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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 20일에 발행된 뉴욕 타임즈에는 한국과 관련된 두 건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두 건의 기사가 모두 한 가지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는데요. 이제부터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날 실린 한국 관련 기사 중의 하나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한 권의 책을 출판한 엠마 크뢰벨(Emma Kroebel )이라는 여성이 "나는 정신이상자도 아니고 거짓말장이도 아니다." 라고 한 말을 옮기면서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니콜라스 롱워스(Mrs. Nicholas Longworth)" 부인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기사는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의 부인으로 1909년 당시에는 뉴욕주 북부의 작은 도시 유티카(Utica)에 살고 있던 존스 부인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이 기사에서 존스 부인은 "엠마 크뢰벨이 말하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었을 때 자신은 서울을 떠나 있었지만 만일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나중에 서울로 돌아간 자신에게도 분명히 알려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엠마 크뢰벨의 주장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존스 부인은 "(한국에 있을 때)엠마 크뢰벨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과연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기사에서 말하는 엠마 크뢰벨과 니콜라스 롱워스 부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먼저 독일 여성 엠마 크뢰벨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난 여성으로서 한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1905년 경에 그녀는 서울에 있으면서 대한 제국의 황실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서양식의 의전 행사에 서툰 대한 제국 정부에서 각 국의 외교 사절들을 맞이하여 치르게 되는 여러 행사에서 그녀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1년 정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 그녀는 한국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하여 1909년에 한 권의 책을 펴냈는데 그것이 "내가 어떻게 조선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입니다.(이 책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무지개님의 블로그 글을 참고하십시오.) 위에서 인용한 신문 기사에서 말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지요. 그렇다면 이 책의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논란의 중심에 있는 또 다른 주인공 니콜라스 롱워스 부인에 대해서 먼저 살펴 봐야겠습니다. 1909년의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니콜라스 롱워스 부인으로 불리던 이 여인의 결혼 전 이름은 엘리스 루즈벨트(AliceRoosevelt, 1884-1980) 였습니다. 테디(Teddy)라고 불리던 미국의 제 26 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가 그녀의 아버지였지요. 1901년 9월에 제 25 대 미국 대통령이던 맥킨리가 뉴욕 주 버팔로에서 암살을 당하고 당시 부통령이던 루즈벨트는 대통령 직을 승계합니다. 이 때 엘리스의 나이는 꽃 같은 열 일곱 살이었고 그녀는 각 종 신문에 "엘리스 공주(Princess Alice)" 로 불리며 일약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1902년 1월에 백악관에서 있었던 그녀의 사교계 데뷔 파티는 미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보도하였다고 합니다. 몇 년 후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의 곁에 새로운 아내가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도어는 뉴욕주 주의회의 상원 의원과 뉴욕 주지사를 거치며 바쁜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정치 활동에 바빠 제대로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아버지로 인해 어린 엘리스는 많은 외로움을 느겼다고 합니다. 물론 새 어머니가 있었지만 그녀는 몸이 약해서 앓아 눕는 일이 많았고 또 엘리스 밑으로 태어난 동생들이 있다보니 엘리스가 느끼는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아래의 사진은 1902년 경의 가족사진인데 사진의 가운데에 흰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소녀가 엘리스입니다.) 술도 잘 마시고 공개적으로 담배도 피웠으며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는가 하면 경마장에서 남자 도박사들과 어울려 도박을 하거나 포커판에서 남자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애완 동물로 뱀을 키울 정도로 엉뚱하기도 했지요. 오죽했으면 아버지인 시어도어가 "나는 나라를 통치하던가 아니면 딸을 단속하던가 둘 중의 한 가지 밖에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머슴애 같은 행동과 달리 엘리스는 누가 보아도 감탄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할 수도 있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의 행사에 나타나는 그녀는 단연 주위의 시선을 끌었고 이런 그녀를 신문에서는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그녀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드레스 디자이너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만든 푸른색의 옷감은 "Alice Blue" 라는 이름이 붙어 최고의 유행 상품이 되었고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까지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아마 