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
Ⅰ. 작가의 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무리 늦어도 6개월이면 끝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소설처럼 이야기 줄거리를 만들고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내가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과 겪었던 일, 받았던 편지를 옮겨 써 나가면 되는 것이기에 그 기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나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또 특별히 글 쓰는 재주를 타고난 것도 아니어서 어휘도 풍부하지 못하고 상황 설명에 대한 어떤 비유 방법은 물론 글을 재미있게 구성하는 요령도 없을뿐더러 문장 부호라든가 철자법 등, 글을 쓰는데 있어서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상식 수준 이어서 매끄럽고 재미있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잘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식으로 써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쉽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고지에 쓰는 것도 아니고 P/C에 키보드로 입력만 하면 아무 때나 그 내용을 볼 수 있고 쉽게 수정할 수 있으니까 달리 시간이 필요할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본다.
다만, 편지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쓰면 되지만 오래된 사건은 기억이 희미할 때 기억을 되살리는 일과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맞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보관하고 있는 일기장이나 수첩, 메모장 등을 찾아보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웠는지 모른다. 말하기는 쉬워도 글로 쓴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생각이나 어떤 사실을 말로 전달하는 것과 글로 전달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말하는 식으로 글을 쓴다고 하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주제를 막힘없이 조리 있고 유창하게 연설하였다 하여 그 연설 내용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는다고 글이 되겠는가? 하물며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보니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뇌에는 말하는 것을 조종하는 부분과 글 쓰는 것을 조종하는 부분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주옥같은 글’을 쓰는 사람은 글 쓰는 것을 조종하는 뇌의 부분이 도대체 얼마나 범상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재주도 없으면서, 단지 시간이 있으니 세월 허송 않고서 무엇인가를 해보아야겠다는 의욕 하나만으로 무모하게도 이 글을 시작한 나의 도전 용기 하나가 가상하다고 보아 줄 수도 있겠으나 글 쓰시는 많은 분들을 욕되게 한 것은 아닌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실제로 있었던 일임에도 장소를 명확히 나타내지 않은 경우가 있고, 가명을 사용한 경우와 때로는 무례를 무릅쓰고 다른 사람의 성까지 바꾼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으나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 혹 누가 되었다 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글이나 시귀를 인용한 부분이 몇 군데 있는데 당연히 그 출처를 밝혀야겠지만 불행히도 나의 메모장에 내용만 기록되어 있어 그리하지 못한 것 일뿐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이 나의 불학의 소치인 까닭이리라.
또한 이 글 속에서는 시시콜콜한 옛날 상황이 더러 나오는데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은 “그래 맞아. 그때는 그랬어.” 라며 옛날을 더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옛날의 물가를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도 있는 데 이 모든 것은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런 시기도 있었을까?” 하며 고개를 갸웃뚱하게 될 때, 오히려 그로 인해 오늘을 재조명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을 뒤돌아 본 시간을 갖게 되었듯이 독자 여러분도 오늘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지난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이 진 황
■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이 책을 처음 출판한 것은 2000년 11월 6일 이었다.
1998년 12월 31일, 31년간 봉직한 은행을 퇴직하고 2년이 다되어가는 때였다. 그동안 다른 여러 가지 사건도 있었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책이라 준비도 미흡했고 모르는 것도 많으면서 그저 자판을 두드릴 줄 아는 실력만 믿고서 시작한 일이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보겠다.
물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고 북 디자인까지 맡겼더라면 내용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보다 스마트하고 보기 좋은 모양의 책이 나왔을 런지 모른다.
그러나 책에 형식적으로 책값을 넣긴 했지만 처음부터 팔 생각은 없었고 팔려고 한다고 해서 팔릴 책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친지나 친구 또 선배, 후배들에게 증정 형식으로 보내드리려 했던 탓에 출판비용을 많이 책정할 수 없어 내가 직접 북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글꼴, 글자 크기, 글자 간격, 줄 간격, 문단 모양 등을 내가 직접 선정하여 편집한 원고 파일을 출판사에서는 수정 없이 그대로 인쇄 하여 제본만 하면 되었기에 총 출판 비용에서 북 디자인 등 편집에 해당되는 많은 비용은 절감할 수 있었으나 출판하기까지의 시간은 의외로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표지는 내가 본문 편집에 사용한 <아래아 한글>로는 만들 수 없고 달리 만들 실력도 되지 않아 출판사에 의뢰하였다.
이번에 발간하는 수정증보판에서는 초판의 단원 순서를 일부 바꾸었다. 초판은 시간의 넘나듬으로 인해 사건의 연속적인 흐름 판단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단원을 사건의 흐름 순서대로 배열하였으며 내용면에서 사족같이 생각되는 부분을 제거하고 너무 간략하여 아쉬운 부분은 보충하는 작업을 하였다.
추가된 마지막 단원 <나는 누구인가 >에서는 한 인간의 살아온 모습을 당시의 일기를 통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소개하였지만 독자들이 읽기에 부담이 갈만큼 너무 발가벗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북 디자인은 이번에도 초판과 마찬가지로 직접 하였으며 표지도 <포토샵>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만들어 보았다. 인쇄도 양면 잉크젯 프린터를 사용하여 집에서 직접 인쇄한 점이 초판과 다르다 하겠다. 그러나 표지는 디자인을 했지만 직접 인쇄할 수 없어 전문 업체에 인쇄와 코팅을 의뢰하였으며 제본 또한 어쩔 수 없이 제본 업체에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 내가 직접 할 일은 아닐 수도 있으나 만들어 본다는 즐거움이 있기에 또 가진 것은 시간뿐이기에 해본 일일 뿐이다.
이 수정증보판을 발간하면서 <오늘의 역사> 상·하권, <한국의 성씨> 1·2· 3 권, < 동의보감>, <생활속의 지혜>와 <하늘천 따지> 등 성해문집 8권도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같은 날 발간함을 밝혀둔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우거에서
말없이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2009 년 12 월 1일
이 진 황
■ 차 례
Ⅰ. 작가의 말 ㆍ 1
1. 작가의 말 2. 차례 3. 줄거리
Ⅱ. 날더러 화백이라고? ㆍ 13
Ⅲ. 선택은 누가 하는가 ㆍ 19
1. 소라회 2. 유성자
Ⅵ. 선택의 순간 ㆍ 47
1. R.O.T.C. 2. 제대 준비 3. Miss 홍 4. 후보생 수양록
5. 포병학교 일기 6. 문혜리에서 있었던 일
7. 두고 온 이불 보따리
Ⅴ. 선택한 순간은 돌이킬 수 없다 ㆍ 104
1. 아카시아 2. 중앙정보부 3. 세 번째 이정표
4. 이문용
Ⅵ.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ㆍ 121
1. 한계령 2. 원두막 3. 풍문여고
4. 68번 손님 5. 세레나데
Ⅶ.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ㆍ 150
1. 인계인수 2. 계산 주임 3. 우물
Ⅷ. 영광과 시련의 교향곡 ㆍ 179
1. 회전의자 2. 길 3. 라명옥 4. 검사부
5. 명예퇴직
Ⅸ. 누가 화백인가 ㆍ 240
1. 뉴 스타트 클럽 2. 우리들 농원
Ⅹ. 3막 5장 ㆍ 254
Ⅺ. 나는 누구인가 · 267
■ 줄거리
1. 작가의 말
2. <날더러 화백이라고?>
30년 간 근무한 은행이라는 직장에서 명예퇴직한 주인공 이방주는 자기를 “화백”이라고 불러 주는 말에 의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화백이라는 말에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짝꿍이었던 현재 유명한 화가와의 옛날 일화를 떠올리는 것으로 이 글은 시작됩니다.
