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친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정근의 딸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의 부인이 되었으니 김구의 며느리가 된 셈이었다. 김구가 19세 때 동학의 접주가 되어 동학군을 지휘할 때 안 의사 부친 안태훈 진사는 김구가 비범한 인재임을 파악하였다.
후에 안태훈 진사는 김구를 불러 자신의 집에서 공부하게 하여 김구는 안 의사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구는 우리 민족의 최고 악질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평생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안 의사 가족을 보호하며 챙겼고 가족관계까지 맺은 것이다.
안 의사는 부인 김아려와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순국 후 가족은 중국 흑룡강 성으로 이주했는데 거기서 12세의 장남 분도가 일본 밀정에 의해 독살당하는 비극을 당했다. 불과 32세에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는 청년 안 의사가 신부로 양육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둔 장남이었다. 그런 안 의사의 장남을 일제가 독살한 것이다. 그 후 안 의사 가족은 러시아령 우수리스크로 가서 고생하며 살다가 1919년 이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 프랑스령 조계지에 와서 살게 되었다.
- 안 의사 부인과 두 아들들. /안 의사 기념사업회 제공, 안 의사 면회하는 동생들. /독립기념관제공
상하이에서 김구 등 독립 운동가들이 안 의사 가족을 도와 장녀 안현생과 차남 안준생은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거사 이후 상하이를 탈출하지 못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었다. 일제 탄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장녀 안현생과 차남 안준생이 일제의 모진 술수와 강압에 못 이겨 서울에 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에서 이토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친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사죄하며 일본에 협력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6. 안중근 의사 같은 영웅 육성 위해 감성 교육 시급해
젊은이들이 자주 밤이 늦도록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애국심을 나누고 때로는 친구들과 음주 가무도 즐기며 마음을 함께하는 감성적 문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교육은 젊은이들을 자기만 위하는 공부에 가두어 버려 이기적이고 소인배 기질이 되어 조그마한 불이익에도 감정이 날카로워지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런 결과 이제 한국은 남녀노소 거의 모두 이기적이 되었다. 논리와 감성이 균형 있게 통합된 교육을 해야 하는데 한국은 논리적인 교육만 중시하고 감성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아 많은 국민이 논리만 강해져 자신의 경제적 이해타산에만 집착해 상생할 줄 모른다. 운전 중 아주 경미한 손해만 입어도 “내가 왜 저 사람한테 손해를 당해야 해” 라는 경제적 논리가 발동해 즉시 감정이 고조되어 대로에서 차량 통행을 막고 싸우는 광경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외제 차 운전자들은 더 심각하다.
안중근 의사는 물론 독립운동을 위해 거액의 전 재산을 모두 바친 이회영 선생 형제들과 이승훈 선생 같은 부자 독립운동가들 모두 감성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자본주의란 나만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공존하라는 공유 경제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경제 불황이 계속되어 극빈자들이 증가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좌파 정부를 원하게 된다. 왜 러시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는가? 국민 대다수가 지독하게 가난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서둘러 학생들은 물론이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감성과 공유 자본주의를 교육하여 상생과 공존하는 자본주의 철학으로 무장시키지 않으면 아래와 같이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첫댓글 우리의영웅.안중근열사
大韓國人손도장
그가하늘에서 오늘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이
어떨까???
잘 보고 갑니다
난세의 영웅! 안의사! 세세한 내용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