요즘의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19세기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던 사회에서 그녀는 정말 미국의 공주와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그녀의 한국 방문에 대해 당시 대한 제국에서 남긴 기록을 찾는 일은 힘들었지만 영어로 된 기록은 큰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05년 감리교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호머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그 분은 "Korean Review"라는 영문 잡지를 서울에서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잡지에서는 한국의 여러 가지 풍습과 문화 그리고 정치와 사회에 관한 내용들을 영어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당시 서울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짧은 단신의 형태로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의 1905년 9월 호에 엘리스 루즈벨트의 한국 도착 소식이 비교적 자세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9월19일 미스 엘리스 루즈벨트와 그 일행이 군함 오하이오 호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들은 특별 열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떠났는데 객차와 기관차는 미국, 한국 그리고 일본 국기로 장식되어 있었다. 많은 한국 관리들과 군대의 장교 그리고 황실 근위대와 군악대, 각 국 공사들이 역에 도착하는 이들을 환영하러 왔으며 이들이 가는 길에는 구경꾼들이 쇄도했다. 미스 루즈벨트를 위해 황실에서는 황실 가마를 배정했고 모든 일행들에게도 관청의 가마를 준비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집들에는 미국과 한국 국기가 내걸렸는데 내걸린 미국 국기 중에는 별이나 줄무늬(Stripe)가 빠진 경우도 있었고 색깔도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국빈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
엘리스 루즈벨트가 한국을 방문하여 황실 만찬에 참석하던 그 때 황실에서 의전을 담당하던 사람이 바로 엠마 크뢰벨이었습니다. 나중에 독일로 돌아간 그녀는 책을 펴내면서 당시의 기억들을 적고 있는데 그 중에는 엘리스 루즈벨트의 한국 방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뢰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엘리스는 철없고 무례한 방문객이었습니다.
크뢰벨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 황제께서는 미국 대통령의 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영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황제비의 무덤(홍릉) 근처에서 야외 리셉션을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크뢰벨은 관리들 및 궁녀들과 함께 리셉션 준비를 위해 홍릉으로 갔습니다. 이제 책에서 묘사된 엘리스의 모습을 옮겨봅니다. 아래의 내용은 1909년 11월 16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기사에 영어로 번역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먼지의 폭풍이 우리에게 몰아닥쳤고 그 먼지속으로부터 한 무리의 말 탄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무리의 선두에는 위세당당하게 말을 타고 나타나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주색의 긴 승마복을 입었고 그 아래에는 몸에 꼭 맞는 승마용 바지를 반짝거리는 승마용 장화 속에 접어 넣은 것이 얼핏얼핏 보였으며 승마용 채찍을 한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미스 엘리스 루즈벨트였다.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그 모습을 본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리에 있던 우리 일행이 한국 왕실의 격식에 따라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으니 이 "의용 기병대의 딸(Rough Rider's daughter)"은 이 모든 것을 장난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환영의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몇 마디의 고맙다는 말, 그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무덤가에서 무덤을 수호하고 있는 동물들의 조각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듯 했다.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큰 코끼리 석상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곁눈으로 흘낏 보더니 재빨리 말에서 내려서 순식간에 그 코끼리 석상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롱워스 씨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쳤다. 이것을 본 우리 일행은 그녀의 그런 망나니 같은 짓에 경악했고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저지른 그와 같은 무례한 짓은 한국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그런 짓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방식(American Style)' 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정말 중차대한 순간이었는데 차와 다른 음식이 나오면서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엘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 이 후로는 어떠한 감사의 인사도 없었고 그녀는 모건 공사 부인과 잡담을 나누면서 씩씩하게 샴페인을 마시고 또 다른 음식들을 즐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엘리스는 모두에게 말에 오르라고 명령하고는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과 함께 버팔로 빌처럼 말을 타고 떠나갔다."
이 기사에 인용된 책에서 보이는 엘리스는 한국의 전통과 한국 황실의 역사와 존재를 전혀 개의치않는 오만 무도한 '미국의공주'였습니다. 이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자 그 다음 날인 1909년 11월 17일 당시 엘리스의 남편이던 롱워스씨는 뉴욕 타임즈를 통해 그 기사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발표를 합니다.
