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생명말씀(2024.3.17) 말씀/ 누가복음 19: 28-38 최고의 가치에 투자하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다가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mission을 주셨습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풀어 끌고 오너라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한마디 말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처음에 제자들은 아마 의아했을 것입니다. 돈을 주지 않고 남의 물건을 그냥 끌고 온다는 것은 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의 말씀이라도 아닌 것은 아니데... 그래도 순종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말씀하신대로 가서 나귀를 만나, 말씀대로 나귀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말씀대로 나귀 임자가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대답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말씀대로 주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보내주었고, 나귀새끼를 풀어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하변 됩니다. 이해 안 되고, 내 생각과 안 맞아도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말씀대로 이러워지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제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만유의 주인. 진짜 주인 이시라는 것 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모든 것을 쓰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라사대 말씀으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6일 날 육축과 땅에 기는 것과 짐승들을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귀는 예수님이 창조 6일 째 만드신 가축 입습니다. 그러니까 나귀의 진짜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역대상 29: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나의 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너를 써야겠다 하실 때 “주여 쓰소서”하고 내 놓을 수 있습니까? 어느 날 주께서 너의 재능을 너의 재물을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쓰십시오” 하고 드릴 수 있습니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어느 시골 교회에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께 감사...모든 것 주심 감사”.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어느날 주님께 나에게 와서 너는 라를 위해서 소를 드릴 수 있느냐? 여러분들은 아멘으로 답할 수 있습니까? 아멘. 주님의 여러분들의 돼지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드릴 수 있습니까? 아멘(50%), 그렇다면 오늘 내가 닭 한 마리가 필요하다 하면 드릴 수 있습니까? 대답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는 아무도 없었고, 닭은 다들 키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상 내 것을 드린다는 것이 이렇게 쉽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평상시 예수님이 주(LORD)시라는 믿음과 주께 쓰임 받는 가치관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나귀의 주인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에 아마 두 가지 반응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데 드려야죠하고 드리는 것(약간 의무적임), 또 하나는 “정말 그 많고 많은 당나귀 중에서 우리 당나귀를 쓰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영광스럽게 여기며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보통 나귀들의 용도는 짐을 실는 정도입니다. 튼튼해서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다면 좋은 나귀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귀는 선택받아서 왕이신 우리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입성에 쓰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사람들은 주께 쓰임 받는 은혜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때로는 손해의식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주님이 쓰신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아마 누구나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정말 가치를 안다면 아까워하고 고민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나왔던 관원에세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있으리니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였지만 그는 부자인고로 고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생과 하늘의 보화와 자신이 가진 재물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지만 아직 영생의가치 하늘의 보화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알면 기꺼이 재산을 다 팔아 보화를 사겠지만 모르면 이렇게 고민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듣고서 제자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많은 사람들이 떠났어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떠나지 않은 것은 영생의 말씀 그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똑바로 보고싶어요 가스펠 송을 가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이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사실 주인공 자신은 낮고 초라하여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 노파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도 쓰신다면 기꺼이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당당해서가 아니라 허울뿐인데 이런 나를 쓰실까? 그런데도 주님 쓰신다면 드리겠다고...사실 잘 난 사람들은 드리기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공부 잘 하는 사람들 보십시오. 일 순위가 서울대 법대 의대 아닙니까? 수석을 하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부모가 목사 장로 권사라도 안보낼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히 자신이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도리어 은헤입니다.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린도 전서 1:2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주께 쓰임 받는 것보다 더 영광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칭찬하신 것은 가장 먼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드러낼 스펙이 없지만 예수님 증거하다가 30대 초반에 그는 순교하여 요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한 일의 가치를 최고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에 반에 공부하는 학생들이 60명쯤 되었습니다. 공부가 끝나면 대게 집에 가서 소몰이하고 풀 베고, 나무하고, 집안일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다들 공부를 많이 안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6학년이 되자 공부에 두 각를 나타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서울 대를 들어가고 행정고시를 패스 하였습니다. 사회 생할을 한참 한 뒤 동창 모임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며 모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해영아 네가 길을 잘 택한 것같다” 그래서 왜? 어째서지? 하고 제가 흥미롭게 물었습니다. “가치를 택했잖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친구는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했습니다. 공부를 잘 해서 그 친구는 세상 잘 나가는 길을 택했고, 저는 친구보다 공부를 못해서 힘든 목회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큰 가치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사실 가치를 느끼지 못하면 주님의 길은 가기 어렵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전도사님도 검사였는데 세상 직분 다 버리고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로 저래야 되. 진자 전도사님이야. 나도 나중에 전도사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시저 UBF에서 훈련을 받고 목자가 되었습니다. 