3. <선택은 누가 하는가>
아무것도 모르던 학창시절의 소라회와 유성자 회원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토록 좋아했던 유성자 회원과의 인연은 어째서 맺어지지 않는 것인지 ···.
어째서 눈감고 펴 본 일기장의 내용이 하필이면 그날이었을 까요?
아마도 모든 선택은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지 당사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가 봅니다.
그 많은 페이지의 일기장에서 어째서 그 페이지가 펼쳐졌는지 주인공은 지금도 신의 장난이 아닌 가라고 생각한답니다.
4. <선택의 순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1965년 당시의 열악한 군대 실상을 말해 주는 군 복무 중 겪었던 여러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숙집 Miss 홍과의 로멘스는 그의 전역 신청 결심에 많은 흔들림을 주었지만 그보다는 군대 환경이 더 어려웠던 탓인지 주인공은 제대 후 확실한 직장의 보장이 없음에도 복무 연장을 하지 않고 이불 보따리를 남겨 둔 채 도망치듯 하숙집을 빠져 나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항로 앞에 서있던 첫 번째 이정표이었겠지요.
5. <선택한 순간은 돌이킬 수 없다>
광주에서 제대한 후 대전 집으로 와서 취직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확실한 직장의 보장도 없이 무작정 분위기에 따라 전역한 것을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후회해도 지나간 선택은 돌이 킬 수 없겠지요.
선택하고자하는 직업에 대한 뚜렷한 생각도 없으면서 중앙정보부 특채의 기회 까지 포기한 주인공의 행동은 물론, 아나운서 시험을 포함한 그 모든 것들 역시 그의 인생 항로 앞에 서있던 각 각 하나의 인생 이정표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6.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한번 선택한 것은 그 것이 아무리 아쉬워도 쉽게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은 신중해야 함은 물론이겠지만 지나치게 앞날을 생각한 마음에서 그가 학생 때 교직과목을 이수하지 않아 결국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하지 못한 것이 잘된 결과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직과목 이수를 포기하게 만든 고시합격이라는 목적을 그는 달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공채시험에 합격하였기 망정이지 만일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교육계의 훌륭한 저명인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기회를 상실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을 것이니까요.
여하튼 선택은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일 것입니다.
4월에 제대한 후 10월에 있을 은행 공채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할 때의 그의 원두막 생활은 평생 다시는 가져 볼 수 없는 추억이기도 할 것입니다.
공판장에 가서 팔기 위하여 수박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갈 때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도 누가 알아볼까봐 마음 조리는 그의 심정을 동감하기 어려운 독자도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떠한 자극이 있을 때 더 성장하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요.
마침내 은행 시험에 합격하여 전에 자주 이용하던 야간 완행열차 대신 청룡호라는 특급열차를 타고 합격자 등록하러 가는 열차 안에서 주인공은 그 동안 마음속에 찌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지난날의 어두운 사연들을 모두 버리리라고 마음먹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하나의 사회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은행에 들어가 하나의 사회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날 무렵, 창구에서 Miss 홍과 하숙집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주인공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주인공은 거의 2년 전에 헤어진 Miss 홍과 다방에 마주앉아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피워 물고 흩어지는 담배 연기 속에서 옛 추억을 회상해 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추억은 서로가 깊이 간직 할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7.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직장을 구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직장 생활이라는 새로운 인생살이에서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배워 가야하며 직장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못하고가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 하여도 그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여 그 직장에서 낙오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8. <영광과 시련의 교향곡>
생애의 태반을 차지하는 직장생활이라는 인생살이에서는 그 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좋고 나쁜 숱한 일들이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일들이 주제별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9. <누가 화백인가>
보통사람들에게 직장생활이란 결국 따지고 보면 내 인생의 무슨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또 누구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먹고 살기 위한 행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을 키우고 부모를 봉양하는데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한 행위에 불과한, 인생 대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직장생활에서 정년퇴직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청산한 그 이후의 일들로 좋게 말하면 제2의 인생이라고 할, 어찌 보면 노년기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10. <3막 5장>
우리들 대부분은 태어나서부터 내 인생은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숙명을 가졌나 봅니다.
내 인생이 끝나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필연적으로 내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그 종착역에 언제 도착할지 모른 다는 것을 평소 실감 있게 생각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모두는 종착역이 정해진 시한부 인생이지만 단지 그 종착역의 위치와 도착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11. <나는 누구인가>
Ⅱ. 날더러 화백이라고 ?
A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
여느 때처럼 신문의 중요한 기사 난은 다 읽고 광고란까지 훑어보았으나 더 읽어 볼만한 것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신문을 접어두고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하며 거실 소파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요즘 전화기는 벨소리가 다양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또 <삐리릭->하는 소리가 나도록 해 놓은 모양이다. <때르릉->하는 옛날 전화 벨소리는 들어 본지 오래되었다. <삐리릭->소리가 아무래도 낯설어서 <때르릉->하는 소리가 나도록 해 놓으면 언제 또 <삐리릭->으로 고쳐 놓는지 모르겠다. 아이들 말로는 <때르릉->은 어쩐지 촌스럽다 나.
“네, 청담동입니다.”
“아, 이 화백이십니까? 선배님 접니다, 김창수에요. 오늘 점심 때 <송강회> 모임 있는 것 잊지 말라고 전화 드립니다. 늦지 마세요.”
“딸깍”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송강회>라는 모임의 간사 일을 맡고 있는 후배인데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하려면 용건만 말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원래 말을 빨리 해서 <따발총>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친구다. 이 친구가 전화하지 않았으면 매월 한번 모이는 오늘 모임을 깜빡 잊을 뻔했다.
할 일도 없는데 요즈음은 왜 그렇게 잘 잊어 먹는지····.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내용을 써 놓아도 퇴직 후엔 매일 매일이 노는 날이라 날자 구분이 희박해져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으며 특별히 기다려지는 날도 없어 달력을 잘 안 보게 되니 소용이 없다.
할 일 없는 오늘 하루는 <송강회> 모임으로 때워지겠구나 싶다.
- 그런데 뭐 날더러 <화백>?
- 갑자기 <화백>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모르겠다.
- <화백>이라면 그림 잘 그리는 화가라는 말인가?