11월 17일 기사에서 롱워스씨는 엠마 크뢰벨의 책에 기록된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쓴 여자는 정신이상자이거나 술 취한 사람이던지 아니면 그 두 가지 다 일 것"이라고 크뢰벨을 비난합니다.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신성한 코끼리가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일종의 숭배물(idol) 이었을 것이고 모든 방문객들이 존중해야 하는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분명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엘리스나 저 둘 중 누구도 그 숭배물을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엘리스가 서울의 거리를 "자주색의 긴 승마복을 입고 그 아래에는 몸에 꼭 맞는 승마용 바지를 반짝거리는 장화 속에 접어 넣은 것이 얼핏얼핏 보이는" 그런 모습으로 말을 타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코끼리의 등에 올라타고 저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외쳤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쓰레기같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무슨 좋은 일이 있읍니까?"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은 엠마 크뢰벨이라는 여성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당시 방문단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아마 크뢰벨이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기자가 엘리스를 직접 인터뷰하려 했지만 롱워스씨는 앨리스가 어떤 경우에도 인터뷰를 하지 않는 룰을 지킨다고 하면서 대신에 엘리스는 그 책에 실린 내용을 전해 듣고는 크게 웃었다는 사실을 기자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 독일에 있던 엠마 크뢰벨이 "나는 정신이상자도 아니고 거짓말장이도 아니다." 그리고 책에 실린 내용은 사실 그대로를 전했을 뿐이라고 한 기사가 실린 것이 11월 20일 이었지요. 그리고 이 기사에서 크뢰벨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미국 외교관 부인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아울러 자기가 만난 많은 미국 사람들이 "엘리스 공주는 선머슴애(Tomboy)" 라고 하더라는 말까지 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요? 한 쪽은 했다하고 다른쪽은 그러지 않았다 하니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요? '엘리스 공주'의 평소 행동들을 볼 때 이 일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말 뿐이지요. 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과연 엠마 크뢰벨이 언급한 그런 일이 실제 있었을까요?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자료를 더 찾아 보다가 한 가지를 기억해냈습니다. 1905년 경에 한국 주재 미국 공사관에서 공사 서기로 근무하던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Dickerman Straight) 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남긴 편지와 특히 수 백장의 사진과 그림 등이 코넬 대학교 도서관의 귀중본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자료들이 디지털화 되어 온라인으로 소개되면서 저도 알게 되었는데 혹시 그 사람이 남긴 기록 중에 엘리스의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가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코넬 대학교의 Willard Dickerman Straight 디지털 컬렉션을 찾다가 참으로 어이없는 발견을 하고 말았습니다.
왕릉의 석물에 승마용 장화를 신고 걸터 앉아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코넬 대학 도서관의 자료에 따르면 이 사진의 뒷면에는 "Alice Roosevelt at Seoul" 이라고 '친절하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사진 속의 이 여인이 바로 엘리스 루즈벨트인 것이지요. 결국 크뢰벨의 증언은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말처럼 코끼리는 아니지만 석마(石馬) 위에 걸터 앉아 사진을 찍은 것은 분명 엘리스이고 장갑을 낀 그녀의 손에는 크뢰벨이 말한 것 처럼 말채찍이 들려 있습니다.
물론 사진이 조작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1905년에 과연 정밀한 사진 조작 기술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 이 사진을 가지고 있던 윌러드 스트레이트 씨가 굳이 사진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런데 윌러드 스트레이트씨가 남긴 사진들을 둘러보다가 더욱더 놀란 것은 무덤의 석마 위에 걸터 앉은 것이 엘리스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사진들을보면 엘리스 이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는데 특히 카메라를 들고 있는 왼쪽의 인물은 코넬 대학의 자료에는 이름을 알 수 없다고 되어 있지만 이름이 밝혀진 다른 사진 속의 얼굴과 비교했을 때 미국 공사관 소속의 고든 패덕(Gordon Paddock) 씨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시면 가운데가 앨리스이고 오른 쪽에 나비 넥타이를 맨 사람이 롱워스 의원이며 반대쪽이 고든 패덕 씨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사진을 보고 나니 허탈하더군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 사람들에게 1905년의 한국, 아니 대한 제국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1934년에 출판된 엘리스 루즈벨트의 자서전 Crowded Hours 에서 엘리스는 한국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한국은 원하지 않았으나 속수 무책으로 일본의 손아귀 아래 미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퍼보였고 낙담한 것 같았다.그 들의 몸에서 힘이라는 힘은 모두 빠져 나가버린것 같았다. 거의 모든 장소에 일본 장교들과 병사들, 그리고 일꾼처럼 보이는사람들이 있었고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
그리고 1960년대에 남긴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본 일본 장교들이 이례적으로 똑똑해 보였고 또 유능해 보였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는 계속해서 우리 고종 황제 폐하에 대한 인상도 이어집니다.
