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닉 혼비의 <Fever Pitch> 얘기를 잠시 했었습니다. 한경기 한경기를 통해 자기 팀과 함께 성숙해가는 한 아스날팬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여러모로 즐거운 소설입니다. 축구라는 스포츠의 본질. 또한 축구팬의 본질에 대해서,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책 뒤편의 서평에는 “it is one for everyone who knows what it really means to have a losing season”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스날과 함께 숱한 패배의 순간들을 헤쳐가며 어엿한 한명의 축구팬으로 성장해가는 이 어린 소년의 모습은, 눈물겹기도 하고 귀엽기도 합니다. 요즈음의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과연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도 됩니다. 함께 즐기고 싶어, 몇몇 공감가는 부분들을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영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잘 살아있는 소설이라서, 여기저기 의역도 하고, 크게 건너뛰기도 하고 했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있습니다.)
* 아스날 vs Stoke City 68년 9월 14일
내가 처음으로 축구장에 간 그날의 오후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단지 그날의 유일한 골뿐이다. 주심이 페널티를 선언한다. (그는 페널티 에어리어로 뛰어가 극적인 몸짓으로 페널티지점을 가리켰고, 이어 함성이 터져나왔다.) 테리 닐이 페널티킥을 차는 순간, 관중들은 숨을 죽였고, 골키퍼가 쳐낸 볼이 닐의 발앞에 떨어져 그가 골을 성공시켰다.
사실상, 이것은 이후의 많은 비슷한 상황들을 통해 머리속에서 재구성해낸 것이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정말로 그날 본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우연한 몸짓들의 연속이었다. 일련의 행동들이 지나가자 내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몇초간 어리둥절해 있다가 주위의 사람들을 흉내내어 함께 소리를 질렀다.
보다 확실한 기억은, 시가와 파이프 담배를 피워대며, 욕설 (내가 이전에 들은 적이 있지만, 어른들이 당당히 소리지르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인 단어들) 을 내뱉는 그 압도적인 군중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선수들보다도 관중들에게 더 흥미를 느꼈다. 거의 이만명의 사람들이 거기 있었고, 이것은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와 맞먹을 정도였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많은 군중들의 숫자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많은 점잖은 어른들이 있는 목청껏 “이 멍청이놈아” 하고 소리를 질러대고, 아무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 것에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점이다. 다시말해, 그 오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무도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Kick off 이후 몇분이 지나자 그곳에는 분노의 소리들 – “너는 수치야, Gould 이자식아! 그는 수치라구!” “ 일주일에 일백 Quid? 너희를 지켜보는 대가로 그 돈을 내가 받아야 할거다!” – 이 가득찼다.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분노는 격분으로, 그리고 다시 원성과 언짢음으로, 마지막엔 체념에 가득찬 침묵으로 바뀌었다. 그래, 나는 그 모든 조크들을 안다. “대체 하이버리에서 뭘 바라겠는가?” 그러나 나는 첼시에서, 토튼햄에서, 그리고 레인저스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내가 그곳에서 알게된 것은 말하자면, 축구팬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스코어에 상관없이 쓰디쓴 불만족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고통으로써의 놀이 (Entertainment as pain) 라는 개념은 나에겐 아주 신선한 것이었고, 내가 그때까지 찾아 헤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듯이 책과 음악을 좋아하고, 아주 한심한 음악을 들을 때에 일종의 분노를 느낀다. 어처구니없는 엉성한 책에 대해서 나는 더 화가 난다. 이런 경우 어떻게 화를 내는지를, 아스날의 웨스트 스탠드의 그 비탄에 찬 인간들이 내게 가르쳐주었고, 아마도 그덕에 나는 비평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작가에 대한 비평을 쓸 때에 내 귀에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 “이 멍청이놈아!” “부커상이라고? 네 책을 읽는 대가로 그 상을 내가 받아야 할거다!”
이 첫번째 경험은 나에겐 압도적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스날의 팬이 되는) 이 끔찍한 상황을 막기 위해 황급히 나를 Spurs 에 데리고 갔다. Jimmy Greaves 가 선더랜드를 상대로 네골을 넣으면서 5-1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 훌륭한 선수들과 여섯개의 멋진 골에도 나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Stoke를 페널티킥의 리바운드로 1-0으로 가까스로 이긴 팀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 Swindon town vs Arsenal at Wembley 69년 3월 15일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가던 초기에, 아스날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다. 즉, 그 팀은 오직 내가 경기장에 있을 때에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 내가 보지 않는 동안 열번을 싸워 전부 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는 다섯경기 동안 전승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내게는 만족스러운 시즌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West Brom과의 FA cup 경기는 내가 볼 수 없었던 경기였지만 나는 아스날이 이기기를 원했다. 나의 기대를 져버리고 우리는 1-0으로 지고 말았다. 수요일 밤의 경기에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고, 나를 위해 어머니는 스코어를 적은 메모를 내 방문 밑에 넣어 두었다. 아침이 되어, 나는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와 같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적어놓아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마치 친척의 죽음만큼이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감정은 내게는 처음이었다. 물론, 이제는 다른 축구팬들처럼 그런 감정을 안다. 지금까지 나는 FA cup 에서의 패배를 22번 맛보았다. 하지만 첫번째의 것이 가장 아팠다.