그림 솜씨가 워낙 모자랐던 나는 지금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삭삭삭’ 그려 나가는 능숙한 솜씨를 보노라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특히 수채화 그릴 때 파렛트 위에서 여러 가지 물감을 섞어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참으로 기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TV 에서 방영하는 외국 어느 화가의 그림 그리는 강의를 보노라면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타고난 재능인지, 노력 끝에 얻은 기술인지, 재능에 배운 기술까지 곁들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부럽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그러한 재능이 없을까?
그림 그리는 재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부러워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잘 한다고 칭찬 받을 만한 다른 재주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B
옛날 고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난다.
입학하고 나서 두 번째 미술 시간으로 석고 소묘 시간이었는데 미술 선생님은 하얀 석고로 된 곱슬머리의 잘 생긴 외국 남자 흉상을 교탁 위에 올려놓으시더니 미술 연필로 각자 그려서 제출하라고 하신다.
나는 책상 위에 켄트지를 펴놓고 대강의 윤곽을 잡은 다음 세밀하게 그려 가기 시작하다가 문득 옆에 앉은 짝꿍 녀석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벌써 윤곽을 거의 다 그렸는데도 이 녀석은 아직도 석고상만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짜-식, 촌놈이라 더니 석고상 처음 보았나? 아니면 너무 잘 생긴 남자 석고상에 반해 버렸나?’
그 당시 우리 학교는 같은 계열 중학교에서 많은 학생이 입학하고, 다른 중학교 특히 시골 중학교에서는 극히 우수한 학생들만 더러 입학하는 정도였다.
입학식이 지난 지 2 주일도 안 된 터이라 중학교 때 같이 다닌 애들이 아니라면 아직은 서로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내 짝꿍 이 녀석은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붙임성도 없고 목소리는 아직도 변성기를 못 벗어난 탓에 여자아이처럼 때 때기 같아 재수 없는 짝꿍을 만났다고 내심 나는 그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날따라 새로 산 좋은 연필 탓인지 아니면 좋은 종이 탓인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평소의 내 실력 이상으로 잘 그려지고 있었다.
미술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이리 저리 다니며 보고 계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소질 있는 학생들을 발굴하려고 다니셨던 것이다.
선생님이 내 옆에 와서 한참 동안 쳐다보시기에 내가 잘 그리고 있어서 그러시나 보다 하고 더 신이 나서 열심히 그렸고 선생님이 쳐다보신다고 생각하니 더 잘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한참 그리다 보니 다른 곳으로 가셨던 선생님이 또 내 옆에 서 계신 것이 아닌가. 그 때 문득 짝꿍 녀석의 그림을 보니, 나하고는 전연 다른 방법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솜씨 같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두 번씩이나 와서 쳐다 본 것은 나의 그림이 아니라 이 녀석의 그림이라는 것을 미술 시간이 다 끝나 갈 무렵에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김석주, 이 녀석은 내가 그리는 방식과는 달리, 윤곽을 선으로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안개 속 같은 명암만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미술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으며 내 짝꿍 김석주는 졸업 후 미술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후 미술대학을 졸업 할 무렵에는 미술전에서 두 번이나 특선으로 입상하여 ‘김석주’ 하면 동양 화풍에 서양 화풍을 접목한 사람으로 화단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백이 되었다.
현재는 모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개인 화실도 운영하는 등, 아직도 왕성한 작가 활동과 더불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석주 화백이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일화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골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시켰을 때에는, 본인은 물론 공부를 잘 했을 것이 틀림없다. 또한 부모 입장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흔히 바라는 고등고시 정도 합격하여 금의환향하는 꿈을 가졌을 것이고 또 그것이 그 동안의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딘 보람으로 나타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석주는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교내 특별활동 미술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고, 미술 선생님은 그의 타고난 소질 양성에 심혈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대학 입학 원서 쓸 무렵에 난리가 났다고 한다. 미술 선생님은 이미 김석주가 장차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미술대학 진학을 추천하였고, 김석주 역시 미술을 좋아하고 있어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나 시골 그의 집안에서는 극력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겨우 환쟁이나 시키려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논 밭 팔아가며 도시로 학교를 보낸 줄 아느냐? 아이고, 집안 망했다. 이젠 밥 빌어먹게 생겼구나. 안 된다 안 돼!
그 후 김석주는 그의 집안에서 손을 떼고, 미술 선생님의 책임 하에 미술대학에 진학하였고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 등 모든 것을 미술 선생님이 부담하였다는 후문이다.
C
그런데 후배 김창수, 이 친구는 내가 그림 잘 그리는 것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물론 농담이겠지만, 나에게 <화백>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것일까?
학교 졸업 후 처음 직장인 은행에서 30년 이상 되는 긴 세월 봉직하던 중, 사태 해결의 일환으로 실시한다는 <구조 조정>으로 얼마 안 남은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명예퇴직> 하였으나, 마음과 몸은 아직도 팔팔하여 무언 가 하고 싶은데도 할 일을 찾지 못하여 하루 놀고 하루 쉬는 한가한 형편이니 좋아하던 그림이라도 열심히 배워 보라는 뜻인가?
- 아무튼 후배 친구야.
- 고맙다.
- 나를 <화백>으로 불러 주다니····.
Ⅲ. 선택은 누가 하는가
1. 소라회
2. 유성자
1. 소라회
A
3학년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동기 동창으로 화학과 4학년인 김광덕이 보자고 하여 학교 앞 다방에서 만났다.
김광덕은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같은 반이었으나 3학년이 되면서 반 편성을 입시 위주로 문과와 이과로 나누고 수업도 별개로 하는 바람에 접촉이 서로 없었고, 내가 대학입시를 재수한 탓에 진학한 후에도 학년이 다르게 되었고 학과도 달라 가깝게는 지내지 못한 사이였다.
김광덕은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 있었으며 체격이 매우 건장하였으나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비교적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우리 학교 3, 4학년 각 5명씩, 그리고 2년제 여자대학인 보육대학 1, 2학년 각 5명씩으로 구성된 <소라회>라는 써클의 회원인데 고문 겸 지도 교수는 철학과의 신정복 교수라고 하며 “신입 회원 추천이 있는데 의사가 있느냐?” 고 묻는다.
신정복 교수는 1학년 교양과목에서 독일어 강의를 하셨기 때문에 나도 잘 알고 있다.
조그만 체구에 쓰고 다니는 굵은 갈색 뿔테의 커다란 로이드 안경이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어 작은 얼굴이 더 작게 보이는 젊은 교수였지만 나이에 비하여 인품도 있었고 전공이 서양 철학임에도 독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독일어 강의 시간에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무대로 이 대학에 유학 중인 황태자와 학교 앞에 있는 까페의 여자 종업원인 케티와의 이야기로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 질 수 없었던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작품을 교재로 사용하며 재미있게 강의를 하여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강의에 열중하는 동안 자꾸 흘러내리는 예의 그 커다란 안경을 연신 손가락으로 올리는 회수를 세어 보았더니 1시간 강의에 20 번이나 되더라는 어느 짓궂은 학생의 통계가 있었다.
보육대학에서는 당연히 1학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회원을 추천한다고 한다.