"황제와 곧 이어 마지막 황제가 될 그의 아들(his son)은 우리 공사관 곁에 있던 궁전에서 내밀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 그 궁전의 유럽식 건물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였다. 우리는 먼저 이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고 땅딸막한(squat)황제는 나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지 않은 대신(손을 내밀어 엘리스가 잡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서둘러서 좁은 계단을 내려가 특히 주목할 것 없고 조그마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음식은 한국식이었는데 황실 문장으로 장식된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내가 사용한 그릇들은 식사 후 나에게 선물로 증정되었다. 궁전을 떠날 때 황제와 그의 아들은 각자 나에게 자신들의 사진을 주었다. 그 두 사람은 애처럽고 (세상사에)둔감한(pathetic,stolid) 인물들이었으며 황실로서 그들의 존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1960 년대에 남긴 인터뷰에서도 고종 황제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팔을 잡고 인사를 했다고 하고 자서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종 황제가 슬픈 인상이었으며 자신이 받은 선물은 식사때 사용한 그릇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신 한국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말을 타고서울 인근을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다녔다고 하면서 자신에 타고 다닌 조랑말이 외국인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는 기억은 고스란히가지고 있더군요.
1934년에 그녀가 남긴 자서전에서 말한 고종 황제에 대한 기억이 과연 그녀가 한국을 방문하던 1905년에 자신이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 약 30년간의 역사를 보고 나서 자신이 느낀 것을 이야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대한 제국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1905년 서울에서 자신이 보았던 고종 황제의 모습을 그렇게 슬프고 무기력한 황제로 기록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황실로서 그들의 존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녀의 아시아 순방단에 끼어 있었던 한 사람의 유력한 미국 관리의 이름을 보면서 저는 이런 판단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당시까지로는 가장 큰 규모의 이 아시아 순방단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한 관리가 끼어 있었습니다. 훗 날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1904년에서 1908년까지 미국의 육군성(Department of War) 장관을 역임한 윌리엄 테프트는 한국 역사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엘리스와 함께 온 이 순방단의 첫번째 기착지였던 일본에서 테프트는 일본의 수상 가쓰라 타로를 만나 비밀 협약을 맺습니다. 훗 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알려지는 이 협약에서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대신 필리핀의 미국 지배를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았지요. 그리고 이 밀약을 바탕으로 엘리스가 한국을 떠난 두 달 뒤 11월에 일본은 고종 황제를 압박하여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를 감지하셨기 때문일까요? 엠마 크뢰벨의 기록과 엘리스의 자서전에 나타나는 고종 황제께서는 적극적으로 엘리스의 일행을 환대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한국을 방문한 다른 어떤 나라의 사절보다도 더 성대하게 이들을 접대하셨다는군요. 이것은 미국 공사의 비서로 근무하던 윌러드 스트레이트 씨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고종 황제께서는 엘리스의 일행을 통해 기울어져 가던 대한 제국을 위한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찾으려 하셨는지도 모르지요. 두 달전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은 알지도 못 하신 채 말입니다. 이러한 엘리스의 방문에 대해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 공사관에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고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미 7월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으니까요.
밀약이라고는 하지만 엘리스를 포함한 순방단의 일부는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엘리스는 한국의 미래를 확실하고 알고 있으면서 고종 황제 폐하를 만났고 '애처럽고 (세상사에)둔감한 황제" 라는 생각을 실제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기에 서울 거리를 말을 타고 망나니처럼 헤매고 다녔고 황실의 능에까지 와서 석물에 올라타는 만행을 저질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찾아온 엘리스는 결코 조용하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출처- http://cliomedia.egloos.com/1848935
저는 이 사실을 부끄럽지만 서프라이즈라는 방송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작은 나라라는 이유로 무시 받고 두 강대국 사이의 무언의 협의에 의해 우리나라가 지배 당하고 뒤돌아서는 우리를 도우는척 하며 이용해 왔다는 기분 밖에 들지 않는군요... 위 글은 포온 글이긴 하지만... 사실을 여실히 잘 보여주는 내용이기에 올립니다. 글에서는 단순한 말괄량이 공주 엘리스 루즈벨트라고 하지만 과연 저것을 단순한 말괄량이라고 말할수 있을런지.. 한나라를 무시하고 없심 여김이 과연 말괄량이라는 말로 끝날수가 있을까요... 하=3
마지막으로 여러분 모두 올해 돈복 인복 이 넘쳐 나시길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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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까 서프라이즈에 나온분맞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