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서서> 아펜젤러는 한 알의 밀알에 되어 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를 통해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어 수 없는 영혼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