나는 지금 4학년이 된 기존 남자 회원들은 누군가 궁금하여 물어 보았더니 거의 알 만한 사람들이었으며 특별히 대외적으로 번쩍번쩍 하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아니고 대개가 얌전하고 조용한 학생들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소라회>가 발족된 것은 3 년 전이라고 한다.
지금은 웬만한 대학에는 유아 교육과가 있어 그 곳에서 유치원 교사를 배출하지만 당시 그 보육대학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치원 교사를 배출하는 대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곳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재단이 기독교 계통인 탓인지 학생 거의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였다.
보육대학 옆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대학도 있었는데 보육대학과 같은 재단이었다. 두 학교가 서로 같은 바운다리 안에 있음에도 보육대학 학생들이 우리 학교 학생과 써클을 만들게 된 것은 지금 고문으로 계신 신정복 교수가 보육대학에서도 강의를 맡았던 때문인 것 같았다.
이들 두 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지대가 약간 높을 뿐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다만 시내 쪽에서 계속 오름 길로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위에 있는 지역이었고 뒤편은 시내에서 유성 쪽으로 가는 큰길과 붙어 있기는 해도 낭떨어지 같은 급경사여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없는 탓으로 들어간 길로 다시 나와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외진 곳으로 생각되었고 주택도 몇 채 밖에 없어 변두리로 취급받는 조용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이름이 <기르고 가르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목동(牧洞)> 이어서 두 학교 성격에 너무나 부합되었다.
월례회 겸 신입 회원 환영회를 하는 날, 나는 다소 기분이 들떠 있었다. 처음 여자들과 갖는 미팅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중학생들도 미팅을 한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대학생이라 하여도 남녀 간의 만남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 회원들은 대충 아는 사람들이지만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몹시 궁금하였다.
고정적으로 모인다는 중국집 식당 2층 큰방에서 길다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이 양쪽으로 나뉘어 앉았는데, 신입 회원들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쑥스럽고 어색한 탓인지 마주 보이는 사람을 잘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식탁 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 회원들은 졸업한 회원들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농담도 주고받았다. 남자 회원들이 주로 군에 입대한 회원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반해 여자 회원들은 선배들이 발령 받아 간 유치원에 관한 이야기여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기존 회원과 남자 신입회원의 소개에 이어 여자 신입회원을 소개하였는데 강원도 횡성에서 온 <이재옥>, 멀리 포항에서 온 <유성자>와 가까이 있는 부여에서 온 <호정자>의 소개가 있었고 아주 멀리 제주도에서 온 <방명자>에 이어 마지막으로 시내에 살고 있다는 <황귀자>가 소개되었다.
한결 같이 앳된 모습이었다.
하기야 요즈음에는 중학생만 되어도 화장을 하면 성인으로 보일 정도로 성숙하지만 40년 넘는 그 옛날에는 고등학생이라도 지금의 중학생만도 못한 체격이었으니 갓 졸업한 모습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신정복 교수는 긴요한 약속이 있다고 먼저 가시고, 회장으로 추대된 김광덕의 말은 우리들에게 ‘가던 날이 장날’ 임을 느끼게 하였다.
최근 학생들의 서클에 정치적 색깔을 띈 조직이 있어 ‘이름이나 목적 여하에 불구하고 어떠한 서클도 학생과에 신고하여야 하고 신고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발각되는 경우에는 학교는 물론 당국의 조치가 있다’는 것과 ‘교수는 일체 학생들의 서클에서 지도, 고문 등을 맡으면 안 된다’ 는 당국의 지시가 있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갑론을박으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론은 <소라회>를 계속 유지하기로 하고 회장과 부회장이 자기 학교에 각각 신고하기로 하였다. 다만 고문이신 신정복 교수는 그 분의 입장을 고려해서 관여가 없는 것으로 하자고 결정을 지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기숙사에 있다는 여자 회원들은 “사감 선생님이 몹시 엄하여 늦으면 큰 일 난다.”며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동동거렸다.
<소라회>의 큰 목적이 친목이었음에도 남녀 회원이 개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월례회 외에는 단체로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서클 활동에 대한 정부 당국의 제약으로 다소 위축된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남녀의 만남을, 요즈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보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젊은 청춘 남녀가 공공장소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것조차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여자 회원들의 다소 경직함 때문에 더 그러했는지도 몰랐다.
전에 4학년 어느 남자 회원이 여자 회원에게 편지를 한번 보낸 적이 있는데, 그 편지를 여자 회원들이 모두 돌려 가며 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여자 회원들은 남자 회원과의 사적인 교제를 금하자고 약속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한 2학년 여자 회원들은 외형적인 연령으로 보면 3학년 남자 회원보다 나이가 적음에도 기존 회원이라고 해서 족보에서 항렬 따지듯 신입 남자 회원을 시동생뻘 쯤으로 보는 경향도 있었다.
어쨌든 별로 재미없는 만남을 여름 방학 때까지 두 번, 2학기에 세 번 정도 갖고 나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졸업 전에 한 번 더 모임을 가질 수 있으나 전 예를 볼 때 여자 회원의 졸업식은 남자 회원 보다 빨랐고 졸업과 동시에 발령 받는 근무지에 부임해야 되므로 이번부터 12월의 모임을 졸업 모임으로 하자고 하였다.
졸업 모임에는 졸업생을 위한 기념품과는 별개로 재학생끼리 남녀 회원 간에 선물 교환이 있었다.
번호만 써넣은 선물을 남자 회원 것과 여자 회원 것으로 구분하고 번호 추첨으로 바꾸어 갖는,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교 수준의 행사에 불과하였지만 무척 기대감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내가 받은 선물은 만년필이었는데 요긴한 것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당시에는 볼펜이 없어 보편적인 필기구는 연필과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이었기에 만년필은 매우 고급 필기구였다.
또한 종이는 약간 색이 누-런 갱지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때 받은 편지를 보아도 전부 잉크로 썼고, 종이는 더러 하얀 모조지 계통이 있기는 하지만 그 마저 얇고 질이 안 좋아 잉크가 종이 뒷면까지 번져 있다.
소설 속에서 < 누런 편지 봉투를 뜯어보니, 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이 편지 봉투 뜯는 장면의 상투적인 표현일 정도로 편지 봉투는 대부분 누런 종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중 봉투라고 하여 흰 종이로 만든 편지 봉투도 나오기 시작해서 더러 사용되었는데 고급 봉투로 생각하였다.
그 속에는 대개 한쪽 면이 꺼끌꺼끌하고 색깔이 있는 얇은 종이가 들어 있어 속의 내용이 비추어지지 않아 예를 갖춘다거나 젊은 사람들이 이성간에 편지를 보낼 때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흰, 겉 종이 역시 얇고 질이 안 좋아 잉크가 번지고 글씨를 쓸 때 펜촉에 긁혀 찢기기 일쑤였다.
만년필은 좋은 선물이었다.