콩고에 의료 선교사로 갔던 헬렌 로즈비어(Helen Roseveare)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콩고에서 사역하시다가 소천을 하셨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삶이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마마 루카 귀향하다'' 이분은 스코틀랜드의 엄격한 장로교 집안에 태어나서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을 할 때에 은혜를 체험하고, 남은 인생 주님 위해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선교단체 WEC 파송으로 아프리카 콩고를 갔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니 ‘선교사님 빨리 떠나십시오.“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자신이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서 내 삶 전체를 희생하러 왔는데 내가 도망갈 수 없습니다.’ 결국 폭도에 붙잡혀 갖고 5개월 동안 수없이 매를 맞고, 감금 당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폭도 두목이 그녀가 의료 사역을 하면서 꼼꼼히 기록해둔 모든 자료들을 갖다 다 불살라 버리고 나무에 묶어놓고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질문 했습니다. “주님, 제가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이곳에 와서 희생하고, 헌신한 것이 이게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까? 내가 이렇게 와서 고생했는데 이런 모욕을 당하고 이런 폭행을 당했는데 정말 내가 한 일이 이게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까?” 그 때 주님께서 그 마음속에 음성을 들려주셨어요. ‘너는 지금까지 내게 이것이 가치 있느냐, 내가 한 이 일이 가치 있는가?’ 하고 묻고 있는데 그러면 내 자신은 너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느냐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정말 진정한 가치가 있는 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도 때론 주님 믿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지 왜 이런 핍박을 받고, 이런 병으로 시달려야하는지 질문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이 가치가 있으시고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신다면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도 고난도 죽음도 불행하게 보이는 일들도 다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선교사님은 펑펑 울면서 주님 앞에 고백했다고 합니다. “Yes, you are worthy!” “네, 주님만이 가치가 있으신 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고 없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나의 전부가 되십니다.” 저는 특별한 재능이 없고 공부도 뛰어나게 잘하지 못해서 지방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결혼만큼은 똑똑한 여자와 결혼하고 자식들은 똒똑한 자식들을 낳아 기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도 중고등학교 시절 두각이 없기 다니다가 전문대를 졸업했습니다. 거기다가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기지도 못하고 눈의 초점도 맞추지 못하는 신체 지적 장애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힘든 개척 역사에 힘들게 키우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아들이 누나들이나 다른 사람들 힘들게만 하는데 삶에 무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가? 이 아들이 세상에 태어남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는 가치도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게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실패아니껬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요한복음 말씀이떠 올랐습니다. 주님이 이 사람의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누구의죄가 아니라 하나니므이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주님께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 뜻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 때문에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 때문에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영성의 눈을 뜨게되었습니다. 내가 아닌 주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붙잡게 되었고, 사랑을 기반으로 우주교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세상에 존재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느 것을 알얐습니다.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누가가 하나님의 영광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이미 영광이 디었음을 믿습니다. 존재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누가는 이미 큰 일으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행복하게 살게 하여주소서.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을까요? 힘들어도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요? 지금 특별히 크게 하는 일이 없어도 가치가 있을까요? 주님이 쓰시면 모든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올해 20년된 차를 처분하고 지지난 주 제주도에 가서 명남집사님과 새로운 적토마를 싫어왔습니다. 이 차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3만4천 키로 탄 차를 아주 싸게 800에 구입해습니다. 년수는 8년이지만 정말 새것 같은 차 아주 싸게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의 가치 앞으로 탈수록 고공행진으로 치솟을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승학 집사님이 힘써 주시고, 김효주 서광호 목사님 우리고 우리 지체들 모두가 힘써 주셔서 가능했습니다. 본래는 1,000만원을 요구하셨는데(인터넷 가격은 1300-1400) 교회에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800에 해주셨습니다. 타보니 새 것 같고 승차감도 너무 좋습니다. 차량 등록을 하고 그날 저녁에 호텔에서 잠을 자려는데 기쁘기 보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유주가 탈북민이고, 치매에 몸이 안 좋아서 판매를 하는 것인데 도와 주지 못할망정 내가 이런 분들에게 잘 사서 이득을 본다는 것이 오히려 벼룩에게 간을 빼어먹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되갰다싶어서 건강관리 하시라도 따로 100만원을 바로 입금시켜 드리고 왔습니다. 제자들도 공자로 나귀를 끌고 올 때 좀 미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승학 집사님께 그렇게 전달주시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하니 고맙다고 교회에서 잘 쓰시라고 했답니다. 앞으로 유용하게 써서 최고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시록을 보면 주 안에서 죽는 것도 복 되도다고 하였습니다. 살아있기만 해도 주 안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병들었어도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하면 주님의 가치가 모든 가치를 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장애 부모들이 자기 자식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스스로 살아갈 줄 모르는 아이들을 남기고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빨리 데려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라고 왜 그런 생각을 안 가져봤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지금도 아빠의 스승입니다. 나는 누가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인생을 배우고 사랑을 배웁니다. 낮아짐과 겸손과 비움을 배웁니다. 누가가 존재함으로만도 주 안에서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있는 모습 그대로 잘 살라고 기도합니다. 낮은 위치에서 행복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립 능력과 지혜를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알고보니 누가는 우주교회의 최초로 쓰임받은 서림멤버입니다. 아멘 결론, 주님께 쓰임받는 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한나는 한맺히 기도로 얻은 아들을 하나님게 드렸을 때 그 아들은 다윗을 기름부은 위대한 선지가 사무엘이 되었고, 시골 처녀 마리아는 만세에 복있는 여자 성모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귀새끼는 짐수레 끄는 수많은 나귀 새끼 중에 선택받아 주님께 쓰임 받는 최고의 가치 존재가 되었습니다. 적토마 스타렉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을 실고 믿음의 지체들을 실고 다니며 만세에 행복한 차가 될 것입니다. 주안에 있으면 살아도 가치 죽어도 가치, 모든 것이 가치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이 세상 끝날까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있는 모습 그대로 최고의 가치로 쓰임 받는 자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나를 쓰시겠다고 하실 때에 기꺼이 내어드리는 자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