아스날이 League cup 의 결승에 올랐을 때. 아버지는 나를 위해 티켓을 샀고. 나는 처음으로 웸블리에 가게 되었다. 아스날이 맞붙을 팀은 Swindon town 이라는 삼부리그의 팀이었고, 아무도 아스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경기장에 들어서기 이전에 아버지도 다른이들처럼 확실히 승리를 믿는지 묻고 싶었다. “아버지”, “아스날이 홈에서 리그 경기를 펼칠 때. 나는 그들이 질까봐 너무 걱정이 되어서 아무 생각도, 심지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때론 숨도 못쉴만큼 긴장을 해요. Swindon town이 이길 가능성이 백만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차라리 집에 가는 편이 좋아요. 난 도저히 그걸 못 견딜거에요.” 아버지는, 아스날이 삼대영이나 사대영으로 이길 거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나에게 일생의 상처가 되었다.
아스날이 허용한 골은, 프로팀으로서는 그야말로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멍청한 백패스, 그에 이은 태클 실패, 그 다음에는 골키퍼가 진흙탕에 미끄러지고 공이 오른쪽 포스트로 데굴데굴 굴러들어갔다. 나는 내가 Swindon 의 팬들 사이에 둘러싸여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렸고, 그들은 미친듯이 좋아하기 시작했다. 경기를 일분 남기고 아스날은 키퍼의 무릎에 맞고 나온 공을 다이빙 헤딩으로 골을 성공시켜 겨우 동점을 만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외쳤다. “우리 이제 괜챦은거죠. 그렇죠? 우린 괜챦은거죠?” 아버지는, 내게 돌아서서 “그래” 하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이길거야” 그것은, 그날의 두번째의 배신이었다. Swindon은, 연장동안 두 골을 더 넣었고, 경기는 뒤집을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아버지는 그 패배자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내게는 세번째의 배신이었다. 나는 출구로 달려나가 버렸다. 아버지가 나를 놀란 모습으로 붙잡았다. 그는 그것이 스포츠맨쉽이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내가 도대체 스포츠맨쉽 따위를 왜 신경써야 하는가?) 차로 돌아가 우리는 침묵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Swindon과의 경기로, 나는 축구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that loyalty”라고 하는 것이 용감함이나 친절함과 같은 도덕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보다는 오히려 당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혹이나 종기와도 같은 것이다. 결혼조차도 이보다 덜 완고하다. 거기에는 이혼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나는 23년동안 여러 차례 이 작은 종이조각 계약서를 바라보며 결혼으로부터 도피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스날에는 이런 가능성이 없다. 그 수많은 수치스러운 패배는 마땅히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좌절을 감내하는 것 뿐이다.
Swindon과의 악몽의 경기가 있은 다음주 토요일에 벌어진 QPR 과의 경기의 사진이 내게 있다. 조지 암스트롱이 골을 넣어서 1-0으로 승리했다. 데이비드 코트가 그에게 뛰어온다. 그의 손이 하늘로 치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낸다. 그 뒤편의 스탠드에는 아스날 팬들이 보인다. 그들 역시 두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있다. 나는 내가 이 사진에서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런 모욕이 있은 후 단 칠일만에 그들은 그것을 그렇게 잊을 수가 있는가. 웸블리에서 내가 겪은 것과 똑 같은 것을 함께 겪은 그 팬들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경기에서 아무 것도 아닌 한 골에 그렇게 환호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씩 이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한주 전의 상처나 슬픔, 탄식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그것을 잊은 듯이 보인다. 아스날 팬으로서의 첫번째 시즌에 나는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선수들과 나의 동료 서포터들로부터 배신을 겪었다.
* England vs Scotland 1969년 5월
나는 잉글랜드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나를 그들의 경기에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 것에 기뻤다. 리그컵 결승전 이후 그런 식으로 웸블리에 다시 간 것은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웸블리는 나에게 오랜 시간동안 씻을 수 없는 악몽의 장소로 남았을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관중들은 시즌중의 관중들과 똑 같은 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마치, 이날 하루만 축구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된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 나를 포함해서 - 그들은 클럽 축구의 책임감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잉글랜드가 이기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나의” 팀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12년간 살아온 내 마을에서 13마일 떨어진 북런던과 비교해볼 때, 국가라는 것은 내게 그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