다만 ‘내가 받은 선물은 누가 준비한 것일까? 그 것도 재미있는 인연일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이름이 없어 서운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남자들은 정해진 금액 내에서 각자 선물을 준비했고 약속한 대로 준비한 사람 이름을 썼는데, 여자들은 같은 물건을 공동 구입하여 이름도 쓰지 말고 포장만 다르게 하자고 합의했다는 것이다. 괘씸하고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B
다음해 4학년이 된 국문과의 장영태가 회장으로, 신입회원으로 들어 온 법학과 3학년 이문용이 간사를 맡고 부터 회장의 리더쉽과 간사의 자상함이 <소라회>를 새롭게 변모시키고 있었다.
또한 회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다른 일로 인해 <소라회>일을 볼 수 없게 된 회장을 대신한 나와 간사인 이문용이 극성스럽게 여자 회원들에게 편지도 보내고 기숙사에 찾아가기도 한 것이 <소라회>의 활성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문용과 함께 여자 회원들의 기숙사로 부회장인 유성자 회원을 만나러 갔다가 그 곳 개에게 종아리를 물린 일 까지 겪었다.
물론 나와 이문용의 <소라회>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사회 분위기가 다소 개방적으로 변화하는 영향으로 우리들은 정기적인 모임 외에 딸기밭으로, 계룡산으로, 어떤 때는 극장에도 단체적으로 간 적이 있을 만큼 여자 회원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2학년이 된 여자 회원들의 성격을 다소 파악할 수 있었다.
보통 키로 붉으스레하고 통통한 뺨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검은 점이 있어 매력적으로 보이고 성격도 쾌활한 강원도 횡성에서 왔다는 이재옥 회원은 모임에서 분위기를 주도할 뿐 아니라 자기 의사 표시를 확실히 하고 매우 활동적이어서 정치인이나 아래 사람을 많이 거느리는 사람의 부인이 되면 내조를 참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재옥 만한 키에 얼굴이 다소 가무잡잡한 부회장 유성자 회원은 마음씨가 신앙심으로 뭉쳐진 듯 모진 곳이 없고, 다른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너그럽고 온화한 성격이어서 마치 시골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 같은 타입이었다.
부여에서 온 드문 성씨의 호정자 회원은 예쁘게 쌍꺼풀 진 눈에 키도 알맞고 여자 회원 중에서 제일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집안에서 귀염둥이로 자란 탓인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은 표정이 금방 얼굴에 나타나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피아노 치는 솜씨가 수준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멀리 제주도에서 와서 외로웠는지 호정자 회원과 늘 같이 다니던 방명자 회원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쩐 일인지····.
유일하게 시내에 살고 있는 황귀자 회원은 이마가 훤하고 아직 여고생 티를 못 벗어난 하얀 얼굴의 순진한 모습으로 말도 별로 없고 회원 중에서 나이도 제일 어렸다.
임원도 아니면서 내 딴에는 <소라회>의 활성화를 기한다고 간사인 이문용과 함께 극성스럽게 굴던 4학년 시절에 나는 여자 회원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
그 뒤 임관해서 군에 가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학교는 졸업했지만 <소라회>까지 졸업한 것은 아니다.” 라며 틈나는 대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답장으로 받았던 여자 회원의 편지를 읽노라면, 40여 년 전의 옛날 일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중 몇 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정자 회원의 편지>
이 소위님께
그 동안에도 주님 은혜 중 몸 건강히 무고하신지요?
교육받으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세요.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생활에 시달리다 보니 이렇게 소식이 늦어지게 되었군요. 지금도 막 교회에서 돌아 왔어요.
이번 주일에는 결핵 환자들만 있는 국립병원에 음악 예배를 보러 간다고 밤낮으로 연습을 하고 있어요. 정말 어떤 때는 울고 싶을 정도로 시간에 쫓기기도 한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라고 내 자신이 생각 할 때 나도 모르게 어린이들과 웃고 또 뛰며 하루하루의 일들을 보내고 있어요.
지금 radio 에서는 내일을 재촉하는 좋은 melody 소리가 낮은음 소리로 귓가를 흔들어 주는군요. 오늘 심야의 명상 시간은 왜 그런지 모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 펜을 달리고 싶군요.
그러면 이렇게 간단히 난필을 줄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1965. 6. 18. 부여 에서 扈 靜 子(호정자)
* 미안합니다. 어떻게 쓰다 보니 제 얘기만 썼군요.
참 방명자도 별 일 없이 잘 있답니다.
유치원 나가기가 싫어서 죽을 지경이래요. “
( 주 : 편지내용에서 한자에 한글 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단지 한문을 읽기 어려워 하는 세대들을 위하여 표기하였을 뿐이다. )
<황귀자 회원의 편지>
소위님 께
환히 밝혀 주는 태양의 빛을 받으며 大田(대전)에 계신 이 소위님께 향하여 Pen을 듭니다.
그 동안도 몸 健康(건강)히 안녕 하신 지요 ?
이 곳 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무서움으로 변한 것 같읍니다.
객지 생활이 처음이라서 매일 같이 大田(대전)만 生覺(생각)하며 눈물로써 나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이제야 父母(부모)님의 따뜻했던 사랑이 그리워 오는 것을 알았읍니다.
정말로 못 살 것만 같고 취직은 무엇 하려 하며 왜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社會(사회)가 무엇인가를 조금 알 것 같고 自己(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읍니다.
소위님!
이제는 편지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그전보다 더욱 ····.
지금이라도 大田(대전)에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어쩔 수 없는 나이기에 이렇게 울어야만 되는가 봅니다.
이제 만나 보기도 힘들겠군요. 학창시절의 즐거웠던 일과 소라 會員(회원)들의 말다툼이 오고가고 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生覺(생각)하며 계룡산 등산 갔을 때는 더욱 즐거운 날이었다고 生覺(생각)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갔지만 외로우니까 이런 生覺(생각)들이 떠오르겠죠.
이곳 개원식은 3月 10日로 정했읍니다. 너무나 촌이라서 몇 名(명)이나 올려는지 모르지만 지금 같아서는 하나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읍니다.
도로 大田(대전)에 가서 어머님 밑에 가서 살고 싶읍니다.
會員(회원)들 만나시면 안부나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너무나 긴말 또 재미없는 말만 써 놓아서 죄송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길 바라면서 항상 몸 健康(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이만 난필을 놓겠읍니다.
1965 年 3月 4日 貴 子(귀 자) 올림
李(이) 소위님께
봄의 냄새가 우리 주변에 찾아와 마냥 부풀어야 할 이때, 봄답지 않은 센바람과 흰 눈이 날리고 있으니 정말로 변덕스런 날 이라고 아니할 수 없군요.
그 동안도 안녕 하신지요 ?
멀리에 있는 저는 항상 소위님이 염려하여 주시는 고로 하루하루의 즐거운 生活(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녁 식사를 하고 敎會(교회)에 나가니 (속회라는 것이 있기에) 牧師(목사)님이 便紙(편지)를 주시는데 무척 기뻤읍니다. 마냥 애기처럼 ?
소위님이 좋은 격려의 말씀을 보내 주신데 대하여 다시금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정말 울어도 소용없는 이 世上(세상).····.
알 때까지 努力(노력)하며 이제부터 배워야 된다고 아지 못하는 人間(인간)이지만 이렇게 종아려 봅니다.
이 곳 원아 수는 40名(명)이고 아지 못하는 아동들을 가르칠려니 더욱 짐이 무겁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마음들이 다 아름다워서 아주 귀엽게 보여집니다. 또한 내가 책임이 있으니 그러하겠지만요.
이곳에서 제가 하는 일은 일요일날의 ORGAN 반주와 中.高等部(중·고등부)의 ORGAN 반주를 맡고 있읍니다. 이 곳 시골 사람들은 아지 못하는 人間(인간)보고 정말 하늘에서 天使(천사)가 나타났다고? 얘기 들 하고 있어 정말 우스운 소리도 다 듣고 삽니다.
자랑은 진정 아닙니다만 우스운 소리로 잠깐 넘기시기를 바라며 소위님의 앞날에 번영과 행운 있으시기를 빕니다.
바쁜 틈을 타서라도 종종 消息(소식)이나 전해 주셨으면····.
이만 난필을 놓겠읍니다. 안녕히 계세요.
1965. 3. 26. 단양의 SORA 貴 子 올림
당시의 철자법은 <하였습니다>가 아니고 <하였읍니다>가 바른 것이어서 지금으로 보면 많은 격세지감이 들 것이다.
황귀자 회원이 <하루의 생활이 무서움으로 변한 것 같다, 취직은 무엇 때문에 하려는지 모르겠다, 대전만 생각하며 눈물로 보낸다, 새로 모집하는 원아들이 하나도 안 왔으면 좋겠다, 도로 대전에 가서 어머님과 살고 싶다>라고 쓴 것은 여자가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객지에서 느낀 어려움과 외로운 감정을 얼마나 솔직히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뒤의 편지를 보면 짧은 기간임에도 바로 환경에 적응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는데 여자이기에 그렇게 적응이 빠른 것인지····.
2. 유성자
A
회장의 일을 대신 맡아 본 나는 간사 이문용과 함께 <소라회>의 모임 준비 사항이라든가 회원 간의 연락 사항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바람에 자연히 부회장인 유성자 회원과 만나는 일이 많게 되었다.
전화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서 전화 연락은 어려웠고, 더구나 여자 회원들 기숙사로 전화를 한다는 것은 기숙사에 전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내가 회장을 대신하게 된 것은 회장 장영태가 회장직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칠갑산으로 유명한 청양이 고향인 장영태는 장남인데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벌써부터 집안에서 결혼을 서둘러 왔으나, 본인의 반대로 미루어 오다가 아버님이 병석에 눕게 되자 우선 약혼을 하게 되는 바람에 본인이 <소라회> 탈퇴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남자 회원들은 회장이 탈퇴한다면 4학년을 새로 신입 회원으로 가입시키기도 난처하고 무엇보다 모임의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졸업 때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회장이 학교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회장 일을 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지난해에 있었던 학생 써클 활동에 대한 정부 당국의 제재와 신정복 교수의 고문직 사퇴 등으로 침체해 있던 <소라회>가 막 활성화되고 있는 때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연락 사항이 있는 경우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편지로 전하고, 급할 때에는 나와 이문용이 목동 기숙사로 찾아가서 여자 회원들을 찾았는데 다른 회원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 유성자 부회장만이 책임상 어쩔 수 없어 우리를 만나러 나오는 것 같았다.
남녀 간의 만남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회원들도 기숙사에 있을 텐데 항상 왜 혼자만 나오느냐?”는 우리의 물음에 때로는 언짢은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 다른 회원들을 감싸주는 유성자 회원의 마음 씀씀이에서 시골 어머니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
당시의 내 성격은 마치 칼날과 같아서 나와 맞서 다투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대하기 싫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속된 표현으로 지랄 같은 성격이었다.
내 비위를 건드리는 사람에게는 두 배 세배 이상으로 퍼부어 주어야만 직성이 풀렸고,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 나쁘다, 틀렸다.” 등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싫으면 “싫다.”와 좋으면 “좋다.”를 즉시 표현하는 마치 단세포 같은 성격으로 지금 생각하면 수양이 부족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제 옳은 것만 생각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야생마라면 유성자 회원은 능숙한 조련사 같아서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내 주장만을 내 세우기가 어려웠고 부드러운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내 마음은 눈 녹듯 녹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다시 만나고 싶어지면서 내 마음이 조금 씩 조금 씩 그녀에게로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2월 졸업 모임까지 한 번도 단 둘이 만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리에게 여러 번 그러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B
세월은 또 흘러 12월 졸업 모임에서, 부회장 유성자 회원은 충남 홍성에 있는 에덴유치원으로, 이재옥 회원은 강원도 묵호의 성호유치원으로 가게 되었고, 호정자 회원은 부여의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유치원으로, 황귀자 회원은 충북 단양의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으로 발령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방명자 회원만은 아직 발령을 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명자 회원은 고향인 제주도 근무를 원했는데 아직 그 곳은 유치원 신설이 미정인 관계로 발령을 받지 못 했으나 곧 결정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발령 받은 사람은 2월중으로 부임지로 떠나야 한다니 이번 모임 이후에는 서로 만날 기회가 거의 없게 되는 셈이었다.
실제로 12월의 그 졸업 모임 이후 다음 해 7월, 내가 유성자 회원을 만난 것 외에는 지금까지 여자 회원과 남자 회원 그 누구도 서로 만났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 조차도 대부분 서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도소리에 울려오듯 들려 온 일부 소라 회원들의 소식을 보면 신정복 교수는 그 뒤 독일 유학을 마치고 지금은 서울의 모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남자 회원들 중 몇 사람은 서로 연락처를 알고 지내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한 사람이 작고했다고 한다. .
여자 회원들의 소식은 여운철 회원이 같은 시기에 입회한 여자 회원과 결혼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몇 사람의 단편적인 소식밖에 알지 못한다.
유성자 부회장은 목사님과 결혼하여 현재는 충주에서 사모로써 목회 활동을 내조하고 있고, 호정자 회원은 졸업한 다음 해인 66년 10월에 서울 반도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며, 황귀자 회원은 인천 쪽으로 결혼해 갔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는 사항이 없고 기타 다른 여자 회원의 소식은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이재옥 회원에 관한 소식 일부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퇴직하기 전에 3년 간 있었던 나의 마지막 근무처는 일선 점포의 업무를 평가하는 <검사부>라는 부서였는데 업무 성격상 전국 여러 곳을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퇴직하던 해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점포로 업무 검사를 위한 출장을 갔는데 서류를 검토하다가 점포 주소가 <동해시 발한리>라는 것을 보고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옛날 30여 년 전, 군에 있을 때 < 강원도 명주군 묵호읍 발한리 성호유치원 이재옥 선생님 >하고 몇 번 편지를 썼던 기억이 생각난 것이다.
지금은 삼척과 묵호가 합쳐져 금강산 관광 유람선 출발지로 유명해진 동해시가 되었지만, 옛날 이재옥 회원이 근무했던 성호 유치원이 지금 내가 있는 옛날의 묵호 발한리에 있었다니 그 유치원이 지금도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발한리에는 그러한 이름의 유치원은 없고 신시가지에 같은 이름의 유치원이 있다 기에 그렇다면 “옛날 발한리에 있던 유치원인가, 맞는다면 이재옥 선생님의 연락처가 남아있는가.” 등을 알아보라고 했다.
유치원이 속한 교회의 원로 장로님으로부터 알 수 있었던 것은 옛날 ‘발한리에 있던 그 유치원이 맞고, 처음 유치원을 설립할 때 근무하신 이재옥 선생님은 군인과 결혼한 후 유치원을 그만 두었다’는 것만 알 뿐 현주소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재옥 회원의 연락처를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12월 졸업 모임을 끝으로 여자 회원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떠나갔으나 유성자 회원은 부임지로 떠날 때까지 아르바이트 일로 대전에 있겠다고 하였다.
해가 바뀌면서 졸업이다, 임관 준비다 하여 다소 바쁘기는 했지만 나는 유성자 회원을 만나고 싶어 몇 번 나섰다 가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그만 두곤 하였다.
그러던 중 어쩔 수 없는 아주 긴요한 사정이 생겨 대전 비행장 옆 탄방동에 있는 공군 장교 사택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유성자 회원을 찾아갔다.
사택들이 들어 선 곳은 탄방동 큰길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이었는데 공군 비행장 지역인 관계로 길가의 출입문에서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대전 둔산 지구 신시가지 건설로 이때의 공군 비행장 지역은 물론 그 주변 일대의 논과 밭이 지금은 모두 택지와 도로로 변하여 정부 청사가 들어서고 아파트촌이 되어 그야말로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할 지경으로 옛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 신가지 건설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우리 집안에 커다란 도움을 줄 줄이야.
내가 4학년이 될 무렵, 우리 집은 아버님이 작은 아버님하고 운영하시던 대전-금산간의 화물 운송 사업이 꼬불꼬불하고 험한 태봉 재에서의 사고로(재를 넘어 가는 데만 1시간 이상 걸리던 시간이 지금은 태봉 재에 터널이 생겨 대전과 금산간의 운행 시간이 20분 정도로 짧아 졌다) 인해 실패한 후 시내 주택가인 대흥동의 집마저 처분하고, 전에 사 두었던 밭이 있는 변두리 갈마동에 겨우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아버님의 운송 사업이란 금산 장날에 장을 볼 사람들을 짐과 함께 금산으로 태워 가고, 장이 끝나는 저녁 무렵에 대전으로 태워 오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고 다른 날에는 주문에 의해 화물 운송을 해주는 오늘날의 개별 화물 운송업과 비슷한 것이었다.
버스도 다녔지만 화물차에 사람과 짐을 함께 태우는 것이 당시에는 하나도 불법이 아니었다.
운행에 사용한 차는 NISSAN 화물차였는데 네거리 같은 곳에서 교통순경에게 차의 진행 방향을 알리기 위한 기계는 깜박이라고 하는 지금의 방향 지시등 대신 앞 유리창 좌우의 기둥에 달려 있는 부채 접은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계기판에 달려있는 버튼을 잡아당기면 날개가 부채처럼 쫙 펴져서 진행 방향을 가리켰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
그러나 그 기계는 자주 고장 나는 바람에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좌회전을 하려면 왼쪽에 앉은 운전기사가 왼쪽 팔을, 우회전을 하려면 오른쪽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오른쪽 팔을 창밖으로 길게 내밀어 진행 방향을 가리켰다.
우회전 할 때 옆의 조수석에 사람이 없으면 운전기사가 왼팔을 위로 둥그렇게 구부려 방향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그 표시를 보고 교통순경은 ‘가도 좋다’고 호루라기를 불며 절도 있는 팔 동작으로 진행 방향을 지시하던 기억도 새롭다.
이 운송 사업의 실패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4학년 마지막에는 장학금 덕분에 3분지 1밖에 안 되는 등록금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수익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던 그 밭은 신시가지 건설 때문에 토지개발공사에 수용되면서 받게 된 보상금으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유성자 회원을 찾아 간 긴요한 사정이란 R.O.T.C. 임관 기념 파티에 반드시 여자 파트너를 대동해야 한다기에 그 부탁을 하러 간 것이다.
‘거절하면 어쩌나’하는 우려와는 달리 쾌히 응낙해 주었다. 또한 “다른 회원에게 부탁해 보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임관 기념 파티를 계기로 나는 유성자 회원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었으니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여자 파트너를 파티에 데려와서 파티가 끝나기까지 별의 별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사랑하는 연인처럼 비칠 정도로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해 주었다.
후에 어떤 친구는 “그 때 그 여자 진짜 애인이었느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C
학교 졸업 후 유성자 회원이 근무지인 홍성으로 떠나고 나도 광주 포병 학교에서 교육받는 동안 나는 틈틈이 유성자 회원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답장을 받기도 하였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나는 조금씩 그녀에 대한 나의 속마음을 비추기 시작했으나 유성자 회원의 편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같은 수준이어서 진정한 마음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병 학교의 교육이 끝날 무렵, 유성자 회원에게 편지를 써 “내가 교육을 마치고 부대 배치 받아 갈 때 며칠간의 휴가 기간이 있는데 대전에서 만날 수 있느냐?” 고 물었다.
유치원도 그때쯤 방학인 관계로 유성자 회원이 고향인 포항으로 가려면 대전을 거쳐서 갈 것이므로 기회가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은 이러했다.
방주씨 께
밖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있군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군요.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군요. 무서운 세대 ( * 세계? 세태? / 잉크가 번져 잘 안보임) 속에 우리들도 끼어 있군요.
그간 별고 없는지요? 물론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잘 있답니다.
< ···· 중략 ····>
저는 19일쯤에 집에 갈려고 했는데 방주씨 때문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보고 싶은 회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가야 하겠어요. 부득이 20일에 출발 해야죠.
대전에 20일 12시50분에 도착입니다. 홍성에서 기동차가 10시21분 출발입니다. 하루만 쉬어서 가야겠군요. 그때는 방주씨가 주인이고 저는 손님에요. 손님 대접 잘하셔야 돼요.
재옥이 한테서는 여전히 편지 오고 있어요. 귀자한테서도 가끔 옵니다. 호정자, 방명자는 소식이 없어요.
지금 생각하면 남 회원들 중에서 제일 친하게 지냈고 또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 사람은 방주씨와 문용씨 두 분인 것 같애요.
우리 학교 뒷산에 무척 많이 오셨죠?
언젠가는 이문용씨와 둘이 고구마를 갖고 오셔서 목동 뒷산에서 우리들이랑 같이 먹은 적이 있죠?
어저께 묵호의 재옥이 한테서 편지가 왔는데요 작년 추석 때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방주씨께서 기숙사에 찾아 오셨다가 개에게 물려서 혼나신 그 얘기를 하면서 정말 그 때가 그립다나요?
무척 재미있고 흐뭇한 시간들이었어요.
이제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그 날을 아쉬워해야만 되나 봐요.
참 졸업생 기념품 대금 지불하셨어요? 물론 하셨을 테죠.
저는 아직 못 냈어요. 여름 방학 때는 어떻게 내고 가야 할 텐데 쥐꼬리만한 봉급에 노예가 되고 보니 퍽 힘들어요. 그러나 잊어 본 적은 없어요.
우리 회에 대한 애착은 변함없지만 너무 나에겐 기회와 시간이 허락치 않기에 돕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만은 변치 않고 있으면 되니까요.
아무튼 제가 대전에 가면 만나 뵐 수 있겠죠.
그럼 만나서 자세한 얘기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65. 7. 9. 성 자 드림
마침내 12 주간의 포병 학교 교육을 마치고 배치 받은 부대에 부임하기까지 휴가 겸 주어진 며칠간의 기간을 이용하여 대전에서 유성자 회원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유성자 회원이 온다는 20일, 나는 기차가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도착하면 어쩌나 싶어 도착한다는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대전역으로 나갔다.
역에 도착하는 손님들이 나오는 곳은 지금과 같아 역사 건물의 맨 왼쪽 끝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만났을 때 약간 놀래 줄 생각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잘 볼 수 없는 구석에서 출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유성자 회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역은 도착하는 열차가 많기 때문에 수시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다가 끊어지고 또 나오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제나저제나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유성자 회원은 보이지 않고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벌써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표 받는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12시 50분에 도착하는 홍성에서 오는 기동차가 도착했습니까?”
내가 빳빳하게 다려 입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모자에 붙은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계급장은 가짜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계급장과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정시 보다 20분 늦게 도착은 했지만 승객들은 벌써 빠져나갔을 텐데요.”
‘오늘 일정이 바뀌었나 보다.’ 생각하며 터덜터덜 이문용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목척교 건너편 서점으로 갔다.
나를 본 이문용은 도리어 의아해 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지금 막 유성자 회원을 <대흥 여관>에 안내 해주고 왔는데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빨리 가보게.”
유성자 회원이 와 있다는 반가움보다는 이상한 불안함이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대흥 여관>은 점잖은 사람들이 투숙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의 여관은 지금의 여관과는 근본적으로 구조가 많이 달랐는데 대흥 여관도 일반적인 다른 여관처럼 한옥으로, 건물이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당 가운데에 있는 둥그런 정원의 나무와 키가 큰 화초들이 각 방이 서로 보이는 것을 다소 차단시켜 주고 있었고, 각 방 앞에 있는 넓직한 마루는 통로처럼 쭉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유성자 회원은 막 세수를 끝냈는지 머리에 수건을 감고 마루에 앉아 가볍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근무가 힘들었는지 임관 기념 파티 때 보다 많이 헬쓱해 진 것 같다.
마루에 앉아 한동안 회원들 소식과 그 동안 지낸 이야기를 하다가 방을 둘러보니 한창 유행하던 레저로 만든 커다란 네모진 여행 가방이 눈에 띄었다. 끌어 당겨 보니 꽤 무겁다.
‘몇 달 동안 생활한 모든 것이 여기 다 들어 있겠지’ 생각하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가방 속을 보면 유성자 회원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방을 여는 시늉을 하자 기겁을 하고 놀란다.
“성자씨,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이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무척 궁금한데 한번 열어 볼 수 없어요? 전면에 붙은 주머니만이라도 열어 봅시다.”
어린아이 응석 부리듯 졸라대자 나의 고집을 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속에는 별 특별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무 말이 없기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의 쟉크를 열고 속에 있는 것을 꺼내니 책 두 권과 손수건, 기타 잡동사니들이 나왔다. 책 한 권은 찬송가였는데 하나는 책 모양의 수첩 같았다.
그 수첩을 집어 들고, 펴서 보려고 하니 깜짝 놀란다.
“방주씨! 보면 안돼요. 일기장이란 말예요.”
일기장이라고 하니 더욱 보고 싶었다. 울상을 지으며 빼앗으려고 하는 유성자 회원과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남의 일기장을 억지로 보자고 하는 것도 무례가 되는 것 같아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눈을 감고 일기장을 펴서 나오는 한 페이지만 읽어보면 어떨까요?”
그 것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떼를 써서 돌아앉아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었다.
“무슨 큰 비밀 내용이라도 볼 수 있나 했더니 뭐, 별 내용도 아니네요. 좀 재미있는 페이지가 펴졌어야 하는 건데····. ”
읽고 나자 어느 날짜 것을 보았는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기장을 덮고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 때 일하는 아주머니가 밥상을 들고 왔다.
“저녁을 같이 먹도록 준비했는데요····.”
그 아주머니는 우리가 약혼이라도 한 특별한 사이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으나 최후의 만찬 같았다.
어떻게 식사를 끝냈는지 모른다. 태연을 가장하려고 무진 애를 쓰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일기장을 되새겨 보았다.
< 1965년 6월 19일 >
오늘은 토요일이라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뒤에서 빵 빵하고 자동차 경적 소리가 난다.
길 한옆으로 비키며 돌아다보니 K가 타고 있었다. 방금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오는 길이란다. 지난주에 왔었는데 오늘 또 왔다.
요즈음 마음이 괴롭다.
고난의 길인 줄 알면서 꼭 그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러나 고난의 길이라 하여 선택을 주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고난의 길이 내 운명의 길이라 하여도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안 서기 때문이다.
나를 붙들어 주소서.
내 앞에 어떠한 역경이 주어진다 하여도 그 것을 이기고 견디어 낼 수 있는 용기를 저에게 주시고 편한 길을 찾아 헤매려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침에는 L 에게서 온 편지를 받았다.
아무래도 마음속으로나 답장을 써야 할 것 같다.
- 1학년 때 만해도 아니 2학년 때에도 이상을 그리며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욕망과 꿈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진정 그 것은 꿈이었지 현실은 아니었어요.
신앙이 내 마음에 뿌리 박혀 있기에 내 人生觀(인생관)이 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저에게 주어진 책임과 환경을 벗어나고 싶지만 주께 맡긴 내 영이 어떻게 다른 길을.
神(신)에게 간구하는 소리로 외쳐 봅니다..
말하지 않는 가운데 말하고 있고, 울지 않는 가운데 울고 있고,웃지 않는 가운데 웃고 있는 성자가 되겠다고····.
아무래도 주어진 내 운명과 저에게 엄숙히 놓여진 현실 앞에 두 무릎을 조아리고 겸허하게 머리 숙여야 하나 봅니다.-
- 왜 그 속에 일기장이 있었나.
- 어째서 그 많은 페이지 중에서 하필이면 그 날이 내 손에 의해 펼쳐졌단 말인가.
- 왜 대전역에서 그녀를 보지 못하고 또 그녀도 나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제는 내가, 주어진 운명 앞에 겸허하게 머리 숙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강원도 문혜리에 있는 배치 받은 부대의 야외 훈련장 지휘소에서 <신고합니다. 소위 이방주외 5명은 1965년 7월 00일 부로 전입 명을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라며 대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고 있었다.
< 제 1 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